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폭력을 거부하는 데서 가장 근본적인 행동인 병역의 양심적 거부도 그들에게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제국주의에 종속된’ 국군이긴 해도 그 ‘국군’에서 복무하는 것을 ‘우리’ 대가족의 남성 어른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로 인식하는 듯했다. 물론 국가와 군대를 ‘우리’의 기구로 인정한 이상, 그들이 1960년대의 구미 운동권이 목표로 한 폭력의 전면적인 거부와 근절을 생각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한 문맥에서, 그들이 내무반에서 벌어지는 폭력 전통을 획기적으로 근절하지 못한 것이 과연 놀라운 일일까? (물론, 그들 중 개인적으로 삼갈 수 있을 때까지 폭력적 행위를 삼간 예외적인 인물도 있었다.) 한마디로, 1960년대에 서구와 미국의 무정부주의자들이 갈망하던 ‘모든 국가와 제도로부터의 인간성 해방’과 달리, 그들은 근본적으로 ‘남’(제국주의, 세계 자본주의)으로부터 ‘우리’(국가)의 주체성을 회복하고 해방하려 한 ‘재야형 애국자’였다. -21쪽
그들의 아름다운 반란이 결국 중도에 그치고 만 것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부르주아 사회’를 그토록 예리하게 꿰뚫어보던 그들이 그 사회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보수적인 교수들까지 ‘교수님’으로서 깍듯이 대접해 주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집단주의적ㆍ기회주의적 ‘인연’의 논리, 가족주의적인 ‘웃어른의 숭배’가 반란의 열성을 깎은 듯해서 못내 안타까웠다. 왜 하필이면 그들 중 상당수가 ‘민중을 기만하는 기관’이라고 비판하던 보수신문이나 ‘민중을 탄압하는 기관’이라고 비판하던 국정원 같은 조직에 입사해야만 하는가? ‘국가와 민중에 봉사’해야 한다는 ‘대가족’ 논리가 결국 제도와 타협하는 것까지도 정당화한 것이 아닌가 싶다. -22쪽
경희대 학생들이 돈벌이와 취업 준비로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는 것을 지켜보고 나서야, 나는 생계나 미래에 대한 별다른 걱정 없이 한시와, 유교와 불교의 경전을 탐구하며 지낼 수 있었던 소련 시절 말기의 나날들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알 수 있었다. 천민자본주의가 학생의 학습동기를 박탈하는 것 말고도 군에서의 구타와 비인간적인 환경 때문에 학습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 일부 남학생의 문제, 강의를 대부분 담당하는 ‘상아탑의 노예’ 시간 강사들의 고달픈 생활까지 떠올리면, 아직 개발독재의 舊殼을 벗지 못한 후진 자본주의 사회와 진정한 의미의 교육은 공존이 불가능한 천적이라는 평소의 신념이 거듭 확인하지 않을 수 없다. 신자유주의적 시장의 마수에 목이 졸린 채 은연 중에 군대의 상사와 동일시하던 ‘교수님’ 앞에서 벌벌 떠는 학생이 자유로운 진리 탐구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25쪽
예부터 지적되어 왔지만,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극우와 극좌의 집단의식 저변에는 흡사한 점이 많이 깔려 있다. 집단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생명과 행복 쯤은 희생되어도 좋다는 야만적인 집단주의, 남성적인 폭력으로 집단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저질스러운 폭력 숭배, 인간의 존엄성을 위시한 보편적인 인권들을 비웃고 부정하는 현대적 보편주의와 관대성의 부재, 무엇보다 가시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특유의 집단 광기는 바로 극좌와 극우의 공통점이다. -51쪽
친구에 대해
물론 상부상조의 관계는 옛 ‘교유’ 개념의 유기적 요소이기도 했으리라. 그러나 본인에게 일단 현실적인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이는 ‘하얀 얼굴’이면 인격이나 성격, 도덕성 등을 불문하고 무조건 친구가 되자는 것을 선조들이 보셨다면 좀 경솔한 행동으로 보지 않았을까? 친구에게서 영적인 동질성과 도덕적인 지도를 요구하던 사회적 풍토가 ‘네가 나를 밀어주면 나도 보답하겠다’는 식의 새로운 ‘친구’ 관계로 전락하는 것을 ‘문화의 진보’로 볼 수 있겠는가? 조선 말기의 선비들이 소인과 군자를 절대적으로 구분하여 교조주의와 당파싸움을 불러일으켰다는 비판도 있지만, 이러한 이분법적 세계관이 도움을 줄 만한 사람이면 모두 다 친구라는 요즘의 보편적인 분위기에 비해서는 오히려 나은 면도 있지 않겠는가 싶기도 하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던 시대가 끝나고 친구도 아닌 ‘친구’와 함께 명동이나 압구정동에 가서 옛날 아이들이 박물관을 구경하던 그 심정으로 최신 서양 유행품을 동경 어린 눈빛으로 구경하면서 즐겁게 피자와 미국 영화에 대한 잡담을 나누는 ‘편한’ 시대가 왔다. 옛날의 풍류의 맛을 즐기면서 친구의 한 마디 말에 깨달음도 얻고 인생에 중요한 가르침도 얻었다는 것을 이 사람들은 상상도 하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남에게 정신적인 가르침을 줄 수 있으려면 그 남과 일단 생각의 범위가 달라야 하고, 자신만의 독보적인 정신생활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개성’과 ‘개인주의’를 표어로 내세우는 그들의 생각은 사실 놀랍게도 천편일률적이다.
