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이 지닌 온갖 결함에 의존해서야 비로소 나의 옳음이 입증된다면, 그 때 증명되는 건 정당성이 아니라 나의 초라함과 비겁함일 뿐이다. (돈의 속물성을 비판하되, 대안적인 소비생활을 고민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15쪽
생로병사의 번뇌에서 자유로워지는 게 행복의 기초라면 보험상품은 정확하게 반대방향으로 취하고 있는 셈이다. 생로병사의 전 과정을 불안과 공포의 원천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상품의 유형과 숫자가 정신없이 늘어만 간다. 태아보험에 어린이 보험, 급기야 사후보험까지 출현했다. -44쪽
더 큰 문제는 질병과 노후를 자신의 문제로 생각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 실제로 그런 식으로 말하는 광고가 있다. “내 몸 내가 지켜야지”하면서 운동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불쑥 나타나선 정말 좋은 보험이 있다고 소개하는. 마치 운동을 하는 것보다 좋은 보험 하나 제대로 들어 놓는 게 장땡이라는 식이다. 병이란 내 몸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런데 왜 스스로 자신을 치유할 생각은 않고, 일단 병에 걸린 다음 혜택을 받을 생각부터 하는가. 보험료에 쏟는 노력의 반만 들여도 자신의 몸은 자신이 지킬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노후와 죽음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한 번 뿐인 인생인데 그걸 어찌 보험제도에 맡길 것인가. ‘현재는 선물이다’는 말이 있다. 영어로는 현재present와 선물present이 같은 단어인 데서 유래한 것이다. 보험에 길들여지면 무엇보다 현재가 선물임을 잊어버리게 된다. 각종 보험상품에 노출되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기는커녕 현재까지도 만성적인 불안상태에 돌입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의 말마따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46쪽
20세기와 더불어, 우정과 의리, 충, 열 등 중세를 지배한 고매한 가치들이 몽땅 실종되어 버리자 일상의 공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헛헛해졌다. 게다가 대가족의 연계마저 사라지자 현대인들은 당최 마음을 둘 데가 없다. 그러니 남는 건 나의 유일한 분신, 곧 자식이 인생의 전부라는 신념(!)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좀 세련되게 생명과학의 논리를 빌려 말하자면, 나와 동일한 유전자를 영속적으로 복제하고픈 ‘이기적 유전자’주의만 남게 된 셈이라고나 할까. 일단 여기까지가 통상적인 이해방식이다. -48쪽
일촌에 대한 집착은 결국 돈이 흐르는 루트와 일치한다. 요즘 부모들이 악착같이 돈을 모으는 명분 가운데 하나가 자식에게 물려주기 위해서다. 경쟁이 치열한 시대에 자식들이 기죽지 않고 살려면 재산이 있어야 한다는 명목 하에서. 아니, 그 이전에 중산층한테 가장 중요한 비용은 사교육비다. 자식이 성공할 수만 있다면 각종 사교육비는 물론이려니와 외국유학을 보내는 모험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 모든 게 다 돈덩어리다. 웬만한 경제력으론 감히 엄두조차 낼 수 없다. 아이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참으로 부담스럽다. 어떻게 하면 그 지독한 헌신과 기대에 보답할 수 있을까? 그들에겐 이게 최고의 관건이다. 이렇게 말하면 무척 아름다운 효심으로 느껴지지만 그게 또, 그렇지가 않다. 여기서 ‘효’란 어디까지나 경제적 보답을 의미한다. 효도를 하기 위해선 그에 걸맞은 연봉을 확보해야 한다. 근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러니 시간이 지날수록 부담 만땅이다. 부모는 부모대로 뒷바라지에 지쳐 버리고, 자식은 자식대로 참을 수 없이 무거워지고, 결국 이 과정 속에서 가족 자체가 위태로워진다. -49쪽
아버지, 엄마, 그리고 자식, 이 셋을 하나로 엮어 주는 건 화폐다. 아버지의 책임감, 엄마의 헌신, 자식의 효심 그 모든 것은 다 화폐로 환산된다. 그리고 화폐는 모든 공동체를 해체한다. 왜? 화폐는 본디 자기의 증식 외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오늘날의 가족은 혈연공동체라기보다 차라리 화폐공동체에 더 가깝다. 요컨대, 서로는 서로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쳤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론 재산(아파트와 자가용, 기타 부동산과 주식 등등)을 일구기 위해 각개분투를 한 셈이다. 자신의 청춘과 일생을 다 바쳐 모은 재산이 다시 나의 분신인 일촌에게 전달되고, 그 일촌은 다시 또 불리고 불려서 그 다음 세대로 ……. 그러니 최대한 일촌의 범위 안에 머무르는 것이 안전하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자식을 위해 재산을 물려준다기보다 재산을 잘 관리하려면 자식한테 쏟아붓는 것 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는 셈이다.
