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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기독교 성서의 이해, 제8장 복음서의 출현 - 사울의 개종체험 본문

고전/성경

기독교 성서의 이해, 제8장 복음서의 출현 - 사울의 개종체험

건방진방랑자 2022. 3. 2.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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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의 개종체험

 

 

이렇게 본다면 바울이 다메섹(다마스커스)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둘러 비추어 음성이 들리면서 눈이 멀었고, 사흘 후에나 아나니아라는 제자의 안수로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고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에피파니(epiphany, 하나님 현현)의 체험, 그리고 제자 아나니아로부터 세례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매우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사도 바울에 관한 환상적 이야기들이 후대에 다양하게 전승된 결과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런 생생한 이야기의 진실, 기독교사의 최대의 역전적 계기라고도 말할 수 있는 이 역사적 사건의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주 확실하고도 안전한 방법이 있다.

 

사도 바울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서한으로서 가장 그 저작성이 확실시되는 생생한 글이 우리 손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갈라디아서이다.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 이방교회의 율법주의자들, 그러니까 유대화파의 사람들이 율법준수를 고집하면서 바울의 개종이전의 생애를 문제삼아 그에게 사도의 권위를 박탈하고, 그의 선포의 권위를 근원적으로 붕괴시키는 음모에 대하여 매우 저돌적으로 돌진한 전투서한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에 대해 바울은 아주 정직하게 자기의 생의 체험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를 그의 자서전적 서한이라고도 부른다. 그의 자서전적 고백을 한번 들어보자!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殘害)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할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 후 삼 년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오일을 유할 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은 보지 못하였노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 (1:11~20)

 

 

누가 언제 사도 바울에게 거짓말을 둘러댄다고 욕해댔는가? 하여튼 하나님 앞에 맹세코 거짓말이 아니라고 강변하는 그의 어세는 이 사건이 그의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가를 말해준다. 바울은 여기서 그의 개종체험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사도성을 강변하는 이 결정적 순간에 왜 그는 예수의 음성을 직접 들은 그의 생생한 직접체험을 말하지 않는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오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9:4~9)

 

 

이토록 극적인 체험이 있었다면 과연 본인이 이러한 개종체험을 드라마틱하게 얘기 아니 할 수 있을까? 이렇게 드라마틱한 전변(轉變)을 고작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를 통해 나를 부르셨다’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다는 밋밋한 이야기로 얼버무릴 수가 있을까? 그리고 바울은 말한다. ‘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진실이라면 사도행전의 기사는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생의 한 시점에서의 역전의 순간에 대한 고백이 없이, 나는 엄마 태 속에서부터 선택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냥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도하기 위하여 내 속에 나타내셨다라는 추상적 표현을 쓸 수는 없다. 눈까지 멀었다가 뜨게 된 지울 수 없는 몸의 체험이라든가, 예수께서 보냈다는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만난 이야기도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에 관하여 성서주석가들은 매우 무딘 변명만을 늘어놓을 뿐이다. 성서는 반드시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읽어야 한다. 회심과 개종의 구체적인 장소와 시간과 사건형태에 대하여 일체의 언급이 없는 것이다.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다는 한 구절은 실제로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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