새롭고 멋지고 편한 것은 추구하고, 오래되고 못 생기고 어려운 것은 피해야 한다는 본능적인 안락주의가 이념 없는 사회의 새로운 이념으로 등장한 지 오래다. 유배의 고통을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중화시킨 다산 선생과 그의 진정한 친구인 혜장 연파스님이 밤을 새기며 「주역」이 설파한 우주의 원리를 토론하였다는 이야기를 요즘 신세대에게 해준다 해도, 그들은 ‘고생을 일부러 골라서 하는 약지 못한’ 옛날 사람을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가 일제시대에 일제와 타협해 가면서 산 유산층을 비판하는 것처럼, 어쩌면 물질적인 안락함과 잘 사는 데만 매달려 살아가는 우리 역시 정직한 후손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60쪽
英語共用化에 대해
북한 주민과 빈민을 소외시키고, 모국과 해외동포 사이를 멀어지게 하는 이 ‘영어공용화’는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한국 사회를 주름잡고 있는 영어권 유학파가 이러한 방법으로 자신의 특권적 지위를 영구화하려는 것인가? 단기적인 이득에 눈이 먼 재벌들이 중세적인 사고 방식을 버리지 못하여 사원의 영어교육에 국가권력까지 동원하려는 것인가? 어쨌든 이 ‘영어공용화’ 논쟁은 한국 지배층의 의식상태를 매우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65쪽
정치인에 대해 샅샅이 공과를 논하길
2년 전에 시민단체들이 마침내 낙천ㆍ낙선 운동으로 노골적인 강도, 도둑들을 일단 먼저 걸러내 퇴출하려 한 움직임은 대단히 고무적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가지 더 바란다면, 문제 정치인 등 이른바 ‘사회 지도자’들을 검증할 때 병역 비리와 같은 국내에서의 부정행위에 국한하지 말고 문제 인물의 대외활동도 아울러 샅샅이 뒤졌으면 좋겠다. 만약 문제의 ‘선량’이 외국 대학의 ‘명예박사’를 자랑한 적이 있다면, 그 사람이 명예 학위를 받을 만한 학술적 공로나 외국 정부와 대학이 정치적인 결정을 했을 만한 높은 인지도라도 지니고 있었는지, 없었으면 학위 수여 경려가 무엇이었는지, 학위 수여 과정에서 자금이 수수되었다면 그 자금을 어떻게 조성했는지 따위를 잘 추적해야 한다. 한 번이라도 한국 민중이 벌어들인 돈과 외국의 ‘명예’를 맞바꾸는 지도층의 망국적인 행각을 제대로 밝혀내지 못한다면, 앞으로 백성이 고통스럽게 벌어들인 돈이 계속 외국 탐관오리들의 손으로 들어갈 것이고, 세계 대학 곳곳에서 ‘코리아 갤러리(돈 받고 학위를 파는 외국 대학)’들이 현지인의 냉소를 살 것이다. -69쪽
한국에서 구타가 없어지지 않는 이유는?
