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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자전거 일주기 - 23. 김만덕의 파란만장한 삶과 갑인흉년에 드러난 진심 본문

연재/여행 속에 답이 있다

제주도 자전거 일주기 - 23. 김만덕의 파란만장한 삶과 갑인흉년에 드러난 진심

건방진방랑자 2019. 10. 21.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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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김만덕의 파란만장한 삶과 갑인흉년에 드러난 진심

 

 

아침으론 어제 먹다 남은 것들로 간단하게 먹고 마지막 날의 일정을 시작했다. 제주박물관의 개관시간이 1시간 늦춰졌기에 그곳엔 갈 수는 없었고, 여기서 가볍게 둘러볼 수 있는 김만덕기념관에 가기로 했다. 김만덕 기념관은 제주항 부근에 있기에 자전거를 타고 1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하긴 김만덕이 활동하던 당시의 제주는 지금처럼 번화한 곳은 아니었다. 제주항 부근으로 사람들이 모여 살았으며 김만덕은 이곳에 객주를 열어 장사를 시작했으니 말이다.

 

 

후덕한 인상이 보기 좋다. 대모와 같은 풍모가 어린다.  

 

 

 

김만덕기념관에 들어서다

 

기념관에 들어서니 김만덕(1739~1812) 상과 그 앞에 나란히 쌓아올려 진열된 김만덕 사랑의 나눔쌀이란 포대자루, 그리고 그 뒤편으론 이가환李家煥(1742~1801)이 지은 탐라로 돌아가는 만덕을 보내며(送萬德還耽羅)라는 시가 쓰인 유리병풍이 둘러 있더라. 입구에 마련된 이 전시물만 보아도 김만덕에 대한 중요 정보를 얻을 수가 있고 이 기념관의 방향성을 알 수가 있다.

안내데스크에 걸어가니 여기는 입장료는 따로 받지 않아요. 3층부터 둘러본 후에 내려오시면 되니, 왼쪽 부근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세요라고 친절히 알려준다. 이중섭미술관은 이곳에 비하면 좀 더 아담한 규모의 미술관이었는데 그곳에서 가슴 뭉클한 느낌을 잔뜩 받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만으로도 행복이야라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이곳은 그곳에 비하면 훨씬 건물도 크고 웅장하다. 과연 이곳에선 무엇을 느끼게 될까?

 

 

 

입구에 들어서면 바로 볼 수 있는 광경.

 

 

김만덕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

 

3층에 도착하자마자 김만덕의 생애가 쫙 정리되어 있다. 김만덕(1739~1812)은 영정조 시대를 거쳐 순조 때까지 살았던 사람이다. 영정조 대를 일컬어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문학이 꽃을 피웠으며 조정에서도 세력 간의 균형이 잘 이루어져 정치도 안정된 조선의 르네상스라는 표현을 쓰는데 바로 이때 김만덕은 제주에서 태어나 자신의 최전성기를 보낸 것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순탄한 삶을 살았느냐고 하면 절대 아니다. 12(1750) 때 부모가 돌아가시며 의탁할 곳이 없던 그녀는 기녀와 살게 됐고, 그로 인해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18살엔 기적妓籍에 등록되어 기녀가 되어야 했다. 조선시대의 기녀란 천민에 속하는 계급으로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한다. 물론 시와 서를 익힐 수 있고 그걸 양반들에게 뽐내며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경우도 있으나, 그렇다고 천민이란 신분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게 그녀에겐 울분이 되었을 거고, 자기로 인해 친척들까지 천인취급을 받는다는 사실이 억울했을 거다. 그래서 그녀는 관청에 수시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한다. 그런 노력을 가상히 여긴 걸까? 결국 24(1762)이 되던 해에 제주목사가 기적에서 이름을 지우므로 양인의 신분을 회복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바로 그때부터 김만덕은 수완을 발휘하여 건입포구에 물산객주를 차려 장사하기 시작한다.

 

 

재현된 물산객주. 초반엔 이런 규모는 아니었겠지만, 점차 이처럼 커졌겠지.  

 

 

여기엔 제주만이 가진 특성이 반영되어 있다. 조선은 왜란과 호란을 거치며 급격하게 보수적인 성리학 체제가 지배하는 사회로 재편된다. 여기에 노론의 영수 송시열이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패러다임 전환을 주도했다는 건 안비밀이다. 이에 따라 여성은 더욱 수동적인 존재로, 남성을 뒷받침하는 수단적인 존재로, 늘 가려져 있어야 하는 존재로 차별을 당하게 된다. 이런 상황이니 여성이 경제활동을 한다는 것, 더욱이 장사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런 시대적 한계가 미치지 않는 곳이 바로 제주였다. 제주는 땅이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농사를 짓는 것도 쉽지 않았으며, 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런 척박한 환경은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자연스럽게 생업에 뛰어들게 했고 그로 인해 뭍과는 달리 양성이 모두 평등한 사회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김만덕이 양인이 되자마자 바로 객주를 차려 장사를 할 수 있었던 데엔 제주의 이런 특성이 반영되었기 때문이고, 조선 후기에 상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며 상품거래가 활발히 전개된 시대적 상황이 반영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김만덕이 성공한 CEO가 될 수 있었던 데에 제주의 특성이 반영되어 있다. 

