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새로운 정치 세력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10월 러시아에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사건이 터졌다. 유럽 최후의 전제군주국이던 제정러시아가 볼셰비키 혁명으로 타도된 것이다【유럽과 아시아의 전통적 전제군주국인 청과 러시아는 불과 5년의 간격을 두고 차례로 무너졌다. 공교롭게도 1910년대는 세계적으로 제국들이 무너지는 시기였다. 두 제국 이외에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오스만튀르크 제국이 멸망했다. 15세기 부터 터키와 발칸 반도, 동유럽 일대를 지배했던 튀르크는 제1차 세계대전에 독일의 동맹국으로 참전했다가 패배하는 바람에 해체되고 터키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수천 년간 세계를 이끌었던 제국 체제는 이미 낡은 체제가 되었던 것이다】.
러시아에는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는 새로운 사회주의 공화국이 들어섰다. 피지배층이 지배층을 무너뜨린 이 소식은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특히 제국주의의 침탈로 인해 식민지ㆍ반식민지 상태에서 신음하던 세계 각지의 피억압 민중에게 그 소식은 해방의 빛줄기였다.
러시아 혁명의 이념인 마르크스주의는 국가보다 계급을 우선하는 혁명론이다. 따라서 한 나라의 성장과 발전보다는 전 세계의 피억압 민중이 단결해 제국주의 세력을 물리치는 것을 더 중요시했다. 당시 이것은 이론적으로만이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필요했다.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한 직후 제국주의 열강이 소비에트 연방에 간섭하면서 러시아 제국을 부활시키려 했으므로 신생국의 생존을 위해서도 반(反)제국주의 통일전선이 시급했던 것이다.
그래서 소련 공산당은 소련 내에서 혁명의 완수를 위해 노력하는 한편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는 다른 나라들의 사정에도 촉각을 곤두세웠다. 당시 소련의 주요 관심은 동유럽에 있었으나, 방대한 영토와 인구를 가진 중국이 장차 사회주의의 향방을 가늠하는 중요한 지역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1919년 소련은 반제국주의 운동을 담당하는 국제기구로서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을 조직했다.
과연 새로운 소비에트 러시아는 중국을 침탈하던 제국주의 제정러시아와는 달랐다. 코민테른은 제정러시아가 그전까지 중국에서 얻어냈던 모든 이권을 조건 없이 포기하고 중국 민중에게 반환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아울러 의화단 사건으로 발생한 배상금(20년 전의 것이 아직 지불되지 않고 남아 있었다)도 받지 않겠다고 했다.
▲ 혁명의 지도자 1917년 러시아 차리즘이 무너지고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사진은 혁명의 지도자 레닌이 망명지에서 페트로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군중의 환호를 받으면서 열차에서 내리고 있는 장면이다. 중국은 러시아보다 5년이나 앞서 제정을 무너뜨렸지만 보수 군벌들이 권력을 장악했다. 시민계급이나 민주주의의 경험이 없기는 마찬가지인 동서양의 두 거대 제국은 이 차이 때문에 명암이 크게 갈렸다.
중국의 뜻있는 지식인들은 소련의 조치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미 그 몇 년 전부터 중국에는 근대적 교육을 받은 선각자 지식인층이 형성되어 신문화(新文化)운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던 터였다. 이런 배경에서 진보적 지식인들은 급속히 사회주의사상으로 기울었다.
러시아 사회주의혁명이 중국에 앞날의 전망을 열어주었다면 이번에는 중국 민중이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때마침 터진 1919년의 5ㆍ4운동은 중국 민중의 힘을 여실히 보여주는 일대 쾌거였다.
원래 제1차 세계대전에서 중국은 군벌들의 주장에 따라 연합국 측으로 참전해 승전국 협상 테이블에 당당히 한자리를 차지했다. 패전국 독일이 중국 내에 가지고 있던 각종 이권은 당연히 반환되어야 했다. 그런데 전후 처리를 위한 파리 강화회의에서는 같은 승전국 입장인 일본이 제출한 21개 조만을 받아들이고 중국의 요구는 묵살되었다. 더구나 그 21개 조는 독일이 가진 중국에 대한 권리를 일본이 승계하고 나아가 만주 지역의 개발권까지 차지한다는 내용이었다.
가뜩이나 일본의 야심에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던 중국 민중이 5월 4일 강력한 반일 대중운동을 벌였다. 중국 전역에서 반일 시위가 잇달았고, 일본 상품에 대한 불매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비폭력으로 진행되었기에 군대를 조직하거나 폭동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거의 모든 중국인이 5ㆍ4운동에 참여할 수 있었다.
위로부터는 러시아 혁명이 미래를 열어주었고, 아래로부터는 중국 민중이 그 미래를 실현할 수 있는 힘을 보여주었다. 이 두 가지를 계기로 중국에서 전혀 새로운 정치 세력인 공산당이 탄생했다.
1920년 중국에 파견된 코민테른 대표 보이틴스키(Grigori Voirinsky)는 중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인 리다자오(李大釗, 1889~1927)와 천두슈(陳獨秀, 1879~1942)를 만나 중국공산당의 창당을 건의하고, 이를 위해 전국 각 지역에 공산주의 그룹을 조직하자고 제안했다. 이듬해 7월에 상하이에서 열린 제1회 전국대표대회에서 드디어 중국공산당이 창당되었다. 전국대표대회라고 해봤자 각지에서 열 세 명이 모인 데 불과했다. 당시 참가자들 중에는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도 있었는데, 그조차도 이 보잘것없는 모임이 30년 뒤 중화인민공화국을 탄생시키는 주체가 될 줄은 몰랐으리라.
▲ 지식인과 농민 러시아 사회주의혁명의 소식은 전 세계 피억압 민족에게 새 시대를 알리는 종소리였다. 사진은 왼쪽부터 중국공산당의 성립에 기여한 리다자오, 천두슈, 그리고 젊은 시절의 마오쩌둥이다. 인상에서 드러나듯이 리다자오와 천두슈는 지식인 출신이고, 마오쩌둥은 농민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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