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몸을 맡겨 흐를 수 있길
어제 저녁에 동문시장에서 회와 김밥, 튀김, 순대, 어묵탕을 사와서 한라산 소주와 함께 먹으며 제주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6년 만에 찾아온 제주지만, 3일 동안 자전거를 타고 일주를 하고 나니 늘 있었던 곳인 양 편하게만 느껴지더라. 이래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하나보다. 하지만 이렇게 여행이 끝난다고 생각하니, 제주의 마지막 밤을 보낸다고 생각하니 사무치게 외로워진다.
▲ 한라산 한 잔에 젖어든 외로움 하나.
빈 공간을 채우려 애쓰다
살다보면 사무치게 외로운 날이 있다. 가족도 날 달래주지 못하고, 책 읽거나 영화 보기조차 귀찮은 그런 날이 있다. 이런 날이면 나는 친구를 생각한다. 술이나 한잔하자고 할까? 그러나 이내 그만두고 만다. 가슴 한쪽이 텅 빈 듯한 공허감을 그냥 두기로 한다, 비어 있는 채로. 얼마간 비어 있는 채로 두면 된다. 중요한 것은 그 빈 공간을 간직하고 견디는 일이다. 삶은 그런 것이다. 그러니 좋은 친구는 그 빈 공간을 채워주는 사람이 아니다. 그 공간을 존중하고 사랑하고 끝까지 지닐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다.
-이승수, 『거문고 줄 꽂아놓고』, 돌베개, 2006
이렇게 외로움이 사무쳐올 때면 나는 하염없이 전화기를 쳐다보며 전화할 누군가를 찾는다. 나의 외로움을 풀어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을 찾아, 나의 묵은 감정을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윗글의 저자는 ‘좋은 친구는 빈 공간을 채워주는 사람’이 아니라, ‘그 공간을 존중하고 사랑하고 끝까지 지닐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라 했지만, 난 빈 공간을 채워줄 사람을 찾고 또 찾아다녔다. 그러니 나로 인해 그 사람도 상처를 받고, 그 상처로 인해 나 또한 공허해지길 반복했던 거다. 이제야 알겠다, 내가 얼마나 빈 공간을 간직하고, 그걸 견뎌내질 못했는지를.
▲ [에반게리온]의 인물들은 하나 같이 외로움을 부둥켜 안은 채 사는 이들이다. 그리고 그걸 어떻게 존중해줄 수 있냐는 얘기를 담고 있다.
원래 이 여행은 4박 5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불현듯 제주로 떠나야겠다고 생각하고 비행기표를 예매할 때만 해도 ‘오랜만에 가는 거니 하루라도 더 있다가 오자’라는 마음이 발동했기 때문이다. 그건 지금까지 두 번의 제주여행이 3박4일 동안 하는 여행이었기에 그에 대한 반동이기도 했고 모처럼 홀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기에 제대로 누리고 오자는 오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행 첫 날 뜻하지 않게 늘 하던 방식대로 자전거 여행을 하게 됐고 그에 따라 전혀 의외의 방향으로 흘러간 게 문제였다. 상황에 휩쓸려 미친 듯이 달려 제주에서 서귀포까지 단번에 오게 되면서 지칠 대로 지쳤고, 숙소를 구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네 번 숙박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다.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시간이 없는 것도 아님에도 말이다. 그래서 그날 저녁에 생각을 바꾸게 됐다. 일요일에 돌아가기로 예약한 비행기를 급하게 취소하고 토요일에 돌아가는 비행기를 다시 예매했던 것이다.
▲ 예약한 티켓을 취소하고 토요일에 돌아가는 표로 다시 끊었다. 이런 변덕스러움이여.
빈 공간에서 피어난 열정
이 순간에 생각해보면 ‘왜 그리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려 안달복달했을까?’ 싶기도 하지만, 내가 떠난 여행은 줄곧 이랬던 거 같다. 막상 일상 속에 갇혀 있을 땐 어떻게든 어디로든 떠나고 싶어 몸을 비비꼬지만, 막상 떠나고 나선 금세 질려버려서 어떻게든 집으로 빨리 돌아가고자 했으니 말이다.
그건 국토종단 1년을 기념하여 떠난 벌교여행에서 아주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몸이 근질근질했기에 『태백산맥』이란 소설의 자취를 따라 벌교로 떠난 거지만, 막상 벌교에 도착하여 몇 군데 둘러보고 ‘태백산맥 문학관’을 잠시 살펴보니 3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른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지더라. 천천히 그 순간을 음미해도 되고, 시간도 넉넉했음에도 그러질 못했다.
▲ 벌교와 태백산맥을 찾아 떠난 여행. 그런데 3시간도 채 보지 않고 왔다는~
이건 어디까지나 어떤 순간들에 흠뻑 빠져들지 못하는 나의 지랄 같은 심보 탓이라 할 수 있다. 때론 『끌림』의 “열정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넌 자와 건너지 않은 자로 비유되고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강물에 몸을 던져 물살을 타고 먼 길을 떠난 자와 아직 채 강물에 발을 담그지 않은 자 그 둘로 비유된다. 열정은 건너는 것이 아니라, 몸을 맡겨 흐르는 것이다.”라는 구절처럼 몸을 맡겨 흐를 수도 있어야 하는데, 난 그러질 못했다. 그러니 몸을 맡겨 흐르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떠난 곳에 달라붙지 못하고 돌아가고 싶어 했고, 되돌아온 곳에 만족하지 못하고 또 떠나고 싶어 했다. 늘 이도저도 아닌 채로 불안해하고 불만족스러워하고 도망만 치려했던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 과연 언제쯤 나는 그 상황에 맡겨 흐를 수 있을까?
▲ 아침을 시작한다. 여행 마지막 날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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