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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복음한글역주, 제1장 - 죽음의 해석 본문

고전/성경

도마복음한글역주, 제1장 - 죽음의 해석

건방진방랑자 2023. 3. 17.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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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의 해석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인간은 죽는 순간까지 살아있을 뿐이다. 인간에게 죽음은 물리적으로 체험되는 사태는 아니다. ‘맛본다는 것은 삶의 행위일 뿐이다. 그 맛보는 삶의 감각적 행위 속에 죽음이라는 메뉴가 들어있지 않다는 것은, 인간이 죽지 않는다는 사실판단의 명제는 아닌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생명의 고귀함을 드러내기 위한 심볼리즘일 뿐이다. 그 심볼리즘은 예수가 선포하는 천국의 해석과 관련되어 있다. 도마복음은 영생(永生)을 신앙의 미끼로서 실체화하지 않는다.

 

 

1

그리고 그가 말하였다: “이 말씀들의 해석을 발견하는 자는 누구든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And he said, “Whoever discovers the interpretation of these sayings will not taste death.”

 

 

혹자는 말씀들의 해석을 발견하는과정을 개인적이라기보다는 집단적인 과정으로 주해하기도 한다. 당시 문맹률이 95% 이상을 차지했던 사회에 있어서 문서기록을 해석할 수 있었던 사람은 극히 제한된 인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운동은 궁극적으로 대중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러한 갈등, 즉 포퓰리즘(populism)엘리티즘(elitism)의 괴리는 고대사회에 있어서는 심각한 문제였다. 그러나 예수가 살았던 그레코로만의 1세기는 과거 어느 시대에 비교하여도 문자와 지식의 보편화가 일어났던 시기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도마의 기록을 일반대중들이 직접 읽고 해석했다는 것은 당대의 현실상황에서는 어불성설(語不成說)이었다.

 

이미 내가 이러한 문제에 관하여서는 나의 저서 기독교성서의 이해(서울: 통나무, 2007)에서 설진(說盡)하였다. 9낭송문화와 복음서를 참고하면 당대의 실제정황을 숙지할 수 있을 것이다. ‘도마가 기록하였다할 때, 그 기록은 주로 양피지(parchment) 위에 쓴 것인데2~4세기 콥트어 코우덱스는 파피루스를 사용한 것이지만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사용한 소재는 주로 양피지였다, 그것은 매우 고급소재였으며 가격이 높았다. 그래서 대중적인 의사소통의 수단은 아니었다. 게다가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는다. 따라서 은밀한 말씀의 해석은 실제로 집단적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해서 도마가 기록한 예수의 말씀들은 특정한 공동체의 리더에 의해 낭송된 것이다. 그 한 사람의 낭송을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듣고, 해석하게 되는 것이다. 혹은 낭송자가 해설까지 곁들여서 설교를 했다고도 추론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도마복음서의 성립연원을 생각할 때, 그 정확한 명칭이 어떠하든지 간에, 도마공동체의 존재를 그 배후에 연상치 아니할 수가 없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 말씀들의 해석을 발견하는 자라는 것은 도마공동체에로의 입단이라는 제도적 성격을 암시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두로에는 세계 최대규모의 화려한 네크로폴리스가 있다. 저 앞에 보이는 하드리아누스 개선문 안쪽으로 두로라는 메트로폴리스가 있고 그 밖에는 석관들이 즐비한 거대한 공동묘지가 있는 것이다. 로마인들에게는 죽은자들도 도시 구성원의 일원이었다. 죽음은 삶과 항상 공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도마공동체는 쿰란공동체와 같이 엄격한 규율을 지키면서 집단생활을 했던 그러한 공동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예수의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들의 매우 느슨한 정신적 유대관계 내지는 무형의 조직, 혹은 시나고그(Synagogue, 會堂)와 같은 어떤 커뮤니티 센터를 활용한 연대 같은 것이었을 수도 있다. 이들의 신념은 예수의 말씀의 전파 그 자체에 있었으며, 예수의 말씀을 미끼로 해서 사람을 공동체의 울타리나 규율 속으로 묶어두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들은 조직을 최소화시켰다. 도마기독교에 관해 깊은 연구를 한 패터슨 교수(Stephen J. Patterson)는 이와 같이 단언한다: “특별하게 도마공동체라고 집어 말할 수 있는 조직은 없었다. 그것은 차라리 느슨한 연대를 지닌 방랑자들의 운동이었다(There is no Thomas community per se, but rather a loosely structured movement of wanderers).” (The Gospel of Thomas and Jesus 151).

 

따라서 나는 해석의 발견도 집단적으로 해석하기보다는, 어떤 방식으로 이 메시지를 접하든지 간에, 궁극적으로는 개인의 실존적 각성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살아있는 예수의 말씀은 살아있기에 은밀하고, 은밀하기 때문에 해석되어야 하고, 끊임없이 발견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자기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는 이와 같이 외친다: 이놈들아! 너희들은 너희 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나를 외면하고, 죽은 자만 이야기하는 도다!” (도마복음서 제52. 略號 Th.52).

