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유럽을 벗어난 유럽 문명
전혀 다른 전후 처리
제2차 세계대전이 수백 년간 유럽 세계를 뒤흔든 전쟁들의 종착역이라는 점은 종전 직후부터 드러났다. 무엇보다 전후 처리가 전과는 크게 달라졌다. 17세기 초의 30년 전쟁부터 20세기 초의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3세기 동안 서유럽 각국은 치열한 영토 전쟁을 벌인 뒤 매번 그 결과를 조약으로 수렴하고 새 체제를 수립하는 방식으로 역사를 전개해왔다. 30년 전쟁은 베스트팔렌 조약을,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은 위트레흐트 조약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은 엑스라샤펠 조약을, 7년 전쟁은 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을, 나폴레옹 전쟁은 빈 회의를, 제1차 세계대전은 베르사유 조약을 낳았고, 이 조약들에 따라 새로운 국제 질서가 성립되는 게 유럽 근대사의 기본 공식이었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은 처음으로 그 공식에서 벗어난다. 연합국들은 우선 국제연합을 결성하고 이 ‘현대의 교황청’의 이름으로 전후 처리를 시작했다. 하지만 과거처럼 각국 정상들이 한자리에 모여 국제조약으로 모든 사안을 일괄 타결한 게 아니라 각각의 현안을 별도로 처리하는 방식을 취했다. 장사꾼에 비유하면 물건들을 도매금으로 넘기는 게 아니라 하나씩 제 가치를 매겨 실수요자에게 파는 식이다.
그만큼 국제 문제를 처리하는 방식이 정교해진 걸까? 좋게 보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들은 전과 달리 새로운 세계 체제를 구상할 필요가 없었다. 전쟁 중에 이미 그 윤곽이 확실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총론이 결정되었으니 전후 처리는 각론에 따르면 되었다.
과거에는 대규모 국제전이 끝나도 늘 다음 전쟁이 ‘예약’되어 있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한 차례의 전쟁만으로 완전히 해소될 수 없을 만큼 모순이 켜켜이 쌓인 탓이었다. 때로는 승전국들이 그 점을 지나치게 의식해 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무리수를 두는 바람에 새로운 국제전이 앞당겨지는 경우도 있었다(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마무리하는 엑스라샤펠 조약에서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점유를 인정하는 바람에 7년 전쟁을 부른 것이 그 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으로 치달을 무렵 연합국들은 이제야말로 근대 유럽의 역사를 얼룩지게 만든 지긋지긋한 전쟁이 최종적으로 끝났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사실 베르사유 체제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더 정교하게 진행했더라면 제2차 세계대전은 일어나지 않았거나 훨씬 작은 규모로 일어났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뒤 연합국 측이 패전국들을 ‘거칠게’ 다룬 이유는 그 전쟁으로 국제전이 끝났다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세계의 영토 분할이 완료되었으므로 그런 생각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나친 낙관에서 마무리 처리가 미숙했던 것—예를 들면 국제연맹의 엉성한 구조—은 결국 유럽 역사의 ‘부산물’에 불과한 파시즘을 지나치게 키웠고, 또 다른 세계대전을 불렀다】. 유럽 세계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던 수백 년 동안 지구상의 모든 지역이 알려지고 임자가 정해졌으므로 더 이상 다툼이 발생할 소지가 사라진 것이다. 전 세계의 퍼즐 조각들이 다 맞추어졌으니 이제 퍼즐 놀이는 끝났다. 앞으로는 적어도 유럽 세계 내에서는 전쟁이 없을 것이며, 다른 지역에서 전쟁이 일어난다 해도 지금까지와 같은 대규모 국제전은 아닐 것이다. 적어도 유럽에서 그런 전쟁은 이제 없다.
각개격파의 처리 방식은 그런 확신에서 나왔다. 세계대전도 두 번째 치르는 셈이었으므로 나름대로 노련해진 연합국 측은 패전국에 대해서도 무조건 과중한 징계를 가하고 알아서 기라는 무책임한 처리 방식을 피했다. 일단 독일이 파시즘 같은 ‘신무기’를 또 다시 개발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독일을 공동 관리하기로 결정했고, 독일의 하수인이던 오스트리아를 중립화시켰다.
패전국들에 점령된 나라들의 경우에도 예전 같으면 새로 정해진 국제 질서에 따라 일괄적으로 처리했겠지만 이제는 각국이 처한 상황과 처지에 따라 다양한 처방이 취해졌다(한반도를 포함한 11개 국가에 신탁통치를 결정한 게 그런 예다. 한반도는 오히려 그 조치 때문에 극심한 홍역을 치렀지만), 독일의 주권을 회복시켜주고 오스트리아를 영세중립국으로 만든 시기가 전후 10년이 지난 1950년대 중반이라는 사실은 전후 처리에 임하는 연합국들이 그만큼 신중한 절차를 취했고 나름대로 여러 가지 변수를 고려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 전후를 대비하자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전후 처리를 시작한 것도 제2차 세계대전의 특징이다. 그만큼 전쟁에 임하는 당사자들이 노련해졌다고 할까? 사진은 1945년 2월 연합국 정상들이 얄타에 모여 전후 처리를 논의하는 모습이다. 왼쪽부터 영국의 처칠, 미국의 루스벨트, 소련의 스탈린이다.
