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지위와 역할
숲의 호랑이가 두 마리였다가 한 마리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남은 한 마리가 숲의 단독 주인이 되어 모든 동물을 지배할 것이다. 미국산 호랑이도 바로 그렇게 하려 했다. 이제는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숲 전체를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고 모든 신민 위에서 군림하려 했다.
1991년 미국에서 멀고 먼 쿠웨이트와 이라크의 해묵은 영토 분쟁에 끼어든 게 그 예다. 이 문제의 뿌리는 30년 전인 1961년 쿠웨이트가 독립하면서부터 생겨난 것이었으니 새삼스러운 사태가 아니었다. 1980년대에 8년에 걸친 이란-이라크 전쟁에도 공식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던 미국이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한 사태에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선 것은 서아시아의 석유 이권을 노린 경제적 이유만 있는 게 아니라 냉전 시대가 끝나고 단독으로 전 세계의 우두머리가 되었다는 자신감의 발로이기도 했다.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George Bush)는 미국 의회와 국제연합을 움직여 이라크에 대한 경제제재 결의안을 신속히 통과시키고 미국이 주도하는 다국적군을 구성해 이라크를 공격했다. 정식 명칭은 페르시아 만 전쟁이지만 보통 걸프 전쟁이라고 부른다【걸프 전쟁은 현재의 시사적 의미만이 아니라 전쟁사적으로도 큰 의의를 가진다. 역사상 최초로 처음부터 끝까지 컴퓨터 시스템이 이용된 전쟁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미사일 담당 병사는 물리적 발사 장치를 조작했지만 걸프 전쟁에서는 오로지 컴퓨터 프로그램만을 조작했다. 이렇게 전쟁 과정이 비인격적(impersonal)이기 때문에 대량 살상에 따른 인도주의적 부담이 적어진다. 지금 우리가 19세기 중반의 크림 전쟁을 최초의 현대전이라고 기록하듯이, 후대의 역사서에는 걸프 전쟁이 최초의 현대전이라고 기록될 것이다】.
이미 냉전 시대부터 ‘세계의 경찰’이라는 불편한 별명을 얻었던 미국이다. 그래선지, 그 별명에 걸맞게 불과 42일 만에 걸프 전쟁을 완승으로 이끌었어도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지위는 오히려 하락했다. 경찰은커녕 조폭의 딱지나마 면하면 다행이었다. 왜 그럴까? 세계의 단독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왜 미국은 세계의 치안을 담당하는 명예로운 경찰이 되지 못한 걸까?
이유는 간단하다. 냉전 시대가 과도기였다는 점에 있다. 냉전 시대에 한 진영의 우두머리였던 미국은 그 시대가 지나자 원래의 위치로 돌아간 것이다. 그럼 원래의 위치는 무엇일까? 미국은 서양 문명의 ‘훌륭한’ 후손이지만 관리자나 지배자의 지위는 아니었다. 학급으로 비유하면 미국은 학급을 최종적으로 통제하는 교사가 아니라 반장의 역할이다. 반장은 반을 통솔하고 관리할 뿐 총책임을 지는 위치는 아니다. 급우들도 반장을 급우 대표라고는 인정해도 교사에게처럼 복종하지는 않는다. 반장은 명령을 내리는 지위가 아니고, 급우들도 반장의 명령에 따를 의무는 없다. 반장은 이해관계가 다양한 급우들의 의견을 총괄하고 급우들과 함께 결정을 내리는 지위다. 미국이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면서도 국제연합에서 다른 나라와 똑같은 ‘한 표’를 행사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미국의 착각은 세계 무대에서 자신의 역할이 반장이라기보다 교사라고 여긴 데 있다.
미국이 교사가 되지 못하고 반장에 그칠 수밖에 없는 또 한 가지 이유는 미국 내의 체제적 결함‘에 있다. 알다시피 미국은 연방 체제를 취하는 국가다. 미국의 한 주를 가리키는 ‘State’라는 단어가 ‘국가’를 뜻하듯이, 미국은 여러 국가가 모여 이룬 ‘합중국’이다. 서유럽의 시민혁명과 같은 역사적 기능을 담당한 남북전쟁으로 연방 체제가 강화되면서 중앙집권적 연방제라는 묘한 체제를 이루게 되었지만 연방국가의 속성은 언제든 부활할 수 있다. 독립 시기에 제정된 미국 헌법에 따르면, 미국에 속한 각 주는 연방에서 탈퇴할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이 권리는 지금도 법적으로 유효하다. 미국이 건국될 때부터 탈퇴의 권리는 국민의 자연권이자 중앙정부의 권한 남용을 제어하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미국 헌법은 몇 차례의 수정을 거쳤으나 개헌된 적은 없으므로 주의 탈퇴권은 아직 헌법에 명문화되어 있다. 오히려 법적으로 연방정부는 헌법에 명시된 권한만을 행사하고, 나머지는 주정부 또는 국민이 행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미국의 연방정부는 앞으로도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지향하겠지만 다원화의 역사적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다. 자칫 오버 페이스를 한다면 또다시 연방이 깨지는 위기가 닥칠지도 모른다. 결국 장기적인 견지에서 볼 때 미국은 대외적으로 반장의 역할에 그칠 수밖에 없고 대내적으로 연방 체제의 굴레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한계가 있으므로 미국은 아무리 패권주의 전략으로 일로매진한다 해도 그 뜻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미국 내의 강성 우파가 아무리 애국주의를 부르짖는다 해도 미국이 하나의 국민국가로서 단일한 목소리를 내기란 갈수록 어려워질 것이다【미국은 서유럽에서 이미 폐기 처분된 낡은 민족주의 이념에 여전히 매달리고 있다. 지금까지 보았듯이, 서유럽에서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중반까지 150년에 걸쳐 민족주의라는 독소적인 요소 - 실은 국민국가 체제가 성립한 데 따르는 필연적인 산물 - 때문에 엄청난 전란을 치러야 했다(그 절정이 히틀러의 인종주의다). 미국은 그런 역사적 경험이 없기에 아직 민족주의의 폐해를 실감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대외적으로 표출시키고 있지만, 결국 생략되거나 부재한 역사 과정은 앞으로 미국의 행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세계 문명의 역사에서 미국은 당분간 초강대국으로 군림하겠지만 세계의 경찰은 영원히 미국인들만의, 아니 연방정부만의 꿈으로 남을 것이다.
▲ 초토화된 문명의 고향 체제 간의 대결이 사라진 이후 전쟁은 미국이라는 반장이 명에 따르지 않는 급우들에게 제재를 가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사진은 1991년의 걸프 전쟁(위쪽)과 2003년의 이라크 전쟁(아래쪽)이다. 두 전쟁에서 미국의 공적으로 꼽힌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은 결국 반장에 의해 최초로 처형된 급우가 되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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