 

이 살아있는 예수를 만나는 대가(代價)는 무엇이냐? 기록을 읽고 해석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고통스러운 것이다. 기록자 도마는 독자들에게 자기 기록의 해석의 고통에 대한 보상이나 미끼를 던져야 한다. 진리도 알고보면 판촉의 대상이다. 프로모션이 잘돼야 널리 수용되고 오래가는 진리가 되는 것이다. 도마가 판촉의 미끼로 독자에게 던지는 상금은 정말 두둑하다: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많은 주석가들이 제1장에서부터 은밀한 영지와 영생이라는 테마를 끄집어내서 도마복음이 영지주의 문헌임을 입증하려 한다. 그러나 고대사회에 있어서, 인간의 죽음이라는 문제는, 개인주의적 인권의식이 발달한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영생이라는 문제는 부활·재림·최후의 심판이라는 황당한 시간의 사건들과 연계되어 있다. 그리고 요상하게도 과학적 상식이 발달한 사회일수록 이런 말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더욱 신화적 사유에 매달린다. 기독교인들이 영생한다는 것은 살아 영생한다는 것이 아니라물론 물리적 영생을 주장하는 광신 사교집단도 일시적으로 현대사회에 성행하기도 한다, 죽되 죽어서 천당에 가서 부활한 예수나 온전하신 하나님과 재결합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후 천상 재결합사상은 구약에도, 즉 유대교전통에도 명시되어 있지 않은 사상이다. 사후의 미래적 삶과 천국의 결합은 아주 기독론적인 초대 교회사상인데, 미안하게도 도마복음은 이러한 초대교회의 재림사상 이전의 기술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영생의 개념으로는 도저히 접근해서는 안되는 문헌인 것이다. 도마복음의 예수는 이와 같이 말한다: 아버지의 나라는 이 땅 위에 깔려있다. 단지 사람들이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니라(Th.113).

 

인간은 누구든지 물리적으로 죽음을 경험치는 아니한다. 죽는 순간까지 인간은 살아있을 뿐이다. 인간에게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은 인간의 의식 속에서 물리적으로 일어나는 사태는 아닌 것이다. 그것은 순수의식일 뿐이요, 관념일 뿐이다.

 

도마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한다라고만 기술하였다. 맛본다는 인간의 행위는 삶의 행위이며 생명의 감각적 과정이다. 죽은 사람은 맛볼 수가 없다. 살아있는 자만이 맛볼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죽음을 맛보지 아니한다는 것은 죽지 않는다는 황당한 이야기가 아니라, 맛보는 삶의 행위 속에 죽음이라는 메뉴나 광우병 쇠고기 반찬 같은 것이 들어있지 않다는 뜻이다. ‘죽음을 먹으면 인간은 빨리 죽어갈 것이요, ‘생명을 먹으면 인간은 삶의 희열을 느끼게 될 것이다. ‘죽음을 맛보지 아니한다는 것은 죽음이라는 물리적 사태의 부정이 아니라 삶의

환희를 강조하는 상징적 표현인 것이다.

 

이러한 나의 주석은 결코 궤변(詭辯)이 아니다. 내 해석을 궤변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늘날 기독교의 이해가 얼마나 교조화 되어 있고 얼마나 신화화 되어 있으며 얼마나 영생을 실체화 하고 있나 하는 것을 입증할 뿐이다.

 

도마복음서의 기술은 고도의 은밀한 심볼리즘으로 가득차 있다. 그것이 고대인들의 기술이라고 해서 오늘날 우리의 사유에 못미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오늘날 우리들의 유치한 사유를 반증할 뿐이다. 어찌 고대인들이라고 사람이 죽는다는 이 단순한 사실 하나를 몰랐을 것인가?

 

 

 예수가 혼인잔치에서 어머니 마리아의 요청으로 여섯 개의 돌항아리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이적을 행한 곳이 바로 가나(Cana)라는 곳인데, 이 이적설화는 요한복음에만 나온다. 혹자는 그 잔치가 예수 자신의 혼례장면이 변형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보통 이 가나를 나사렛에서 북쪽으로 고개 두 개 넘으면(7km) 있는 카프르 카나(Kafr Kana)로 알고 있지만 초기기독교사가 유세비우스도 가나는 레바논 두로 서남쪽에 있는 카나(Qana)라고 비정하였다. 카나를 가보면 지금도 초대교회 동굴이 남아있고 그 주변으로 13인물을 나타내는 경주 남산 마애불과도 같은 양식의 바위 부조, 그리고 혼인잔치를 상징하는 매우 질박한 조각들이 원시기독교의 리얼한 모습을 전하고 있다.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성화와 비교하면 얼마나 진실된 모습인가, 참으로 그 태고의 순결이 감동의 시선을 끌게 한다. 가운데 큰 부조가 예수상이고 그 주변에 우리의 도마도 있을 것이다. 최근 2006 7월까지만 해도 이스라엘은 이 지역의 헤즈볼라를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집중포격을 하여 1,500명의 무고한 백성을 죽였다. 구약을 숭상하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폭력을 정당화시키는 것이 ‘율법’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쇠고기 파동과 같은 사태에서도 우리는 강대국의 율법적 폭력을 감지할 수 있다. 나는 레바논의 카나에서 지금도 핍박받고 있는 예수의 십자가 보혈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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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성서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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