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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제주도 자전거 일주기 - 20. 대야에 담긴 물 같은 나의 마음 본문

연재/여행 속에 답이 있다

제주도 자전거 일주기 - 20. 대야에 담긴 물 같은 나의 마음

건방진방랑자 2019. 10. 21.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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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대야에 담긴 물 같은 나의 마음

 

 

세 가지 음식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먹고 땅콩아이스크림으로 입가심을 한 후에 음식점을 나왔다. 1024분에 들어가 1130분까지 있었으니, 정말 느긋이 먹은 셈이다.

 

 

 

    한 시간이 넘도록 음식을 느긋이 먹었던 추억의 장소.    

 

 

 

순간에 머물 수 있던 점심 식사 시간

 

음식을 먹더라도, 차를 마시더라도 이처럼 여유롭게 먹고 마시고 싶었다. 일상에 치여 살면 먹는 재미, 마시는 묘미, 그 시간을 즐기는 설렘을 모두 망각하게 된다. 그런 것들은 모두 살아가기 위한 방편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느 순간엔 내가 무얼 위해 이렇게 치열하게 살고 있지?’라는 회의감이 밀려온다.

나도 일상에 치여, 삶에 갇혀 하루하루를 지내왔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턴 내 자신이란 게 희미해져가고, 살아야 할 이유를 망각하게 됐다. 그렇게 희미해져 가는 나를 보면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싶어, 훌쩍 제주도로 오게 된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제주에 왔음에도 어제까지의 여행은 전혀 그러질 못했다. 자전거를 빌려 타고 달리면서 그저 목적지까지 어떻게 빨리 갈까만을 생각하며 맹목적으로 달렸으니 말이다. 그래서 뭘 먹더라도 맛있게 먹질 못했고, 뭘 보더라도 제대로 감상하질 못했다. 이럴 때 보면 나야말로 여전히 목적 중심주의적인 삶을, 결과 중심주의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누군가가 나를 과정이 아닌 결과만을 보고 평가하는 걸 극도로 싫어하면서도 나는 그렇게 살지 못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생각엔 고집이 있고, 몸엔 관성이 있기 때문에 살아온 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나 살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는 것이리라.

그럼에도 이 날 점심은 실로 여행의 이유에 맞게 느긋하고 여유롭게 먹고 누릴 수 있었으니 나에겐 둘도 없는 최고의 순간이라 충분히 평가할 만하다.

 

 

 우도를 한 바퀴 돌려던 생각을 접고 요만큼 갔다가 왔다.  

 

 

 

흐린 하늘을 보며 불안의 감정에 휩싸이다

 

우도에서 성산으로 가는 배는 두 군데서 출발한다. 한 군데는 아까 전에 배를 타고 들어온 천진항으로 매시 30분마다 출발하며, 다른 데는 하우목동항으로 매시 정각에 출발한다. 밥을 먹고 나왔을 때가 1130분 정도 되었기에 하우목동항에 가서 배를 타기로 했다. 점심을 먹은 음식점에서 더 가까웠기에 다행처럼 느껴지더라. 하긴 여긴 섬이 크지 않아 두 항구의 거리는 고작 자전거를 타면 10분 만에 닿을 수 있는 거리지만 말이다.

 

 

 산호해변에서 보이는 성산일출봉.  

 

 

우도에 들어올 때만해도 날씨가 서서히 풀려 구름 사이로 햇볕이 보이며 성산일출봉의 자태가 환히 드러났고 제주의 푸른 바닷물의 영롱한 빛깔이 훤히 드러났는데, 지금은 다시 구름이 잔뜩 끼며 어두워지고 있다. 비 예보는 없지만 금방이라도 배가 내려도 어색하지 않은 날씨가 되었고, 사위가 어두컴컴해지니 은근히 힘도 빠지더라.

 

 

 다시 어둠 속에 묻혀가는 제주도.

 

그런 상황이니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이 불안으로 말할 것 같으면 상황이나 환경에 의해 생기는 불안이라기보다 내 안에 꾹꾹 눌러왔던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누군가 국자를 휘휘 저어놓은 것처럼 표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이런 식의 감정의 동요나 억누름, 무의식과 같은 것은 심리학에서 주로 다루는 주제다. 이런 통찰이 서양에서만 있는 줄 알았는데 동양에서도 이미 오래 전부터 있었더라. 아래 인용한 순자의 글을 보면 그 대략을 알 수가 있다.

 

 

그렇기에 사람의 마음이란 비유하면 대야에 담긴 물과 같다. 대야를 바로 두고 움직이지 않으면 탁한 앙금은 아래로 가라앉고 맑은 물은 위로 떠오른다. 그러면 수염과 눈썹이나 미세한 얼굴의 주름까지도 비춰볼 수 있다.

그러나 살랑바람이라도 불면 탁한 앙금은 밑에서 움직이고 맑은 물은 위에서 뒤섞인다. 그러면 얼굴의 크나큰 이목구비조차 제대로 비춰볼 수가 없다. 마음 또한 이와 같다.

故人心譬如槃水. 正錯而勿動, 則湛濁在下, 而淸明在上. 則足以見鬚眉而察理矣.

微風過之, 湛濁動乎下, 淸明亂於上. 則不可以得大形之正也. 心亦如是矣. -荀子』「解蔽

 

 

탁한 앙금은 억눌린 감정이며 남에게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한 온갖 감정들이라 할 수 있고, 위에 떠오른 맑은 물은 감정은 안정되어 평온해 보이는 상태라 할 수 있다. 언제든 이런 평온한 상태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 만은 현실적으로 그건 불가능하다. 위의 글에도 나와 있다시피 살랑바람이라도 불면 누군가 감정을 흔들어 놓으면 억눌린 감정들이 끓어올라 나를 사정없이 흔들어재끼기 때문이다.

솔직히 배를 타고 제주로 나가고 있는 이 순간에 느껴지는 불안은 좀 의외이긴 했다. 불안해할 요소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잘 곳이야 나가서 구하면 되고, 달리다 생길 불상사라야 펑크가 나는 정도일 테고 그것에 대해선 만반의 준비를 해왔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왜 흐려진 날씨를 보며 싸늘한 바람을 맞으며 온갖 불안에 휩싸여야 했던 걸까? 이런 감정이야말로 내가 제대로 돌아보지 못한 감정일 것이고, 늘 억눌러왔던 감정일 것이다. 억눌린 건 언제 터져 나올지, 어떤 모양으로 터져 나올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니 이번 여행을 하며 이런 감정들을 잘 알아채고 잘 감싸 안아야 한다. 그 또한 나의 감정이고 또 하나의 모습이니 말이다.

 

 

 터미널에 도착했다. 들어갈 때의 날씨와 지금의 날씨는 너무도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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