하여, 이제 완벽한 전도가 이루어진다. 가족과 혈연이 가장 소중한 가치고, 그래서 그걸 잘 지키기 위해 재산이 필요한 게 아니라, 재산을 잘 관리하기 위해서 결혼을 하고, 또 ‘가족애’가 필요한 것이다. -51쪽
우리 시대에 사회적 관계는 쇼핑과 회식을 통해서만 구성된다. 뭔가 관계를 맺으려면 이 회로를 따라 움직여야만 하는 것이다. 해완이 말(이 시대에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소비하는 수밖에 없다는 말을 눈앞에서 확인한 순간이었다)처럼 우리 시대에 친구란 “함께 소비할 수 있는 사람”으로 정의된다. 연애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연애야말로 화폐권력의 주요타깃이니까. 각종 ‘데이’(Day)며 이벤트에서 일상적 데이트에 이르기까지, 연애의 기승전결을 주재하는 건 어디까지나 화폐다. 그러니 늘 “나, 돈 없어!” “돈이 필요해!”를 연발하고, 그러다 보면 어느덧 돈이 인생의 꿈이 되어 버린다. 꿈? 이 낱말은 부적절하다. 꿈이라면 그건 한바탕 악몽에 가깝다. 삶을 소외시키고 욕망을 소거해 버리는 끔찍한 악몽. -59쪽
자본주의는 사적 소유에 기초하고 있다. 즉, 신분적 차별이 사라진 대신, 소유가 곧 인격이자 정체성이 되어 버린 시대다.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란 ‘사적 소유와 자아’가 그대로 ‘혼연일체’를 이루는 체제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소유의 핵심이 바로 돈, 아니 화폐다. 돈과 화폐, 자본. 이 셋은 교환의 매개라는 면에선 동일하지만, 주체와 맺는 관계의 측면에선 그 속성이 조금씩 다르다. 돈이 좀 더 포괄적(약간 촌스러운) 명칭이라면 화폐나 자본은 특정한 교환관계를 표현하는 명칭에 해당한다. ‘교환’하면 곧바로 화폐를 떠올릴 테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교환의 원조는 어디까지나 물물교환이다. 물건과 물건이 교환될 때는 주체와 대상 사이에 긴밀한 상호작용이 가능하다. 이른바 증여로서의 속성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증여란 “경제적으로 유용한 것만이 아니라 예의, 향연, 의식, 군사적, 서비스, 여자, 어린이, 춤, 축제 등”을 함께 주고받는 것이다. 이를테면, “원시 부족들 사이의 증여와 답례 형식을 취하는 교환은 경제적인 것을 넘어 사회총체적인 것이다. 즉 그들은 경제적 필요 때문이 아니라 공동체 사이의 유대 강화, 공동체적 질서 유지를 위해 교환한다는 것이다.”(『화폐, 마법의 사중주』, 174쪽) 말하자면, 교환보다는 증여가 더 주도적인 배치인 것.
