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일을 열심히 하는 세 가지 이유
02년 5월 13일(일) 더움
오늘은 전투지휘 검열 일주일 전이다. 그래서 아침부터 준비태세가 걸린단다. 뭐 준비태세야 하루 이틀 해보는 게 아니기에(사실 FEBA에 나와서 한 화학전하 준비태세만 열댓 번은 한 것 같다) 그다지 문제 될 건 없었지만 누가 뭐래도 제일 짜증 나는 건 그걸 다 치워야 하는 괴로움이 아닐까 싶다(목사님 말씀처럼).
6시에 기상하자마자 생각할 겨를도 없이 화학전 하 준비태세가 걸렸다. 부랴부랴 그렇게 신물 나도록 입기 싫던 보호의와 방독면을 착용했다. 그리고 열심히 가쁜 숨을 쉬어가며 물자분류를 했다. 그렇게 다하고 나선 소산지(疏散地)에 가서 앉아 있었는데 처음엔 편했지만 어디 그게 맘처럼 계속 편하기만 할까. 거의 한 시간 정도를 앉아 있으려니 서서히 좀이 쑤시기 시작한다. 낙오할 뻔했지만 악착같이 버텨 8시 정도 되어서야 상황이 종료됐다.
그래서 한시름 놓나 했더니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연이어 짐 정리할 겨를도 없이 바로 국기게양식, 바로 전투력 복원 훈련을 위해서 60을 타고 N-7거점으로 이동했다. 방독면을 쓰고 2시간 정도 있었나? 답답해서 죽을 뻔했다. 힘들기도 오살나게 힘들었지만 누가 뭐라 해도 잠이 와서 그걸 참아내느라 더 힘들더라.
그렇게 분대장님(병장 남윤길)에게 세 번이나 걸렸으니 할 말 다한 거 아닌가! 분대장님들도 오늘 훈련동안 너무 많이 화가 내시더라. 힘들뿐더러 밑에 후임들이 말을 안 듣기도 해서 짜증이 난 것이다. 하지만 나도, 모든 사람들이 나름대로 짜증이 났기에 서로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짜증지수가 높아지는 상황이라면 다음주에 끝날 때까지 더욱 더 감정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힘들어질 건 뻔했다.
그렇게 끝나고 나서 복귀를 하니 6시 40분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군장 정비도 하나도 안 되어 있고 침상은 흙더미로 가득했다, 막상 그 현실을 대하고 보니 앞이 막막하더라. 나와 지용인 들어오지마자 치울 궁리부터 했다. 물론 난 중간이긴 하지만 갑자기 왜 활개 치며 아이들 통제하느냐고? 그러고 보니 요즘 매우 열심히 아이들 통제해왔다. 무슨 감정의 변화가 있었기에 이렇게 열심히 통제하려 하는 걸까? 여기에 대해 생각해보니, 이렇게 된 이유는 세 가지 정도인 거 같다.
첫째는 가장 긴요한 이유인데 군종활동을 하는 데 있어서 소대에서도 어느 정도 인정은 받는 선에서 하고 싶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중간으로서의 역할도 하지 않으면서 군종일만 한다면 사람들은 편한 일만 월 때리는 일만 열심히 한다고 생각한다면 차방문이든 교회 관련 활동이든 안 좋은 인식으로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소대에서 해야 할 일이 있을 때 전면에 나서서 해야지만 교회일이 있을 때도 나가는 것도 양해가 주는 거다. 그렇다면 지금 나름 열심히 하는 이유가 군종일을 하기 위한 전제이기만 한 건가? 전혀 그렇지도 않다.
둘째는 김영주 상병의 “중간 같지도 않은 게 빠질대로 빠졌네.”라는 말을 듣고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말은 몇 주 전에 소대활동을 대충하려 했을 때 했던 말이기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고, 그 말 중에 ‘중간 같지도 않다’는 말에 방망이라도 맞은 듯이 정신이 아찔했다. 그래서 그때 스스로 결심했던 거 같다. ‘어차피 할 바에야 인정받는 중간이 되자!’라고 말이다. 그래서 그때 이후로 좀 더 활발히 아이들을 통제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어느 정도 중간다운 면모에 가까워지고 있다.
셋째는 일반적 중간의 역할을 함에 따라 나중에 분대장이 되어 아이들을 통제하게 됐을 때 조금이라도 어색하지 않도록 지금부터 미리 인식시키려는 목적에서다. 내가 조금이라도 아이들을 통제하고 통솔하는 모습을 보여야 나중에 분대장이 되어 아이들을 이끌게 되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뿐더러 아이들도 당연한 현실로 인식할 것이기에 애쓰고 있다.
이런 세 가지 이유로 요즘은 물불 가리지 않고 소대의 일을 하고 있다. 과연 나중엔 어떻게 군종일과 소대일을 균형감 있게 하게 될지 기대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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