구타가 완전히 없어질 수 없는 이유는 군대에 대한 지배층의 실제적 요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지금도 나라의 운명을 실질적으로 좌우하는 한국의 보수정객과 재벌이 요구하는 인간상은 평상시에는 ‘상전’을 위해서라면 비자금 조성이든 세금 탈루든 필요없는 자동차 공장 계획 추진이든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충복’이고, 유사시에는 아무런 생각도, 양심의 가책도 없이 동족을 쏘아 죽일 수 있는 ‘강인한 애국자’다. 출세를 위한 맹종을 유일한 신념으로 삼는 ‘인간 로봇’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 군대에 대한 권위주의적 사회의 ‘주문’인 셈이다. 그리하여 인간 존엄성의 개념과 생명에 대한 경외심, 외부로부터의 압박에 대한 무의식적이고 본능적인 반발심 등 ‘불필요한 심적 현상’을 졸병의 마음에서 깨끗이 일소해 버리는 것이 군대의 주요 의무가 되는데, 이러한 ‘교육적 과제’를 물리적인 폭력 없이 성공적으로 수행하기는 힘들다. -109쪽
살인에 대한 통찰
누군가 나에게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전쟁은 원래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적군을 살상하는 것이고, 아군이 북측을 억제할 능력을 보이지 않으면 그들이 ‘천백 배’의 손실을 남한에 입히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내 말의 뜻은, 무장을 해체하라는 것이 아니고 노자의 말씀대로 전쟁을 하더라도 이를 마음으로 슬퍼할 줄 알아야 하며, 그것이 필요악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며, ‘적군’이 되어버린 종족에 대해서 자비의 마음을 버리지 말라는 것이다. -139쪽
소비 심리 사회
최근 한국을 실제로 소유하고 있는 대재벌들은 갖은 방법으로 젊은층의 소비심리를 자극하여 온 나라가 소비주의라는 고질병으로 멍들게 만들었다. 단순히 ‘과소비’가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어떤 방법으로든 돈을 많이 벌고 쓰는 것이 유일한 인생의 이상이 되고 만 것이 문제다. 신앙도, 문화도, 사랑도 이 ‘벌이와 씀씀이’라는 단순한 등식 앞에서 무력하게 부서지고 있고, 결과적으로 인간이란 ‘벌고 쓰는’ 기계적 존재로 취급받게 된다. ‘못 벌고 못 쓰는’ 사람이면 ‘고장난 기계’ 취급을 받고 사회에서 ‘폐기’ 당하는 것은 물론이다. -143쪽
‘투사’에서 ‘忠僕’으로
그렇다면 보수적인 위계질서 위주의 한국 사회에서 그 질서와 규율을 실제로 가르치는 대학이 그만큼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우대’를 받는 것이 과연 이상한 일인가? 엊그제 ‘혁명적인’ 선배를 받들고 믿고 따르던 ‘투사’들이 졸업 이후에 생계문제에 부딪히자 재벌 등 족벌체제의 ‘장’들을 받들고 따르게 되는 것이 과연 그토록 놀라운가? 대상은 다르지만, 추종행위의 내용은 같다. 그리고 명문대학의 엊그제 ‘투사’들을 기용하는 한국 사회의 ‘오너’들이 국내 대학을 나온 젊은이들의 이념적 ‘껍질’이 어떻든 간에 행동양식에서 규율과 맹종에 잘 길들어 있다는 것을 모르고서 과연 그렇게 했을까? ‘오너’들에게는 이념서적 한 권을 간추려 쓴 대자보가 ‘아기 장난’으로 보이고, 교수님과 선배님들에게 무조건 절하며 인사하는 습관이 제대로 되어 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153쪽
대인관계, 행동양식까지 진보화ㆍ현대화하지 않고서는 ‘진보적인’ 이념은 추상적인 공론으로 남을 것이다. 교수들과 선배들에게 이론적인 반박과 행동적인 불복종을 할 줄 알고, 자기 존엄성과 남의 인권을 우선시하는 학생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 사회를 손아귀에 쥔 ‘오너’들이 여전히 대학을 충견의 ‘훈련장’으로 생각할 것이다. 선배가 시킨 대로 ‘미국 침략사’를 달달 외우는 것보다는 그 선배의 술 강권을 한번이라도 뿌리치는 것이 훨씬 더 진보적인 행동이다. -154쪽
위로부터 강요된 민족주의
‘민족주의’라는 것은 ‘원래부터 있어온’ 것도 아니고, ‘밑에서부터 우러나온’ 것도 아니다. ‘위에서부터’(식민지 시대의 민족주의 지식인 그룹이나 분단 정원 성립 이후의 남ㆍ북한 정권) 교육 제도와 매체를 통해서 주입ㆍ강요해 온 것이다. 그리고 민족주의에서 파생한 극우반공 이데올로기가 현대적 극우와 무관한 김유신이나 이순신을 제멋대로 ‘모범적인 인물’로 선정하듯이, 더 넓은 민족주의적 담론은 ‘민족’이나 ‘민족주의’라는 개념조차 없던ㅡ그리고 이 서구적인 개념 없이도 도덕적인 문화를 창조한 조선의 과거를 ‘민족ㆍ민족주의’ 일색으로 페인튼 칠한다.