하지만 이 배치가 전도되기 시작하면, 다시 말해 교환이 증여를 압도하게 되면, 인간과 물건 사이엔 치명적인 거리가 생겨난다. ‘증여는 연결하고, 교환은 분리한다’는 보편적 원리가 작동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화폐가 탄생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고대 그리스의 현명한 왕 미다스는 화폐가 발명된 것을 알고 화폐를 손에 들고 들여다봤는데, 그 순간 끔찍한 예감에 휩싸여 들고 있던 화폐를 엉겁결에 떨어뜨리며 이렇게 외쳤다.”―“이 화폐라는 것은 대지를 죽일 것이다!” 미다스 왕은 화폐 그 자체가 대지에 대한 저주라는 것을 직감했던 것.(나카자와 신이치,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 김옥희 옮김, 동아시아, 2004, 116쪽) 과연 그의 예언은 적중하였다. 화폐는 탄생하자마자 마주치는 모든 것들―유형적이든 무형적이든, 삶이든 가치든―의 고유성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일반화된 교환은 동일화 논리이다. 원시 사회가 무엇보다 거부하는 것이 바로 이 동일화 논리이다. 타자와 동일시되는 것에 대한 거부, 자신을 자신으로 구성해 주는 것, 자신의 존재 자체, 자신의 고유성, 스스로를 자율적 ‘우리’로 생각하는 능력 등을 상실하는 것에 대한 거부가 그것이다.…… 만인 사이의 교환은 원시 사회의 붕괴를 가져온다. 동일화는 죽음을 향한 운동인 반면, 원시 사회의 존재는 삶의 긍정이다.
-피에르 클라스트르,『폭력의 고고학』,변지현 외 옮김, 울력, 2002, 279~280쪽)
그리하여 인류사에는 기본적으로 두 개의 공동체가 존재해 왔다. “화폐를 거부하는 공동체와 화폐로 조직된 공동체. 화폐를 두려워하는 공동체와 화폐를 욕망하는 공동체.” 흔히 생각하기론 전자에서 후자로 나아갔으리라 간주하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 둘 사이엔 진화나 발전이 아니라 단절이 있을 뿐이다. 그만큼 서로 다른 힘이자, 다른 운동인 까닭이다.
자본은 화폐의 그와 같은 속성을 극단화한다. 돈이 돈을 낳는 것, 생식하는 화폐, 그것이 곧 자본이다. 자본은 자기 가치를 증식하는 것 외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 특히 금융자본은 이런 화폐의 ‘속성’을 최고의 형태로 표현했을 뿐 아니라, 미다스 왕의 오래전 예언까지 실현하고야 말았다. 금융자본은 한마디로 버블경제다. 버블이란 거품이요 신기루다. 다시 말해, 산업자본이 가지고 있었던 돈과 인간, 돈과 살림 사이의 최소한의 연관관계도 해체해 버렸다. 마침내 대지가 사라진 것이다! 어떤 목적도, 방향도 없는, 그리고 휴식조차 없이 무한을 향해 달려가는 화폐, 금융자본!하여, 이 자본은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순환계를 파괴하고 잠식해 버린다. 정신분석에서 죽음본능이 하는 역할, 병리학에서 암세포가 하는 역할을 삶 전체, 세계 곳곳에서 수행한다. 요컨대, 자본과 생명은 본래적으로 정반대의 벡터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자본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면 필시 존재 자체가 위태롭게 된다. -65~68쪽
돈은 쓰기 위해 버는 것이다!ㅡ‘쓴다’고 하면 곧바로 방탕 아니면 투자를 떠올릴 것이다. ‘방탕’은 쓰는 것이 아니라, 돈으로 쾌락을 교환하는 것이니 명품을 사재기하는 거랑 별반 다를 게 없다. 투자 역시 쓰는 게 아니다. 벌기 위해 쓰는 것이니 결국은 버는! 것이다. 말이 투자지 사실은 투기요 도박에 불과하다. -71쪽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유산은 절대로 물려주어서도, 물려받아서도 안 된다. 먼저, 자식한테 유산을 물려준다는 건 실로 위험천만한 일이다. 일종의 불로소득을 넘겨주는 꼴인데, 그럴 경우 반드시 환기해야 할 사항이 있다. 그 재물을 누리는 대신 다른 형태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것. 돈은 無性의 물건이 아니다. 거기에는 수많은 인과들이 들러붙어 있다. 그것들은 어떤 형식으로든 따라다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재산을 물려준다는 건 인과들을 함께 넘겨주는 격이다. 그 인과에 자신에 있다면, 즉 이 돈에 붙어 있는 인연들이 자식에게 진정한 행복을 줄 거라는 확신이 있으면 그땐 물려줘도 좋다. 헌데, 우리 시대에 과연 그런 재산이 가능한가? 만약 자식이 성장할 때까지 온갖 뒷바라지를 해주고도 또 물려줄 게 있다면 그건 틀림없이 버블경제의 혜택이다. 버블은 경로가 어찌됐건 좌우지간 버블에 불과하다. 언제 흩어질지 모를 거품을 움켜쥐고 있는 꼴인데, 그것을 자식한테 물려주어서야 되겠는가. 만약 자식이 그걸 덥석 움켜쥔다면, 그 순간, 그에 비례하여 그의 인생마저 버블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할 일이다. -76~77쪽
