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서양사, 7부 열매② - 7장 유럽을 벗어난 유럽 문명, 체제 모순이 낳은 대리전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7부 열매② - 7장 유럽을 벗어난 유럽 문명, 체제 모순이 낳은 대리전

건방진방랑자 2022. 1. 31. 04:31
728x90
반응형

 체제 모순이 낳은 대리전

 

 

첫째, 앞으로 유럽 세계에는 국제전이 없을 것이다. 둘째, 전 세계적으로 자유주의 -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 공산주의 진영의 두 체제가 치열한 경쟁을 시작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조합하면 답은 하나다. 즉 이제부터는 유럽 지역이 아닌 곳에서 유럽 세계의 체제 모순이 대리전 혹은 국지전의 양상으로 표출될 것이다.

 

그렇게 보면 한국전쟁은 세계사적 필연성의 소산이다. 당한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하필 한반도에서 그런 전쟁이 터졌다는 게 억울하지만, 냉정하게 따져보면 당시 체제 대립을 국지전으로 표출할 만한 마당은 한반도 이외에 없었다. 우선 유럽은 제외해야 했고, 아메리카와 아프리카도 소련의 입김이 작용하지 않았으므로 열외다. 남은 곳은 서아시아와 동북아시아인데, 실은 서아시아도 유력한 후보였다.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는 19세기에 영국과 러시아가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중앙아시아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영국과 러시아의 경쟁과 대결을 체스 경기에 비유한 용어다. 두 나라가 직접 대결하기보다는 마치 체스판처럼 병력을 이동시키며 상대의 길목을 가로막는 양상을 취하는 것을 보고 영국 동인도회사의 정보장교가 그레이트 게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러시아는 부동항을 찾아 계속 남하하려 했고 영국은 동서 방향으로 움직이며 그것을 차단하려 했는데, 동북아시아에서 벌어진 러일전쟁은 그레이트 게임의 연장이자 최종 결말이라고 볼 수 있다을 치열하게 벌인 현장인 데다 특별한 지역적 구심점이 없어 대리전의 무대가 되기에 좋았다. 하지만 이 지역은 너무 넓어 전쟁이 벌어지면 금세 국제전으로 전화되기 쉬우므로 최선의 무대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후보로 남는 곳은 동북아시아다. 여기서 일단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므로 자격 미달이다. 중국은 좋은 후보지만 서아시아 지역처럼 자칫 전쟁이 대규모화될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종전 직후 마오쩌둥(毛澤東)의 공산당 세력이 패권을 장악하면서 국지전의 대상국이라기보다는 주관국의 자격을 갖춘다. 결국 국지전의 유일한 후보지는 한반도밖에 남지 않게 되는 것이다물론 연합국의 어느 누구도 의식적으로 이 과정을 계획하거나 주도한 것은 아니다(만약 계획자가 있다면 한반도 분단의 주범이라고 단정할 수 있겠지만), 한국전쟁은 미국과 소련을 보스로 하는 두 세계 체제가 제3의 지역에서 일합을 겨룬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국이나 소련이 처음부터 특정한 구도나 음모를 가지고 일관적인 수순을 밟아나가 전쟁의 국면으로 이끈 것은 아니다. 역사의 각 장면은 대부분 의식적인 행위의 소산이지만 그 결과로 나타나는 역사적 흐름은 어느 누구의 의도와도 무관한 경우가 많다.

 

19506월에 시작된 한국전쟁은 3년이나 지속되었으나 실제로 치열한 국면은 개전 후 10개월까지였다. 이 기간에는 전황이 엎치락뒤치락했다. 초기에는 북한군이 남한을 거의 점령했다가 인천상륙작전으로 전황이 역전되었고, 다시 중국군이 투입되면서 긴 교착상태로 접어들었다. 19514월에 주전론자인 맥아더가 해임된 이후에는 전선의 이동이 없는 진지전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는데, 말하자면 국지전(세계적 규모의 전쟁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속의 국지전이었던 셈이다. 결국 그해 후반부터 휴전이 논의되기 시작했고, 전선과 협상 테이블 양쪽에서 지리멸렬한 공방전이 2년 가까이 이어지다가 19537월에야 정식으로 휴전 협상이 체결되었다.

 

휴전이라면 무승부라는 이야기다. 차라리 승부가 났으면 좋았을 텐데, 두 세계 체제가 첫 번째 힘겨루기에서 무승부를 이루었으므로 체제 모순은 해소되지 않고 더욱 증폭된다. 예전 같으면 어느 측이든 끝장을 보자고 나섰으리라.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잘 알기에 이후 냉전 체제의 양측은 공갈 포로만 일관한다. 말하자면 두 터프가이가 실제로 한판 붙기는 서로 겁나니까 헬스클럽에서 하드트레이닝으로 근육만 잔뜩 키우는 격이다. 이것이 1950년대의 군비 경쟁으로 나타났다. 사실 냉전이 실제 대규모 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장군과 대통령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10월 맥아더와 트루먼이 웨이크 섬에서 만났다. 9월에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으로써 전세가 역전되었고 그 작전을 주도한 맥아더의 주가도 점에 달한 시기였다. 두 사람은 여기서 38선을 돌파하는 문제를 논의했다고 한다. 전쟁에 소극적이던 대통령은 장군의 제안을 수용했을 것이다.

