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의 역사
이와 같은 관점에서 푸코는 타자를 소통과 대화의 자리에 끌어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는데, 하나는 그 ‘타자의 역사’를 통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동일자의 역사’를 통한 것입니다. 전자는 『광기의 역사』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고, 후자는 『말과 사물』에서 쓰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타자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봅시다.
『광기의 역사』는 “미치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노력 자체도 하나의 광기인지도 모른다”는 파스칼의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푸코는 ‘광기’가 어떻게 해서 정상 사회에서 배제되고 감금되며 결국은 치료되어야할 ‘병‘으로 되어 가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를 ’르네상스 시대, 고전주의 시대, 근대’라는 세 개의 시기로 나누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이 구분은 그의 저작에 가장 자주 쓰이는 시기 구분입니다),
영화 얘기가 만만하니, 다시 영화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안소니 퀸이 그 잘생긴 얼굴을 흉칙하게 일그러뜨리고 나와 더 유명한 영화 「노트르담의 꼽추」를 보신 적이 있나 모르겠습니다. 혹은 위고의 소설로 직접 읽었다 해도 좋습니다. 「노트르담의 꼽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요소의 하나가 파리 시내의 부랑자들이지요. 거지와 광대, 광인, 도둑, 집시 등이 파리 시내의 일부를 ‘차지’하고는 집단을 이루어 살고 있는데, 그들 사이에도 나름의 규율과 처벌이 있고, 나름의 질서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과 달리 그들은 파리 시내에서 다른 정상인들과 함께 살고 있으며, 때로는 구걸도 하고, 때로는 거래도 합니다. 나중에 그들이 노트르담 성당을 습격하는 것 역시 이런 거래를 통해서였지요. 반면 아마데우스를 보면 사정이 다릅니다. 처음에 살리에리가 자살을 기도하는 곳은 광인과 부랑자들이 수용되어 있는 수용소였습니다. 그 역시 한 사람의 광인으로서 수용되어 있었지요.
이 두 영화에서 부랑자나 광인은 매우 다른 방식으로 살고 있습니다. 「노트르담의 꼽추」의 배경은 아마 중세 말 르네상스 시기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반면 「아마데우스」는 모차르트의 죽음(1791년)을 전후한 시기니 고전주의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기입니다. 「노트르담의 꼽추」에서 보이듯, 르네상스 시대까지 광인은 정상인과 구별되어 감금되거나 병자 취급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상당히 다른 방식로 살아가는 사람들일 뿐이었지요. 즉 ‘광인’이나 비이성적인 사람들이 정상인과 공존하던 시기였고, 그래서 그들과 대화하고 소통하며 때론 그들의 힘을 이용하기도 하고, 때론 그들을 ‘물먹이기도’ 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거리의 부랑자들은 예전에는 나병환자들을 가두던 수용소에 감금되기 시작합니다. 이성의 시대가 시작된 것인데, ‘로피탈 제네랄’(L'hôpital général ; 종합병원이란 뜻입니다!)은 바로 그들을 이성의 타자로서 배제하고 감금하던 곳으로서 탄생합니다. 이게 바로 「노트르담의 꼽추」와 「아마데우스」 사이에 일어난 일입니다. 따라서 「아마데우스」 시대에 그들은 병원인지 수용소인지 모를 곳에 감금된 채 나타납니다. 그곳에는 ‘환자’들을 통제하는 의사인지 신부인지 모호한 사람들이 있지요.
이 당시까지만 해도 광인은 다른 부랑자와 함께 취급되었습니다. 그러나 수용된 자들 가운데 빈자와 거지, 범죄자들은 광인들과 함께 가두는데 대한 공포와 저항을 갖고 있었고, 이후 산업이 발달하면서 일자리가 많이 생기게 되자 거지나 가난뱅이 등은 모두 풀려납니다. 그들은 이제 근대적 이성이란 동일자에 포섭될 수 있는 부분이 된 것입니다. 이제 범죄자와 광인만이 수용소에 남지요. 하지만 범죄자들 역시 광인과 분리해 수용해 줄 것을 요구합니다.
근대는 ‘대개혁’이라 불리는 조치와 함께 시작됩니다. 이는 예전엔 차라리 동물적인 존재로 취급되던 광인들, 그래서 극히 가혹한 처우를 받던 광인들을 인간으로 취급하려고 합니다. 다만 광기로 인해 아직 이성의 품 안에는 들어오지 못한 미숙아, 혹은 불행하게도 병에 걸려 미쳐버린 환자로 취급합니다. 그들은 감금에서 ‘해방’됩니다. 대신 이제 그들은 자신에 대해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가 됩니다. 그들은 종교나 도덕적 조치의 힘을 빌려 ‘치유’ 되어야 할 대상이 되는 겁니다. 물론 ‘책임을 못지는’ 자나 책임지길 거부하는 자는 더욱 가혹하게 감금되지만 말입니다. 참을성 많고 인격이 ‘훌륭한’ 사람들, 혹은 광인들을 다루는 기술이 뛰어난 사람들이 ‘의사’로서 그들을 ‘치료’하게 되지요.
결국 이런 역사적 과정을 거쳐 한때는 인간의 내면에 들어 있는 어떤 특징으로 간주되던, 혹은 유별난 행동과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이던 광기는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가둬두어야 할 대상, 치료되어야 할 대상으로 간주되어 배제된다는 것입니다. 그가 보기에 정신병리학이란 광기를 배제함으로써 정상인의 사회를 테두리짓고 정의하려 한 역사적 과정의 산물이며, 그들을 다루는 기술을 체계화한 것입니다. 즉 그것은 ‘진리’나 ‘과학’이라고 할 어떤 특징도 사실상 결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는 광기의 역사를 통해 광인이 타자로서 배제되고 침묵하게 된 과정을 드러내며, 광기와 이성 사이에 그어진 경계선을 허물고 있는 것입니다.
동일자의 역사를 다루는 『말과 사물』은 시인 보르헤스의 텍스트를 인용하면서 시작합니다. 서구와는 전혀 다른 동물 분류법이 그것입니다. 즉 사물들의 관계를 파악하는 전혀 상이한 사고방식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물의 질서를 파악하고 그 속에서 사물에 대해 판단하는 상이한 방식들이 있다는 걸 의미합니다. 사실 의식적인 사고란 이런 기초 위에서 진행되는 것이고, 이 기초는 사고를 가능하게 해주는 무의식적인 기초입니다. 이처럼 사고를 가능하게 해주며, 특정한 방식으로 사물들에 질서를 부여하는 무의식적인 기초를 푸코는 에피스테메(épistémè, 인식틀)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그는 앞서의 세 시기를 나누어 살펴봅니다. 르네상스 시대는 ‘유사성’의 에피스테메로, 고전주의 시대는 ‘표상’의 에피스테메로, 근대는 ‘실체’(표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독립적 실재)의 에피스테메로 요약됩니다.
푸코는 『돈키호테』를 통해 르네상스와 고전주의 시대의 에피스테메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풍차를 거인으로 ‘생각’하는 돈키호테는 유사성에 따른 사고방식을 보여줍니다. 반면 거인과 풍차의 동일성과 차이를 분명히 구분하는 고전주의 시대 사람들은 이런 돈키호테의 사고방식을 ‘미친 것’으로 이해합니다. 호박꽃과 배추꽃이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지 등을 분류하는 린네의 분류학은 고전주의 시기의 에피스테메를 대표합니다. 이들은 ‘표상’들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재현’한다고 믿었고, 따라서 표상들을 분류함으로써 사물들의 질서를 파악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말은, 생각(표상)을 통해 직접 존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이런 사고방식을 잘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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