일찍이 일본 근대문학의 아버지 나쓰메 소세키가 언명한 대로 현대인은 ‘자의식의 화신’이다. 자의식이란 일종의 ‘의식의 비만’에 해당한다. 육체적 비만도 문제지만, 이 정신의 비만도 존재를 한없이 탁하게 무겁게 만든다. 그런데 몸을 많이 쓰게 되면 이 ‘이중고’에서 벗어날 수 있다. 체력단련과 정신의 평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 되면 각종 신경성 질병에서 벗어날뿐더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배짱’이 늘게 된다. 한의학적으로 배짱은 하체에서 생긴다. 간과 신장의 기운이 충만해야 가능하다. 헌데, 다들 느끼다시피 요즘 청년들은 하체가 아주 빈약하다. …… 그래서 열이 위로 ‘뜨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을 일러 전문용어로 ‘虛火妄動’이라고 한다. 허화가 망동하면 번뇌망상이 많아지면서 극도로 소심해진다. 소심하다는 건 타자를 받아들일 능력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타자와 소통하는 능력, 그것이 곧 배짱이다. 따라서 배짱을 키우려면 하체를 최대한 움직여야 한다. 그러니 ‘몸고생’이야말로 여러모로 행운인 셈이다. -83~84쪽
돈은 사람을 오만하게 만듭니다. 하루에 30킬로미터를 걷고 나면 분명 지치고 피곤하고 배가 고플 겁니다. 그러면 당신은 끼니를 해결할 식당과 하룻밤 묵을 숙소를 찾을 테고, 다음 날 다시 일어나 두 발로 걷기 시작할 테죠. 그렇게 하는 데 다른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을 겁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돈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당신은 끼니와 잠자리를 제공해 줄 누군가를 간절히 찾을 수밖에 없겠지요. 당신은 겸손해지는 법, 그리고 누구도 선택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차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울 수밖에 없을 겁니다.
-비노바 바베, 『버리고, 행복하라』, 김문호 옮김, 산해, 2003, 13쪽
빚지고 살지 말거라
돈은 늘 생각보다 늦게 들어오고
돈은 늘 생각보다 많이 들어가니
빚내서 일 벌리지 말거라
신용을 잃으면 사람도 잃고 뜻도 잃는단다
빚은 빚을 부르고 불운만 골라서 잡게 하니
어떤 경우에도 빚지고 살지 말거라
어른들 말씀이 귓가에 들리는데
할부카드 할부이자 할부구매 때문에
빚지고 살기 싫어하던 우리 오랜 정신은 망가지고
가정도 회사도 나라도 세계도 빚더미에 올라
사람도 베리고 뜻도 버리겠네
-박노해, 「빚지고 살지 말거라」
보통 증여라고 했을 때 떠올리는 건 연말 불우이웃돕기, 월급에서 자동으로 이체되는 후원금, 또 기업들의 의례적인 기부행사 등이 고작일 것이다. 하지만, 이건 증여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다. 증여가 되려면 교환의 법칙에서 벗어나는 유동성을 가져야 한다. 재벌들의 세금면제를 위한 기부, 그건 전형적인 교환법칙 아닌가. 또 부동산 투기를 해서 거액을 챙긴 다음, 기부를 한다? 이건 뭐 도둑질해서 푼돈 나눠 주는 격이고, 그레이버한테 들은 유머 한마디. ㅡ 산타클로스와 강도의 동선은 동일하다. 산타클로스가 나눠 주는 그 많은 선물은 대체 어디서 났을까? 훔친 것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실제로 북구에선 크리스마스 시즌에 강도들이 산타클로스 복장을 한 채 도둑질을 하다가 경찰들한테 걸려서 마구 두들겨 맞는 장면이 TV에 종종 나온다고 한다. 말하자면, 교환의 세계에선 기부자와 도둑이 한끝 차이인 것이다. 이런 세계에선 아무리 많은 돈을 기부한다 해도 증여라 하기 어렵다. 그럼 어떻게 쓰는 것이 증여인가? 앞에도 나오지만, 인간 혹은 삶을 창조하는 데 써야 한다. -150쪽
양자론에서 물질의 운동은 중심적 주위에 부옇게 ‘구름처럼’ 퍼져 있는 것의 움직임으로 묘사됩니다.