 

 

 

제주를 휩쓴 갑인흉년, 그녀의 선택은?

 

김만덕은 건입포구에 물산객주를 열고 뭍의 물건을 제주에, 제주에서 잡은 싱싱한 해산물을 뭍에 매매하며 재산을 불려, 요샛말로 하면 성공한 여성CEO’가 되었다.

그러나 그저 장사 수완이 좋아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면, 김만덕은 우리에게 이렇게까지 알려지진 않았을 것이다. 흔히 성공한 사업가들의 이야기는 부러움을 자아내긴 해도 만인의 사표가 될 만한 자랑스러움까진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렇게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던 데엔 분명히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요소요소에 있고, 수많은 사람들의 아픔이 알알이 배어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오로지 자신의 능력으로 그리된 것이라 자부하여 사정없이 돈이란 칼날을 휘둘러 사람을 한낱 종으로 만들려 한다. 그러니 오죽했으면 재벌을 큰 도둑놈이라 비하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을까. 이처럼 김만덕도 이런 함정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그저 돈에 눈이 먼 장사치냐, 돈과 사람을 대등하게 여기는 상인이냐 하는 것은 평상시엔 절대로 알 수 없다. 위기의 상황이나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닥쳤을 때, 그가 어떤 행동을 취하는지 봐야지만 그 사람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김만덕의 사람됨을 알 수 있는 기회는 그녀의 나이 56(1794)에 찾아왔다.

 

 

2월 13일 GM은 군산공장 폐쇄를 결정했다. GM은 큰 도둑놈답게 악랄하게 문을 닫아 걸었다.   (사진출처 - 중앙일보)  

 

 

그 해엔 제주에 극심한 흉년(갑인흉년)이 들어 제주도는 혼란에 휩싸인다. 조정에서도 그런 내용을 알고 구휼미를 보냈지만 거친 바닷바람에 몇 척의 배가 난파되어 구휼하기엔 턱 없이 부족한 상황이 이어진다. 제주민 1.800명이 아사로 죽었다고 할 정도이니 그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알만하다. 제주민들이 천재지변으로 시름시름 앓아가던 이때가 바로 김만덕이 취한 행동을 통해 그의 사람됨을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감히 상상도 하기 싫지만 지금 이러한 천재지변이 닥친다면 대기업들은 어떻게 할까? 아마도 사람들의 불행을 호기로 삼아 새로운 사업(이를 테면 고리대금업 같은 것)을 하지 않을까. 이게 단순한 추측만은 아니다. 지금의 대기업들은 이윤추구만을 목표로 삼아 자국민들을 호구로 여겨 외국보다 훨씬 비싸게 가전제품을 팔아치우고 골목상권까지 진출하여 영세상인들을 내쫓으며 기술을 제공했던 중소기업의 기술을 위력으로 강탈하여 파산시켜 버린 전적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뿐인가, 취업난으로 제대로 기도 펴지 못하고 살아가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어떻게 이런 위기 상황을 함께 슬기롭게 헤쳐 나갈까 고민하기보다 그들을 그저 값싼 노동력, 언제든 교체 가능한 노동력으로 활용하기에만 급급하다. 이들에겐 한 푼이라도 더 벌 궁리만 있었을 뿐, ‘여기에 사람이 있다는 수많음 말들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으로 알 수 있는 건 돈이 있다고 다 너그러워진다거나, 누군가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거나 하진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더 추악해지고, 오히려 더 밴댕이 소갈딱지가 되어간다.

 

 

극심한 흉년이 왔다. 이로 인해 제주민들은 삶이 지옥이 되었다.  

 

 

 

가치 있게 쓴 돈이 새로운 가치를 만든다

 

영화 <도둑들>도둑이 도둑질하는데 뭐가 문제야?”라는 말이 나온다. 그처럼 장사꾼이 돈을 불리기 위해 장사를 하는 것이 뭐가 문제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 말은 곧 김만덕이 제주민을 상대로 쌀을 비싸게 판다고 해도 문제될 게 하나도 없다는 얘기기도 하다.

하지만 그녀는 흉년이 든 다음 해인 1795년에 목포에서 양곡을 사와 제주민에게 나눠줬다. 그것도 거의 공짜로 나눠줬다. 하긴 흉년에 가장 많은 피해를 당하는 사람들은 돈 한 푼 없이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가는 소시민들일 테니, 이들에게 돈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런 사람들에게 쌀을 판다고 하면 그것이야말로 배추가 비싸니 내 식탁에는 배추김치 대신 양배추김치를 올리라라고 말한 어떤 대통령의 천박한 인식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지. 이런 상황을 너무나 잘 알기에, 아니 오히려 직접 두 눈으로 그들의 궁핍한 생활을 목도했기에 김만덕은 쌀을 치부의 수단으로 삼거나 장난을 칠 용도로 사용하지 않고 그들에게 맘껏 나누어줄 수 있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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