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제주의 마지막 밤이 아쉬워라
성산포항에 도착했으니 이젠 목적지를 정해야 한다. 조금만 달릴 거면 김녕까지만 가면 되지만, 좀 더 욕심을 낼 거면 삼양동까지 갈 수도 있다. 물론 그러려면 그 근처에 머물 만한 모텔이 있느냐가 중요하지만 말이다.
▲ 거대한 거인처럼 풍력발전기가 돌고 있다.
연거푸 이틀에 걸쳐 두 번이나 스쳐 지나간 인연
그래서 먼저 삼양동 근처의 모텔을 검색해보니 거기엔 숙소가 거의 없고 시내 외곽 부근부터 많더라. 이런 경우 고민의 여지는 없다. 어차피 내일이면 여행을 마무리 지어야 하기에 오늘 좀 더 많이 달린다고 해도 괜찮으니 말이다. 그래서 별 다른 고민 없이 시내 근처의 모텔을 예약했다.
지금 시간은 12시 20분 정도이고 지도상으론 여기서 제주 외곽까지 2시간 40분이면 달릴 수 있다고 나온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거리 대비 자전거의 평균속도로 단순하게 계산한 것이기에 믿으면 안 된다. 사람은 일정한 속도로 달릴 수도 없을뿐더러, 지금은 맞바람까지 불고 있어 더욱 더 속도가 안 나기 때문이다. 그래도 시간은 아직도 많이 있으니 천천히 즐기며 달리다 보면 해가 저물기 전엔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한참 달리고 있으니 저 멀리 매우 익숙한 모습이 보이더라. 그건 다름 아닌 어제 성산읍으로 달릴 때 마주쳤던 자전거를 타고 여행 중인 여학생 두 명이었다. 어제도 마주쳤을 때 아무런 얘기도 나누지 않았지만 은근히 기운이 났던 것처럼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이렇게 또 마주치니 절로 힘이 나더라. 분명히 어제 앞질러 갔고 우도까지 들렸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건 이분들도 성산 근처에서 잠을 자고 다른 곳을 들렸다가 출발했다는 얘기다. 이쯤 되면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라는 노랫말과 같은 상황이 아닐까. 아마 그 순간에 “힘내어 열심히 달리세요”라고 말을 걸어도 됐을 거다. 하지만 그렇게 행동하면 매우 어색할 것 같아 그냥 맘속으로 ‘힘내세요’라고 응원해주며 그분들을 앞질러 갔다.
시간이 꽤나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말은 하지 않더라도 음료수라도 주고 올 걸 하는 후회가 든다. 그걸 계기로 왜 한 겨울에 여행을 하는지, 무얼 하시는 분들인지 물어볼 수도 있었을 텐데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 아쉬움만 남는다.
▲ 전혀 마주치리라 생각도 못했는데 이렇게 이틀 사이에 또 마주치니 정말 반갑더라.
제주 마지막 밤의 만찬
그렇게 가고 싶었던 제주박물관이 보인다. 지금은 시간이 어중간할 때라 내일 오전에 제주박물관을 둘러본 후에 자전거를 반납하면 딱일 것 같았다. 그러나 박물관을 지나며 보니 개관시간이 9시에서 10시로 늦춰졌더라. 고작 한 시간 늦춰진 거지만 박물관을 둘러보고 점심을 먹고 자전거를 반납하고 공항까지 가면 시간이 빠듯하다. 그래서 이번엔 어쩔 수 없이 박물관은 보지 않기로 했다. 다음에 왔을 땐 꼭 들려봐야지.
▲ 개관시간이 변경되어 아쉽더라. 그렇지 않았으면 내일 보러 왔을 텐데.
숙소에 도착하니 4시 40분이나 되었더라. 지도에서 알려준 예상시간보다 1시간 40분이나 더 걸려 도착한 것이다. 그래도 엊그제 제주에서 출발하여 3일 만에 다시 제주에 왔다고 생각하니 마음의 고향에라도 온 듯 가벼워진다.
저녁은 동문시장에서 회와 먹을거리를 사서 먹기로 했다. 동문시장은 제주의 대표시장답게 이미 떠놓고 포장된 회들이 즐비했으며, 저쪽 구석엔 야시장 먹거리 장터가 펼쳐지고 있었다. 경주 중앙시장의 야시장처럼 이미 사람들이 줄 서 있는 곳이 많았다. 하지만 난 회와 김밥, 어묵, 튀김만을 사서 잽싸게 나왔다. 제주의 토속 소주는 ‘한라산’인데, 하얀 병에 담겨 소주의 빛깔이 더욱 영롱해 보여 구미를 당겼다.
▲ 오늘의 만찬. 아니 제주의 마지막 밤을 자축하는, 여행 마무리를 축하하는 만찬.
오늘이 제주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술도 한 모금씩 들어가니 이 세상에 무서울 게 하나도 없다는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이 마구마구 든다. 그러면서 어제까지만 해도 그렇게 집에 일찍 가고 싶었는데, 이 순간만은 다시 올 수 없는 날이기에, 더욱이 제주에서의 마지막 밤이 아쉽게만 느껴지더라.
▲ 술이 들어가니 마음은 한 없이 외로워진다. 외로움에 사무친 밤이란 바로 이런 밤일 거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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