그러나 현실이 변화하는 속도는 그들이 대처하는 속도를 앞질렀다. 장차 등장할 새 국제 질서가 전 지구적 체제 대립의 형태를 취하리라는 것은 이미 전쟁 중에 감지되었으나 그것이 냉전 체제로 현실화된 시기는 예상보다 훨씬 더 빨랐다. 그 변화의 속도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패전국과 식민지에서 하나씩 찾을 수 있는데, 공교롭게도 둘 다 분단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패전국의 사례는 말할 것도 없이 독일이다. 20세기 양차 세계대전의 주역인 만큼 연합국이 독일을 온전히 놔두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 응징이 분단의 형태를 취하리라는 것, 그리고 그 분단이 그토록 신속하고도 강력하게 이루어지리라는 것은 종전이 되기 전에 죽은 루스벨트는 물론이고 처칠과 스탈린조차 예상하지 못했다.
루스벨트는 죽기 2개월 전인 1945년 2월에 처칠, 스탈린과 함께 크림 반도의 얄타에서 종전 후 독일을 처리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여기서 미국과 영국, 프랑스, 소련의 4개국이 독일을 분할 통치하고 전범들을 재판하며 독일의 재무장을 금지한다는 방침이 정해졌다. 그로부터 5개월 뒤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고 아시아의 일본만 저항하고 있을 때 미국과 영국, 소련 3개국 정상 루스벨트만 트루먼으로 바뀌었다은 베를린 인근의 포츠담에 다시 모여 얄타 회담에서 정해진 4개국 공동 관리의 방침을 확인하고 구체화했다. 하지만 말이 4개국이지 색깔로 보면 미국과 영국, 프랑스가 한편이고 소련이 다른 한편이라는 것은 누가 보아도 명백했다. 결국 독일의 국토와 베를린은 이 양대 세력에 의해 동서로 양분되었다. 1949년 5월 서독에서 먼저 단독으로 헌법을 제정하고 9월에 정부를 수립했으며, 여기에 자극을 받은 동독이 그다음 달인 10월에 독일민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했다.
식민지의 분단은 패전국의 분단과 비슷하지만 시기는 오히려 1년이 이르다(그만큼 패전국을 처리할 때보다 정성을 들이지 않았다는 의미도 된다).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이 항복하자마자 곧바로 한반도 남부에는 미군이, 북부에는 소련군이 진주해 사실상의 분단 체제가 시작되었다. 독일의 경우처럼 한반도에서도 분단 직후까지는 교통과 물자 이동이 자유로웠다. 그러나 1948년 5월 남한에서 먼저 단독으로 총선거를 실시하고 헌법 제정과 대한민국의 정부 수립을 선언하자 북한도 그해 9월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함으로써 완전한 분단이 이루어진다. 한반도에서 냉전 체제가 이렇게 빨리 모습을 드러낼 줄은 그것을 결정한 연합국 정상들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포츠담 회담에서 소련은 발칸을 독점하려는 의지를 분명히 드러냈지만 동유럽에 대한 욕심은 이미 그전의 얄타 회담에서 내비치고 있었다. 그 점을 잘 보여주는 게 폴란드의 사례다. 당시 루스벨트와 처칠은 런던에 있는 폴란드 망명정부를 지원했으나 스탈린은 폴란드 현지에 있는 폴란드 인민해방위원회를 지지했다. 그때는 아직 전시였으므로 그냥 견해 차이로 남았으나 종전이 가시화되면서 그 구도는 기정사실이 되었다. 독일까지 동서로 분할 점령한 판이었으니 독일과 소련의 사이에 위치한 폴란드가 어느 측의 지배를 받을 것인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사회주의는 원래 파시즘과 상극이다. 하지만 극과 극은 통하는 걸까? 레닌에서부터 사회주의의 이념과 이론에서 이탈한 현실 사회주의는 파시즘과 묘한 친화력을 보였다. 1인 권력 구조, 국가 지상주의, 선전과 선동으로 대중을 호도하는 전체주의적 성격에서 두 체제는 닮았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 스탈린이 히틀러와 독소불가침조약을 맺고 폴란드 분할에 함께 나선 것은 그 유사성의 표현이다】.
이런 변화를 신호탄으로 냉전은 바야흐로 새 시대의 구호로 자리 잡았다. 이제 유럽 전체가 얽힌 세계대전은 두 번 다시 없을지 몰라도 냉전의 보이지 않는 전선은 어느 때보다도 확고하게, 그리고 광범위하게 형성되었다. 전쟁이 아닌 체제 간의 ‘경쟁’이지만 전 세계를 무대로 하는 만큼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종래의 전쟁보다 더욱 치열했다. ‘냉전과 열전 사이’는 없었다.
▲ 냉전의 상징 독일은 전후에 서독과 동독으로 분립했어도 민간의 통행은 계속 이루어졌다. 특히 베를린은 서독과 동독이 분점했으므로 자유로운 왕래가 활발했다. 그러나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이후 이 장벽이 무너진 1990년까지 30년 동안 독일은 ‘완전한 분단국가’로 존속했다. 사진은 장벽이 세워지는 장면(위쪽)과 철거되는 장면(아래쪽)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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