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원화를 향한 추세
냉전 체제는 과도적일 수밖에 없었다. 30년 전쟁 이후 유럽의 역사, 나아가 전 세계 역사의 큰 흐름은 다원화를 지향하고 있었다. 한 차례의 국제전이 끝나면 신흥국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전통을 가진 유럽 세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수천 년의 중앙집권적 제국사를 전개해온 중국 사회에서도 근대에 접어들어 사회 계층의 분화가 뚜렷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냉전 체제는 다원화의 무의식적 흐름을 의식적으로 단순화시키려는 노력이었으나 이런 상태가 영구히 지속될 수는 없었다.
우선 체제는 양대 진영으로 단순해졌어도 국가의 수는 급증했다. 전체가 유럽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에서는 리비아(1951)가 이탈리아로부터, 수단(1956)이 영국으로부터, 콩고(1960)와 알제리(1962)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했다. 아시아에서는 한국(1945)이 일본으로부터, 인도네시아(1945)가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했고,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립했으며(1947), 베트남(1954)이 우여곡절 끝에 프랑스로부터 독립했다(베트남은 그때 분단국가가 되었다가 1975년에 통일되었다). 그 밖에 서아시아에서 레바논(1945)과 시리아(1946), 요르단(1949)이 독립했고, 1948년에는 말썽 많은 이스라엘이 건국되었다.
세계적으로 다원화의 추세가 역력한 가운데 시대착오적인 냉전 체제는 생존을 위해 몸부림을 쳤다. 한 도시가 동서로 나뉘어 있던 독일의 베를린에는 1961년 도심 한가운데 장벽이 설치되고 이동과 왕래가 금지되었다. 그 이듬해에는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설치하면서 미국과 소련의 긴장이 전후 최고조에 달했다. 하지만 그것은 역사적 필연성을 거스르는 냉전 체제의 회광반조(回光返照)에 불과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는 케네디의 용기 있는 대처에 소련이 꼬리를 내리는 것으로 끝났지만 설령 케네디가 폼을 잡지 않았다 해도 당시 세계 언론이 겁낸 제3차 세계대전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자연스러운 다원화의 흐름을 인위적인 구조로 얽어매려는 냉전 체제의 마지막 시도는 베트남 전쟁이었다. 소련은 동유럽을 건사하기에도 벅차 베트남 사태에 개입하지 않았는데도, 반대편 우두머리인 미국은 베트남인들이 스스로 정한 사회주의 노선을 저지하려 애썼다. 그러나 260만 명의 병력(아울러 30여만 명의 한국 용병)과 1200만 톤의 폭탄, 3500억 달러의 천문학적 비용을 투입하고 통킹 만 사건을 조작하는 비열한 짓까지 서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끝내 패배했다. 물론 베트남인들의 강력한 투쟁이 승리를 일궈낸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더 넓게 보면 미국의 패권주의적 의도가 역사의 흐름에 역행했기에 실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추악한 전쟁 인류 역사에는 전쟁이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무의미한 전쟁’도 많았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베트남 전쟁이다. 이 전쟁은 ‘추악한 전쟁’으로도 악명이 높다. 왼쪽은 부상한 동료 병사를 옮기는 미군이고, 오른쪽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베트남의 모습이다.
묘한 것은 냉전 체제를 이루는 두 진영의 움직임이 서로 어긋나는 것처럼 보였다는 점이다. 사회주의-공산주의 진영에서는 냉전 시대를 거치며 다원화의 논리가 점차 관철되는 추세를 보였다. 소련이 아무리 국제주의 원칙과 인위적 블록 체제로 결속을 다지려 해도 우두머리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한 대오의 이탈은 막을 수 없었다. 유고슬라비아의 티토는 1947년에 코민포름의 결성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그 본부도 베오그라드에 유치했으나, 금세 180도 태도를 바꾸어 바로 이듬해에 코민포름을 탈퇴하고(실은 축출이지만) 독자적 사회주의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1956년에는 폴란드와 헝가리에서 대대적인 반소비에트 대중 시위가 일어나는 바람에 소련이 직접 개입해 정권을 교체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반면 유럽에서는 언뜻 그와 정반대로 보이는 변화가 나타났다. 냉전 시대 초기인 1950년 프랑스의 외무장관 로베르 쉬망(Robert Schuman)은 프랑스와 서독의 철강과 석탄을 공동으로 관리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혹시 독일이 다시 전쟁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우려에서 제안한 것이었으나 그의 제안은 2년 뒤 서유럽 여러 나라가 가입한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로 현실화되었다. 당시에는 석탄과 철강의 무역 장벽이 사라지고 생산과 판매가 공동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 직접적인 성과였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그것은 유럽 세계가 경제블록화되는 첫 단추였다. 그런 배경에서 1959년에는 유럽공동시장(EEC)이 성립되었고, 이것이 1967년에 유럽공동체(EC)로 발전했으며, 1992년에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유럽연합(EU)이 탄생했다.
다원화의 추세를 막으려 해도 막지 못한 사회주의 진영과 오히려 의식적으로 블록화를 시도한 자본주의 진영, 이 정반대의 변화는 어떤 의미일까? 하지만 알고 보면 정반대가 아니다. 통합을 지향한 서유럽의 노력은 인위적인 게 아니었다. 우선 그것은 정치적 통합과 무관했다. 처음부터 군사적·경제적 측면으로 제한되었고, 이후에도 (사회주의 블록화와 달리) 이념적·정치적 통합으로 나아가려는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즉 유럽 통합은 시대와 정황의 필요에 따라 자연스럽게 제기된 것일 뿐 특정한 집단이나 지배 이념에 의해 ‘위로부터’ 하달된 게 아니었다. 더구나 통합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유럽 각국의 이해관계는 수시로 대립했고, 반목과 엇박자를 빚는 경우도 빈번했다.
그런 사정은 유럽 중세의 역사를 상기시킨다. 종교적으로는 통합되어 있었으나 세속적으로는 나라마다, 도시마다 분립한 시대가 바로 중세였다. 수백 년간 진통을 앓은 뒤 유럽은 결국 제2차 세계대전으로 중세적 질서를 되찾은 것이다. 유럽의 뿌리는 중세에 있었다. 유럽연합은 각국이 다원적으로 움직이는 가운데 최소한의 통합성을 부여하는 역할이다. 그런 점에서 유럽연합(나아가 국제연합)의 성립은 바로 중세 유럽에서 국제 질서의 구심점이었던 교황의 부활에 해당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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