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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서설 - 무아와 비아 본문

고전/불경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서설 - 무아와 비아

건방진방랑자 2022. 3. 15.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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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와 비아

 

 

기실 이 삼법인(三法印)의 언어 중에서 우리가 근본불교의 정신을 나타내는 단 한마디의 단어를 고르라고 한다면 무아’(無我. anātman), 이 한 마디 밖에는 없다. 그런데 무아(無我)는 궁극적으로 비아(非我)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 지금 우리가 보리수나무 밑에 앉아 명상하고 있는 싯달타의 사유의 세계, 그가 깨달은 세계, 그의 앎의 세계를 접근해 들어가려고 할 때, 내가 계속해서 해탈’(解脫, mokṣa)이니, ‘열반’(涅槃, nirvāṇa)이니 하는 말들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뜻은, 바로 이런 방식의 사유체계가 반드시 무아론이 아닌 비아론과 연결되기 때문인 것이다.

 

무아론(無我論)에서는 아 즉 아트만(ātman)의 존재근거가 상실되고 해소된다. 근원적으로, 본질적으로, 실체적으로 아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데 비아론(非我論)에서는 아()와 비아(非我)의 분열이 생겨난다. 다시 말해서 아가 본래적인 자아와 비본래적인 자아로 분열을 일으키며, 이 양자는 항상 대적적 관계로 치립(峙立)하는 것이다. 우리가 해탈이나 열반을 말할 때, 그것을 불을 끈 상태, 무엇으로부터 이탈된 상태를 의미한다면 거기에는 암암리 이러한 분열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즉 이탈ㆍ해탈은 반드시 ‘AB로부터 벗어난다고 하는 논리구조, 그러니까 사유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보리수 밑의 싯달타의 명상을 마왕 파피야스와의 투쟁으로 묘사한다면, 마라(魔王)의 유혹에 불타고 있는 나는 비본래적인 자아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불이 꺼져서 열반에 든 나는 본래적인 자아가 될 것이다. 이 본래적인 자아는 비본래적인 자아로부터 이탈되었고 해탈되었다. 그래서 열반에 들었다. 이때 육욕에 불타는 비본래적인 자아는 항상 나쁜 놈이고, 그 불이 꺼진 적멸한 자아는 항상 좋은 놈이다. 여기에는 항상 나쁜 놈은 육체적 자아이고, 항상 좋은 놈은 정신적 자아라는 심ㆍ신 이원론(body-mind dualism)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해탈(解脫, mokṣa)열반(涅槃, nirvāṇa)의 사상은 분명 불교가 아니다. 이런 식의 비아론은 무아론이 아닌 것이다. 인도에서는 아의 해탈을 설하지 않는 아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원시불교가 비아론적인 해탈론ㆍ열반론을 고집하는 현에 있어서는 그것은 인도사상의 일반논리를 충실히 계승한 진부한 이론밖에는 되지 않는다. 상키야 철학이나 쟈이나교로부터 후대 베단타의 샹카라에 이르기까지의 거대한 인도사상의 홍류의 한 거품에 불과하고 만 것이다. 불교가 참으로 불교가 될 수 있는 아무런 새로운 논리적 근거를 우리는 발견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한 풍선이 상자곽 속에 들어 있다. 그런데 이 풍선이 상자곽을 해탈하여 자유롭게 날아간다. 이때 상자곽의 모든 것은 나쁜 것이다. 그리고 풍선은 좋은 것이다. 그리고 상자곽은 시간적인데 반하여 풍선은 무시간적인 것이다. 아의 비아로부터의 해탈(解脫, mokṣa)이라고 하는 논리에는 항상 아가 건재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아론이 아닌 아론이다. 이것은 우파니샤드(Upanisad) 철학이지 불교철학이 아니다. 싯달타의 혁명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풍선 상자곽의 비유에 깔려있는 사유체계는, 플라톤동굴의 비유에 깔려있는 올페이즘적 사유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그것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적인 사유의 한 전형이다. 소크라테스가 죽음에 직면하여 그의 부당한 죽음을 디펜드하는 언사들도, 모두 한결같이 인간의 세계와 신의 세계, 육체의 생멸과 정신의 불멸이라는 그러한 비아론적 2원론사유에 지배되고 있는 것이다. 아폴로지(Apology)크리토(Crito), 파에도(Phaedo)와 같은 플라톤의 대화편을 읽어보면 누구든지 그러한 자아의 분들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전통을 이은 기독교적 사유도 없이 죽음 즉 열반을 말한다. 죽음과 부활의 구조가 곧 기독교의 열반인 것이다. 통속적인 기독교를 믿는 모든 사람들도 한결같이 해탈을 갈구한다. 기독교인들의 영혼이 사후에 천당으로 진입하는 것이나, 불교도들의 아트만(ātman)이 열반으로 진입하는 것이나 똑같은 해탈론인 것이다. 해탈과 열반을 말하는 한, 기독교와 불교는 하등의 차이가 없다. 그것은 곧 기독교와 불교, 희랍-유대 문화권과 인도 문화권이 공통된 언어문화권일 뿐 아니라 상고(上古)로부터 직접ㆍ간접으로 교류된 하나의 문화권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항상 새롭게 인식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내가 생각키에, 싯달타는 이러한 해탈ㆍ열반(涅槃, nirvāṇa)의 논리를 주장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오히려 그러한 해탈ㆍ열반론이 풍미하는 자신의 문화전통을 전적으로 거부함으로써 새로운 기원을 이룩한 사상가였고, 사회혁명가였으며, 종교적 실천가였다. 그는 주부-술부구조적인 자기 언어 그 자체에 도전장을 내밀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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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반야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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