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적 주체의 재건
둘째, 근대적 ‘주체’의 재건입니다. 근대철학의 확실한 기초요 출발점이었던 주체는 흄의 비판을 통해 ‘지각의 다발’ ‘관념의 다발’로 해체되어 버렸습니다. 진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에 더해 이젠 아예 인식하는 주체조차 불가능하다는, 극히 부담스런 결론에서 칸트는 시작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어디든 길은 찾는 자에겐 있게 마련입니다. 칸트는 죽음 직전의 위기에서 근대적 ‘주체’를 살려냅니다. 과연 어떻게 살려낼까요?
칸트가 보기에 인간의 인식은 경험과 더불어 시작됩니다. 물론 흄이 지적한 것처럼 경험적 인식은 매우 불확실해서 진리가 되기에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런데 누구나 경험을 통해 인식한다고 하면 인간으로 하여금 동일한 방식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뭔가가 있을 겁니다. 도대체 그게 뭘까요?
약간 어려우니 돌아갑시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우리가 사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선 누구나 물건을 갖고 싶으면 살 수 있습니다. 경험이 다양하듯이 우리가 살 수 있는 물건도 다양합니다. 그러나 물건을 사는 사람이면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게 있습니다. 한마디로, 돈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건 누가 무엇을 사든 꼭 필요한 겁니다. 경험도 그렇습니다. 눈이 없으면 보지 못하고, 귀가 없으면 듣지 못하듯이 _이 없으면 경험이 불가능한 게 있습니다. 이 _에 무엇이 들어가야 할까요? 이게 칸트가 낸 문제입니다. 데카르트라면 이 문제에 쉽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건 ‘주체’라고, 주체가 없으면 어떤 경험도 불가능하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흄 말대로 이 ‘주체’란 여러 가지 관념과 감각 등으로 이루어진 복합체입니다. 여기에는 항구적이고 항상적인 게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칸트는 다르게 대답합니다.
그것은 경험보다 먼저 존재해야 합니다. 물건이야 외상으로 사고 돈은 나중에 갚을 수도 있지만, 경험이나 인식에는 외상이 안 통하기 때문이죠. 경험을 가능케 하는 조건은 경험보다 먼저 있어야죠. 이런 걸 칸트는 ‘선험적(先驗的) 조건’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앞서 본 것처럼 이것은 경험에 좌우되지 않는 확실성을 가져야 합니다. 다음으로 그건 모든 인간들이 반드시 가져야 하며, 동일한 형태(형식)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달러냐 마르크냐 하는 구별 이전에 ‘돈’이라는 공통된 형식을 말입니다.
자, 또 하나. 우리가 어떻게 인식에 이르는지 칸트를 따라가 봅시다. 언덕배기에 못 미쳐 돈키호테와 그의 종 산초가 있습니다. 그런데 언덕배기에 있는 물체를 바라보며 돈키호테가 외칩니다. “저기 팔이 넷 달린 거인이 있다!” 그러자 그 옆에서 산초가 말합니다. “주인님, 저건 거인이 아니라 풍차인데요.”
두 사람의 판단은 이처럼 크게 다를 수 있습니다. 칸트 용어로 말하면 ‘현상’은 이처럼 다르게 경험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돈키호테나 산초나 인식을 하려면 일단 감각기관을 통해 언덕배기의 물체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커다란 몸집에 팔 네 개가 돌아가는 물체를 말입니다. 이처럼 대상(물체)을 받아들이는 기관을 칸트는 ‘감성’(Sinnlichkeit)이라고 합니다. 어떤 인식도 감성을 통해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하지요.
그런데 우리가 대상을 받아들이는 데는 반드시 필요한 게 있다고 합니다. 풍차든 거인이든 ‘있다’는 건 반드시 어딘가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요컨대 거인이 있는지 없는지, 그게 거인인지 풍차인지를 공간 안에서 감지하는 거지요. 공간이라는 형식이 없다면, 저게 무언지를 떠나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지요. 또한 공간은 보거나 듣는 게 아니며, 따라서 경험되는 게 아닙니다. 반면 공간이란 보거나 듣거나 느끼는 경험이 가능하려면 꼭 있어야 하며, 경험보다 먼저 있어야 합니다. 이래서 칸트는 ‘공간’이란, 감성을 통해 대상을 받아들이는 데 필수적이며 모든 인간이 경험보다 앞서 가지고 있는 형식이라고 합니다. 이걸 칸트식의 말로 표현하면 ‘선험적 감성형식’이라고 하지요.
시간도 마찬가집니다. 거인이나 풍차가 ‘있다’ ‘없다’는 건 어느 시점에 있다, 없다지요. 즉 시간이 없다면 있다 없다를 지각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이것 역시 경험보다 선행하며, 경험을 가능케 해주는 감성의 형식이지요. 이래서 칸트는 시간과 공간은 경험에 선행하며, 모든 인간의 인식에 필수적인, 그리고 경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감성’ 수준에서, 앞의_에 들어갈 말이 바로 시간과 공간이라는 ‘선험적 감성형식’이지요.
이렇듯 감성을 통해 물체를 받아들인 다음에는 그것이 하나인지 둘인지, 큰 건지 작은 건지, 또 언제나 팔이 돌고 있는 건지 아니면 우연히 돌게 된 건지 판단하게 됩니다. 바람이 불어서 팔이 도는 건지, 아니면 팔을 돌려서 바람을 일으키는 건지도 판단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물체를 죽이는 게 가능한 건지 불가능한 건지도 판단합니다. 이처럼 받아들인 물체를 분별해내고 그 물체에 대한 종합적인 판단을 하는 기관을 칸트는 ‘지성’(Verstand)이라고 합니다.