아니, 하늘의 도리와 인륜을 위해서 서양ㆍ일본 오랑캐를 내쫓아야 한다고 굳게 믿으신 유인석 선생과 같은 의병장들이 무슨 죄가 있기에 사후에 그 저주스러운 서양ㆍ일본 오랑캐와 같은 ‘민족주의자’로 탈바꿈되어야 하는가? 민족주의 주입을 주 업무로 삼는 교육제도로, 민족주의를 이용해 여론을 주도하는 보수언론도, 넓은 의미에서 조상의 문화에 대한 ‘배신’ 내지 ‘도용’을 감행하는 것이다. -201쪽
‘민족정신’과 ‘국가의 위신’을 찾아내려는(사실 조작하려는) 조갑제의 무리 앞에 역사는 너무 너무 무력하다. 그칠 줄 모르는 눈물과 피의 흐름, ‘위’의 착취와 ‘밑’의 저주, 서로 겹치고 엇갈리고 헷갈리는 이해관계, 부처의 힘과 하늘의 도리와 삼강오륜과 무당의 신탁을 믿는, 이중삼중으로 겹치는 융합 종교…… 현대적인 말로는 표현도 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그 과거의 세상을, 어용 민족주의자의 무리는 우리와 그들의 싸움, 우리 국가와 민족의 성장이라는 일원적이며 단세포적인 잣대를 들이대며 ‘민족의 역사’로 만드는 것이다. 그 원한의 소리, 탄식과 후회의 소리를 우리 아이들이 듣지 않고 ‘건전하게’ 자라게 하기 위해서 ……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 먼저 해명해야 할 것이 있다. 한국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비판이라기보다는 우월심에 가득 찬 조소)은 외국 학계, 특히 우파적 색체의 미국 학자에게는 매우 흔한 일이다. 그들의 판단은 간단하고 단순하다. 그들의 목적(북한을 국제적 ‘왕따’로 만들어 질식사시키고, 북한의 노동력과 시장을 무제한적으로 이용하고, 불평등한 한미관계를 영구화하는 것)을 달성하는 데 거의 유일하다 싶은 걸림돌은 한국인들의 강한 민족의식이다. 그 의식을 깨뜨리고 마비시켜야 미제 자동차 판매도 촉진되고, 고급인력의 미국 이민도 확대되고, 매향리 문제도 거론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그러나 그들이 한국적 민족주의를 비웃고 일소에 부치는 것은 민족주의 원칙 자체를 부정해서가 아니고, 한국 민족주의보다 훨씬 절대주의적인 민족주의적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의 오만한 민족주의보다 한국의 방어적인 민족주의를 훨씬 가깝게 생각한다. 따라서 그들과 같은 입장에서 이 문제에 접근하려는 마음이 추호도 없다. 다만, 한국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인도 계통의 한 중국학자의 표현대로 “민족 담론으로부터 역사를 구제해 주고” 싶을 뿐이다. -203쪽
완전히 다른 또 하나의 한국
한국과 같이 절대적인 소비 중심의 사회에서는 집단의 ‘유행’에 의한 소비와 이를 가능케 하는 경제적 능력을 개인의 지적 관심보다 훨씬 중시한다는 사실은 낭만과 행복의 고려대 시절 최초의 ‘불쾌한 발견’이었다. ‘친구들’이라는 집단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서 과시성이 강한 소비가 개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한국적인 ‘소비주의적 집단주의’ 패러다임은 바트자갈이 갈구한 개인 중심의 ‘진지한 근대’보다 오히려 그가 탈피하려고 한 소련의 사이비 ‘집단주의적 근대’에 더 가까웠다. -251쪽
원수를 사랑한 사람
내가 그 때 몽골인들에 대해서 존경심을 느낀 또 하나의 이유는 극단적인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도 무분별한 반한감정을 전혀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을 속이고 학대한 기업인들을 싫어했지만, 그것은 ‘한국인’으로서 싫어했다기보다는 ‘불량 자본가’로서 혐오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외국인 노동자의 상황을 제대로 전해주지 않는 주류 언론을 ‘직업적인 거짓말쟁이’로 멸시하고 불신했지만, 그것도 ‘민족적인 혐오’라기보다는 ‘도덕적인 혐오’했다. 이와 같은 종류의 ‘도덕적인 혐오’를 가장 강하게 받은 곳은 출입국 관리사무소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한국 언론의 ‘상습적인 거짓말’과 출입국 관리사무소의 상습적인 뇌물 갈취 등을 이야기할 때, 그들은 보통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를 꼭 붙였다. 그들에게는 사회 상층부의 도덕적인 추락과 비행은 ‘민족 대 민족’ 차원의 문제라기보다는 하나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261쪽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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