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의 발견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우리는 기독교를 공관복음이 되었든 요한복음이 되었든 신약 4복음서의 틀 속에서만 규정하려고 한다. 이것은 기독교 정통주의의 너무도 당연한 입장이기 때문에, 나는 그 정당성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최소한 제1세기의 기독교형성사를 생각할 때 이러한 정통주의는 사소한 편견으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기독교는 4복음서 이외로도 수없는 복음서를 만들어내었다. 그리고 기독교운동은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가치관의 스펙트럼 속에 있었다. 도마복음서 그 다양한 물줄기의 주류를 형성하는 은밀한 연원이었다.❞
제1장
그리고 그가 말하였다: “이 말씀들의 해석을 발견하는 자는 누구든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And he said, “Whoever discovers the interpretation of these sayings will not taste death.”
‘그’는 누구일까?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는 말을 선포하는 주체인 ‘그’를 우리는 예수로 상정할 수도 있다. 도마복음 전체의 용례로 볼 때 그러한 상정은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앞에 서장이 나오고 본편 제1장에서 예수의 말씀이 곧바로 도입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법 구조와 단어 선택을 잘 살펴보면 다른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 제일 먼저 나오는 말, ‘그리고(And)’는 제1장의 말이 그 앞 프롤로그의 언어와 연결되어 있는 부속적 코멘트라는 사실을 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예수의 말을 도마가 기록하였다. 그리고 그가 말하였다.’ 이 때 ‘그’는 기록자인 쌍둥이 도마일 수도 있다. 이 제1장의 로기온은 예수가 자기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 그 말씀을 들어야 하는 당위성을 제시하는 말일 수도 있고, 기록자 디두모 도마가 이 말씀을 기록하는 그의 목적을 설명하는 말일 수도 있다. 도마는 예수의 은밀한 말씀을 기록하였다. 도마는 물론 사람이다. 예수의 분신과도 같은 예수의 쌍둥이 사람이다. 그 사람이 기록한다는 행위를 했을 때는 반드시 그 행위의 목적이 있을 것이다. 도마는 도대체 왜 기록했는가? 기록이란 반드시 그 기록을 읽는 독자들을 전제로 한다. 그는 독자들에게 자기 기록의 목적을 전달하고 싶은 것이다. 인용부호 안의 내용은 기록자 도마가 한 말로 볼 수도 있다. ‘그’라는 3인칭으로 되어있는 것을 보면 이 말은 나레이터가 연출한 것이 된다.
기록자 도마는 말한다. 그가 기록한 것은 살아있는 예수의 말씀이되, ‘은밀한’ 것이다. 은밀하다고 하는 것은 쉽게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은밀한 말씀은 은밀하기 때문에 반드시 해석(interpretation)되어야 하는 것이다. 바로 해석 자체가 살아있는 예수의 말씀을 접하는 인간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이기 때문에 은밀한 것이다. ‘은밀’과 ‘해석’은 상통하는 것이다.
▲ 전차경기장 스탠드 밑은 이와 같은 구조로 되어있어 바자르(시장)를 형성하는데, 하나의 석실 부스가 하나의 상점을 이룬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오늘날의 정통기독교도라고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도마가 권유하고 있는 ‘해석’을 거부한다. 그리고 말한다. 예수의 말씀을 해석하지 말고 곧바로 믿어라! 예수의 말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해석할 필요가 없다. 곧바로 믿어라! 기록자 도마는 바로 이러한 태도를 거부하는 것이다.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열쇠는 예수의 말씀을 해석하는 우리의 내면적 각성의 과정에서 주어진다는 것이다.
왜 오늘날의 기독교는 해석을 거부하는가? 그것은 바로 2천 년 동안 빵빠레를 울려온 요한복음기독교의 승리의 나팔 덕분이다. 로고스기독론에 의하면 예수는 말씀이며 빛이다. 그것은 태초로부터(요 1:1), 아브라함이 나기 이전부터 있었던(요 8:58) 존재이다. 예수가 곧 말씀이라는 뜻은, 예수는 말씀을 매개로 하는 하나님 그 자체라는 뜻이다. 요한의 예수는 끊임없이 외친다. “내가 바로 그라는 것을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요 8:24, 8:28), “내가 바로 그라는 것”은, 예수의 자의식 속에서 이미 예수는 곧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청중들에게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명료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10:30).