딸기가 수박보다 작다는 판단이 가능하려면 ‘크다’ ‘작다’라는 범주가 먼저 있어야 합니다. 나무를 비비면 불이 난다는 판단이 가능하려면 그런 경우를 많이 경험해야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합니다. ‘나무를 비빈다’는 경험과 ‘불이 난다’는 경험을 결합해서 “나무를 비비면 불이 난다”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려면 두 현상(경험)의 관계가 필연적이라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필연성/우연성’이란 범주가 바로 이 경우에 필요합니다.
‘지성’이란 분별하는 능력(분별력)입니다. 크다, 작다, 하나다, 다수다, 필연적이다, 우연적이다 등의 ‘범주’를 통해 대상의 성질을 구별해내고 그것들을 결합해서 “나무를 비비면 불이 난다”는 판단을 만들어내는 능력인 거죠. 그런데 이런 능력이 활동할 수 있으려면, 그래서 경험에서 어떤 판단을 이끌어낼 수 있으려면 최소한 범주가 있어야 한다는 게 칸트의 생각입니다. 이 범주가 없다면 사물을 비교하는 것도, 사물들의 연관(필연적이다. 우연적이다 등등)을 찾아내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따라서 범주는 경험보다 먼저 있어야 하며, 경험에 좌우되는 게 아니라 경험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판단하는 데 필수적인 최소한의 범주를 칸트는 12개로 나누어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범주로 인해 인간은 법칙을 인식하고 사물들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언제나 있는 것이며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공통되기 때문에 인간은 공통된 판단 혹은 공통된 인식에 도달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진리에 이를 수 있다고 합니다. 이래서 칸트는 범주를 ‘선험적인 지성형식’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지성’의 수준에서는 범주야말로 _에 들어갈 말인 셈입니다.
감성만으론 느낄 순 있어도 판단할 순 없습니다. 지성만으론 인식할 자료가 없기 때문에, 느끼지도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이래서 칸트는 “지성 없는 감성은 맹목적이고, 감성 없는 지성은 공허하다”고 말합니다. 즉 감성과 지성이 결합해야 인식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인식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감성을 통해 시작한 인식은 지성을 통해 ‘이성’에 다다릅니다. 이때 ‘이성’은 인간의 이성이란 말이나 이성주의라는 말과는 달리, ‘하나의 원리로 통일시키는 능력’이란 뜻을 갖습니다. 이는 칸트만의 고유한 개념입니다.
‘이성’은 경험을 넘어서, 하나의 원리로 다양한 경험들을 통일시켜 파악하려는 욕구를 갖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근본적인 데까지 밀고나가는 성질’을 갖고 있는 겁니다. 예컨대 인간은 근본적인 원인을 찾으려는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부모님이 나를 낳았다는 것만으론 결코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은 누가 낳았고, 그들은 또 누가 낳았고……, 결국 근본적으로 모든 인간을 낳은 궁극적인 원인에 가 닿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생명의 신비함과 소중함을 깨달은 사람은 나무나 돌뿐 아니라 세상 모든 것에 생명이 있다는 식으로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을 확대하고, 그것을 통해 모든 것을 통일적으로 파악하려고 합니다. 이게 바로 이성‘이 하는 일이지요. 그리고 이런 ‘이성’의 형식을 ‘이념’이라고 합니다. ‘세계’ ‘자아’ ‘신’이 바로 그것이지요.
그런데 언제나 끝을 찾아나서다 보면 사고가 나게 마련입니다. ‘이성’ 역시 그렇습니다. ‘원인’이든 ‘생명’이든, 하나의 원리로 모든 걸 통일시키려다 보니 당연히 경험하지 못한 데까지 나아갑니다. 경험하지 못한 것을 하나의 원리로 설명하려다 보니 서로 상충되는 주장이 나타나며, 양쪽 다 옳다고 증명되는 경우가 생깁니다.
예를 들면 “시간과 공간은 끝이 있다”와 “끝이 없다”는 두 개의 주장이 다 증명될 수 있습니다. 어디선가 시작한 시점이 없다면 시간을 말하고 시간을 재는 게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따라서 시간에는 시작하는 점(끝)이 있는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어디엔가 시간이 시작하는 점이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시점 이전에는 시간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시간 이전에 시간과 다른 어떤 것이 시간 대신 있었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따라서 그 ‘시점’ 이전에도 시간은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시간은 끝이 없다고 하는 것도 옳은 것으로 증명됩니다.
이처럼 서로 상반되는 주장이 둘 다 옳다고 증명되는 경우를 칸트는 ‘이율배반’이라고 합니다. 그는 『순수이성 비판에서 이율배반의 예를 여러 개 드는데, 예컨대 물질의 더 쪼갤 수 없는 작은 단위는 있다/없다 등이 그것입니다. 이처럼 이성이 이율배반에 빠지는 것은 이성이 경험을 넘어서 하나의 원리를 추구하기 때문에 불가피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점에서 이는 인간 이성(넓은 의미)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칸트는 어떤 경험이나 인식도 피해갈 수 없으며, 또한 확실하고 선험적이라는 미덕을 갖고 있는 것들을 찾아낸 셈입니다. 선험적 감성과 선험적 지성이 그것인데, 이런 능력을 합해서 ‘선험적 주체’라고 부릅니다. 이는 관념이나 감각의 ‘다발’에 불과한 경험적 주체와 달리 모든 주체에 공통되며, 경험이나 감각에 좌우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좌우하며, 확실하고 항구적이라는 특징을 갖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어쩌면 경험적인 개인을 넘어서 있다는 뜻에서 ‘객관적 주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로써 칸트는 흄에 의해 해체되어 버린 근대적 주체를 ‘선험적 주체’라는 확고하고 튼튼한 것으로 되살려낸 것입니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