 

 

싸우지 않고서 상대방을 제압하려면 덩치를 키우는 방법밖에 없다. 양 진영은 각자 똘마니들을 끌어들여 세 불리기에 매진한다. 미국과 유럽은 이미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49년에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 서유럽 주요 국가와 캐나다를 동원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결성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에는 아시아 지역에도 그런 장치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1954년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를 결성했다. 이에 맞서 소련은 1947년에 동유럽 국가들과 프랑스, 이탈리아 공산당을 회원으로 받아들여 코민포름을 결성했으며, 1955년에는 바르샤바조약기구(WTO)를 조직해 본격적인 냉전 준비에 박차를 가했디

 

우두머리의 임무는 뭐니 뭐니 해도 조직을 관리하는 데 있고 이를 위해서는 똘마니들을 먹여 살리는 게 가장 중요하다. 서유럽은 문명적으로 북아메리카에 유럽 문명을 이식한 모태 문명권이지만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빈털터리가 되었으니 애오라지 미국만 바라볼 수밖에 없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세계대전을 통해 더 부자가 된 미국은 우두머리답게 지갑을 화끈하게 열어 유럽 세계를 지원했다. 정식 명칭은 유럽 부흥 계획, 비공식적으로는 마셜플랜(Marshall Plan)이다. 미국의 국무장관 조지 마셜(George Marshall)의 제안으로 1948년에 시작된 이 계획에 따라 미국은 유럽에 4년 동안 120억 달러를 지원했다. 이 종잣돈으로 유럽은 산업과 농업을 안정시키고 재정난을 극복하고 무역을 회복시켰다. 이른바 라인강의 기적은 독일인의 근검 정신으로만 이루어진 게 아니다마셜 플랜의 직접적인 대상은 아니지만 한국전쟁 이후 전 국토가 피폐해진 남한도 미국의 전폭적인 경제원조를 받았다. 다만 미국의 전략적 육성 지역이 아닌 탓에 유럽처럼 체계적인 경제원조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주로 미국의 잉여 농산물을 무상으로 제공받는 식이었다. 그래도 잉여 농산물의 유통과 배급을 밑천으로 삼아 오늘날에까지 이르는 재벌 기업들이 성장했고, 이 기업들의 자금으로 정치 활동이 이루어졌다. 미국의 무책임한 경제원조가 한국의 천민 자본주의와 정경유착을 빚은 셈이다.

 

 

군사와 경제 전후 서양 세계의 단독 리더로 떠오른 미국은 자신이 살기 위해서라도 유럽 지역을 부흥시키기 위해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방침은 두 가지, 군사적으로 냉전을 대비하는 것과 경제 안정이었다. 왼쪽은 전자에 해당하는 북대서양조약기구의 포스터이고, 오른쪽은 후자에 해당하는 마셜 플랜의 포스터다.

 

 

적의 우두머리가 돈을 마구 뿌린다는 소식에 아연 긴장한 또 다른 우두머리 소련도 제 똘마니들을 부지런히 챙기지 않을 수 없었다. 마셜 플랜이 발효되자마자 곧바로 19491월 소련은 경제상호 원조회의(Communist Economic Conference, 코메콘)라는 기구를 조직해 사회주의 경제블록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소련은 미국과 달리 호주머니가 넉넉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부족한 돈은 이념으로 메워라!

 

소련은 이른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입각해 사회주의 국가는 모두 한 형제라는 구호 아래 국제적 분업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아무리 형제라도 소금 장수와 우산 장수의 이해관계는 다른 법이다. 원치 않는 분업 체제에 속하게 된 국가들은 입이 잔뜩 부었다. 게다가 사회주의 형제들 간에도 빈부의 차이가 있어, 가난한 폴란드는 공평한 부의 분배를 기대하면서 경제블록과 분업화에 찬성했지만 헝가리나 루마니아처럼 사회적 인프라와 자체 시장이 충분한 나라는 악평등화도 사회주의냐고 볼멘소리를 했다.

 

특히 전쟁으로 산업의 기간 시설이 초토화된 북한은 그 블록에마저 속하지 못해 극심한 경제난에 허덕였다. 우두머리가 외면하면 굳이 똘마니로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 자연히 자력갱생이 모토가 된다. 그 일환으로 소련에서 수입한 콤바인을 분해한 뒤 재조립해 보니 기계가 거꾸로 갔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진 일화다. 화가 치민 북한의 지도부는 세상에 믿을 놈 없다면서 우리식대로 살아가자.”라고 외친다. 이것을 이념적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지배자의 우상화로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만든 게 바로 주체사상이다(이념 체계로 보면 조잡하기 짝이 없는 주체사상이 의외로 북한 인민들에게서 자발적인 충성을 유도해낸 데는 전후 고립무원이던 북한의 처지가 큰 몫을 했다). 한국전쟁 직후 소련의 경제원조가 충실했더라면 주체사상이 북한 사회에 그렇듯 강력하게 뿌리 내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가장 강경한 독자 노선 역사상 최대의 전쟁으로 전 세계가 피폐해졌으나 미국은 자기 세력을 착실히 꾸린 반면 소련은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동유럽마저 팽개친 형편이었으니 아시아의 북한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은 동유럽보다 더 강력한 독자적 사회주의노선을 천명했는데, 사진은 이 이념을 웅변하는 주체사상탑이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전혀 다른 전후 처리

체제 모순이 낳은 대리전

다원화를 향한 추세

현실 사회주의와 몰락

미국의 지위와 역할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