이 말을 정면으로 해석하기를 공포스러워하는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이 예수의 선포는 예수와 하나님의 완벽한 일치(complete identity)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나 의지의 일치(oneness of will or action)를 주장할 뿐이라고 에둘러대지만, 실제로 요한이 강력하게 주장하고 싶은 것은 살아있는 예수에게 전적인 신성을 부여함으로써 예수를 바라보는 인간들에게 ‘해석’의 여지를 상실케 하는 것이다. 만약 예수가 곧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예수는 신이 되고 만다. 그렇게 되면 예수는 오히려 헛도깨비가 되고 만다. 도케티스무스(Doketismus: ‘……처럼 보인다’는 뜻의 ‘도케오(dokeō)’라는 희랍어에서 유래된 말), 즉 가현설(假現說)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이 가현적 허구성을 방지하기 위하여 요한은 이미 1장에서 육화(肉化)라는 사상을 도입했다. 매우 절묘한 작전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요 1:14).
요한복음을 도마기독교 흐름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생각할 때, 요한복음 기술에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어법은 ‘나는 … 이다(egō eimi)’라는 예수의 호언(豪言)이다. 이러한 어법은 타 공관복음서에서 두드러지지 않는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6:35).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나는 양의 문이다’(10:7, 9). ‘나는 선한 목자다’(10:11, 1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내가 참 포도나무다’(15:1, 5).
이러한 표현은 매우 자랑스럽게 2천 년 동안 암송되어 왔지만, 불교의 상식으로 말하면 바라밀(pāramitā)의 열쇠인 무아(無我, anātman)의 대전제를 망각하는 망언이요, 아집과 독선과 배타를 구현하는 비어(鄙語)일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러한 말은 듣는 사람에게 확신과 믿음과 소망을 준다. 그러나 회의나 모색이나 탐구의 기회를 앗아가 버린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유일한 생명의 떡이다. 너희들은 아래로부터 왔고 나는 위로부터 왔다. 위로부터 온 나야말로 항상 아래로부터 온 너희들 위에 군림한다. 나는 너희들이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다. 나는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다. 너희들이 영생을 얻고자 한다면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딴 방법이 없다. 나를 믿고, 나를 따르고, 나에게 복종하고, 나를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로서 고백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구원을 얻으리라. 예수는 인간의 구원을 독점한다. 이러한 요한의 프로그램은 기막힌 성공을 거두었다. 2세기부터는 서서히 모든 기독교운동은 요한의 프로그램에 따라 변질되고 획일화되기 시작한다. 사실 우리의 마태ㆍ마가ㆍ누가의 공관복음서 이해도 요한의 필터를 거치고 있다. 도마의 필터를 통하여 공관복음서를 바라보게 되면 기독교의 그림이 전혀 달라질 수 있다.
도마복음이 말하려는 진리는 예수라는 한 인간이 선포하는 말씀 그 자체의 진리가 아니다. 그 말씀을 해석함으로써 나의 내면에 있는 빛을 밝히는 은밀한 과정에 내재하는 진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말씀의 해석은 반드시 발견되어야 한다. 발견이란 앙가쥬망(engagement, 정치참여)이다. 타인이 해석해놓은 것을 듣고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해석을 발견해가야 한다는 것이다. 발견이란 은밀함을 벗겨가는 과정이다. 발견이란 바로 나의 삶 속에 이루어지는 말씀의 체험이다. 살아있는 예수의 말씀이 나의 삶의 체험 속으로 참여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그것은 예수의 말씀인 동시에 나의 삶의 발견인 것이다. 나의 삶 속에 내재하는 우주적 생명의 환희의 발견인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인간은 죽음을 맛보지 않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또다시 물어야 한다.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는 뜻은 무엇일까?
▲ 두로지역에는 도마가 이 지역에서 선교했다고 하는 구전의 전통이 강렬하게 남아있다. 지금 이 글에서 논의하고 있는 도마공동체의 영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 내가 서있는 곳은 12세기 십자군이 지은 교회의 폐허 이지만, 재미있는 것은 이 교회가 도마에게 봉헌되었다는 사실이다. 십자군이 지은 교회는 대부분 세례요한에게 봉헌되었다. 도마교회는 매우 희귀하다. 십자군이 교회로 변형시키기 전에 이곳은 헤라클레스 신전이었고, 헤라클레스 신전 이전에는 또 멜카르트 신전(the temple of Melkart)이었다.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는 배를 타고 직접 이곳 헤라클레스 신전을 방문하였고 그 사실을 『역사』 속에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최후의 만찬을 베풀고 고별담론을 펼친다. 그리고 자기는 곧 어디론가 갈 것이라고 말한다. 도마는 뭔 말인지를 몰라 꼬집어 묻는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우리가 알겠삽나이까?” 이때 예수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요 14:5~6)고 대답하는 것이다. 도마는 그 길을 찾아 북방선교에 나섰고 인도에까지 갔던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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