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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5부 꽃 - 3장 종교의 굴레를 벗고, 루터의 허상과 실상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5부 꽃 - 3장 종교의 굴레를 벗고, 루터의 허상과 실상

건방진방랑자 2022. 1. 9.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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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터의 허상과 실상

 

 

15171031,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 교수인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교황 레오 10세가 발급한 면죄부의 부당성을 폭로하는 95개 조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교회의 문에 내걸었다당시 비텐베르크 교회의 문은 게시판으로 사용되고 있었으니 루터가 그곳에 대자보를 붙인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교황의 면죄부가 독일에서 팔리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 면죄부는 레오 10세가 성 베드로 대성당의 신축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발급한 것이었다. 대성당 신축은 전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계획한 것인데, 르네상스 시대의 유명한 건축가인 브라만테가 설계를 맡았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독일 종교개혁의 방아쇠를 당겼다고 할 수도 있다. 그 무렵 마인츠 대주교로 임명된 알브레히트는 초입세(annates: 성직자가 임명된 첫해의 수입을 교황에게 바치는 것)를 낼 돈이 부족하자 독일의 대상인인 후거에게서 돈을 빌렸고 이 돈을 갚기 위해 교황의 허가를 얻어 면죄부를 가져다 팔았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중앙집권적 왕국의 면모를 가졌던 프랑스에 비해, 독일 지역은 극도로 분열되어 있었으므로 좋은 면죄부 시장이 되었다는 점이다. 심지어 테첼 같은 수도사는 영업사원처럼 독일 전역을 순회하며 면죄부 판매에 열을 올렸다. 그의 행위는 당시 관례에 따른 것일 뿐이었으나 그 파장은 그의 원래 의도를 넘어 교황에게까지 전해졌다. 여기에는 구텐베르크 이후로 독일에서 크게 발달한 인쇄술 덕분에 그의 반박문이 인쇄되어 전국에 뿌려진 탓이 컸다(또한 이 무렵은 성서가 대량 인쇄되어 서민들에게까지 전해짐으로써 성서로 돌아가라던 위클리프와 후스의 사상이 실천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듬해 교황이 파견한 종교 심문단은 루터에게 반박문의 철회를 요구했으나 루터는 이를 거부했다. 뒤이어 루터는 교황도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교황 측의 더 큰 분노를 샀고 교황이 보낸 파문 협박장까지 불태워버리는 용기를 보였다. 신성의 징계를 무시하자 이번에는 세속의 징계가 떨어졌다. 교황의 세속적 대리인이 된 카를 5세가 그에게 추방령을 내린 것이다. 루터는 갈 곳 없는 처지가 되었으나, 바로 그 순간 그가 그토록 용기 있게 행동할 수 있게 한 배후가 드러났다. 선제후들 중 서열 1위에 해당하는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Friedrich , 1463~1525, 합스부르크의 프리드리히 3세와는 다른 인물이다)가 그를 자기 소유의 발트부르크성에 피신시켜주었던 것이다. 그는 비텐베르크 대학의 설립자이자 루터를 교수로 발탁한 장본인이었다. 그때부터 루터는 프리드리히의 명에 따라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사건의 전모를 추측할 수 있다. 루터가 반박문을 내건 행위가 프리드리히와 처음부터 공모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프리드리히가 루터의 배후에서 그를 지지한 것만은 분명하다. 프리드리히는 당시 현공이라는 별명을 가질 만큼 뛰어난 인물이고 학문에도 밝은 데다 뒤러를 비롯해 북방 르네상스를 개척한 예술가들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비록 종교적으로는 루터에 비해 온건한 입장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그것은 선제후이자 강력한 영방국가의 군주라는 그의 신분상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독일 지역의 지배층과 피지배층은 이미 종교의 측면에서 한배를 타고 있었다그 하나의 예로, 루터는 독일 귀족에게 고함이라는 글에서 독일의 귀족들은 독일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키고 교회의 재산과 토지를 접수하라고 호소했다. 이는 곧 영방군주들에게 로마 교황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노선을 걸으라는 뜻이다. 당시 서유럽의 다른 나라들은 이미 교회를 일국적인 차원에서 관리하고 있었으므로 루터의 주장은 시대의 추세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글은 혹시 작센 선제후가 루터의 입을 빌려선언한 것은 아니었을까? 1505년 스물두 살의 루터는 들판에서 천둥과 번개를 만나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계시를 얻고 신학에의 길을 걸었다고 전한다. 여기까지는 사실이겠지만, 그 후 그의 신학적 지식이 발전하게 된 데는 프리드리히와의 교감이 큰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95개 조 반박문도 역시 프리드리히의 영향력 아래에서 작성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다.

 

 

루터는 발트부르크 성에 은신하면서 성서의 번역과 저작 활동에 종사했지만, 그로 인해 일어난 바람은 그때부터 더욱 거세어졌다. 영방군주들은 즉시 루터파와 반루터파로 확연히 갈라져 다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다툼을 중단시키는 바람이 아래에서부터 불어왔다. 독일 지역 곳곳에서 민중이 들고일어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분명히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의 바람을 타고 일어났으면서도 루터의 주장을 지지하는 세력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루터의 사상을 나름대로 변형시켜 해석했는데, 루터의 사상 가운데 성서 중심주의, 평등주의, 제도권 교회의 부정에 관해서는 의견이 같았으나 핵심적 부분이라 할 영방군주들과 공동으로 행동하자는 데서는 견해가 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루터와 같은 신학자나 지식인이 아니라 일반 농민이었기 때문이다.

 

1524년 독일 남부 슈바르츠발트의 슈틸링겐 백작령에서 일어난 농민전쟁을 기화로 독일 전역은 삽시간에 농민전쟁의 물결로 뒤덮였다. 이 물결은 라인란트·슈바벤 프랑켄 등 남부를 휩쓸었고, 이듬해에는 북독일까지 확산되었다. 농민들의 요구 사항은 농노제를 폐지하고 인두세와 상속세 등 각종 봉건적 세금 부담을 경감하라는 것이었는데, 한마디로 요약하면 독일 지역에 만연한 봉건적 유제들을 철폐하라는 것이었다. 일부 농민들은 그리스도교 형제단을 결성하거나 교회에 바치는 십일조를 폐지하라고 주장했으나, 기본적으로는 종교적 측면보다 봉건 체제를 타파하려는 혁명적 측면이 강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농민전쟁은 종교개혁과 시기적으로 맞물릴 뿐 깊은 연관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곳곳에서 반란의 불길이 치솟자 영방군주들은 당황했다. 루터파와 반루터파로 나뉘어 있는 군주들, 그들에게 이미 전국적 명사가 된 루터가 농민들의 요구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다면 군주들 간에 혼란이 더욱 가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농민들의 주장을 단호히 반대하고 군주들에게 농민전쟁을 가혹하게 진압하라고 권고했다.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 것 같지만 군주들에게 독일을 교황의 손아귀에서 해방시키고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라고 호소한 그로서는 당연한 행동이었다. 루터는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종교개혁가일 뿐 사회운동가는 아니었으니까.

 

대개의 농민운동이 그렇듯이 농민전쟁도 비록 규모는 컸으나 조직적이지 못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군주들은 루터파와 반루터파를 가리지 않고 서로 공동전선을 이루어 연합군을 조직하고, 루터의 권고대로 가혹하고 끔찍하게 농민전쟁을 진압했다. 2년도 못 되는 기간 동안 농민들은 무려 10만 명가량이 죽었으며, 살아남은 사람들은 반란을 일으키기 전보다 처지가 더 악화되었다. 농민전쟁은 오히려 영방국가 체제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어주었을 뿐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아직 민중은 세상의 주인이 아니었다.

 

 

배짱의 배후에는 1521년에 루터(가운데)가 카를 5(오른쪽) 앞에서 자기 변론을 하는 장면이다. 이 자리에서 그는 추방령을 받았으나 제후와 주교, 시민 들까지 모여 있는 가운데서 당당하게 교회의 타락과 종교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한 그의 배짱은 놀랍다. 그러나 사실 그에게는 작센 선제후라는 든든한 이 있었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개혁과 비판의 차이

독일의 문제

루터의 허상과 실상

프로테스탄트의 탄생

기묘한 종교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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