이런 식의 비유를 사용하면, 증여는 경제와 유통에 있어서 ‘양자론’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선물이라는 불리는 ‘물’은 물질로서의 윤곽과 크기와 양을 가지고 있게 마련인데, 증여는 그런 ‘물’=선물 주위에 부옇게 ‘구름처럼’ 퍼져 있는 다양한 형태의 생명을 가진 힘을 끌고 다니며, 사람과 사람, 집단과 집단 사이를 옮겨 다니는 생명을 가진 힘의 전체운동으로 묘사할 수가 있습니다. 그에 비해서 교환은 여전히 고전적인 역학의 세계상에 의거해서 이루어집니다. 교환되는 상품의 가치의 ‘형태’는 계산 및 계량이 가능할 듯한 명확한 윤곽을 갖게 되어, 그것의 이동에 의해 사람과 사람, 집단과 집단 사이를 화폐가치로 환산가능한 양이 움직여 가는 겁니다.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 49쪽
오호라, 그러니까 ‘선물의 경제’는 생명의 물리적 운동과 연동되어 있다는 말씀! 교환이 뉴턴 역학의 세계에 속한다면 선물은 양자론적 원리에 근거하고 있다. 그래서 양자의 운동이 그러하듯, 선물은 주위에 측정불가능한 힘과 운동성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증여는 경제학의 범주를 훌쩍 넘어 생명과 우주의 영역으로 진입한다. 이쯤 되면 “왜 증여를 해야 하는가?”, “증여란 무엇인가?” 등의 질문은 무의미하다. 양자론적으로 보면 증여는 생명의 원리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증여의 사이클에 참여해야 한다. 그래서 인디언들은 “선물에 대해 답례를 하지 않으면 영력의 유동이 정지해 버리게 될 것을 두려워해서, 자신도 배포 큰 선물을 해야만 한다는 식으로, 마치 답례를 의무처럼 여겼다”. 증여의 사이클이 깨지면 “전 부족 아니 전 우주의 건강한 운행을 저해한다는 식의 일종의 우주적인 책임감”(『사랑과 경제의 로고스』, 64쪽)이 충만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문명인은 한마디로 ‘우주적 미아’다. 오로지 착취와 스톡(Stock)으로만 일관해 왔기 때문이다. 우주의 영적 유동성은? 관심 밖이다. 아니, 그것이 경제와 어떤 연관이 있으리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경제 따로, 존재 따로, 마음 따로! 화폐와 우주, 증여와 양자론이 만날 수 있는 길은 애시당초 봉쇄되어 버렸다. 그 결과, 경제는 무한증식을 향해 달려가지만, 존재는 붕괴 직전이다. 우주의 건강한 운행을 저해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셈이다. -160~161쪽
추장이 증여의 달인이라면 그는 받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는 존재라는 뜻인데, 이 사이의 간극과 잉여는 어디서 오는가? 그만큼이 능력이자 카리스마다. 그렇다면, 분명 조금 주고 많이 받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럼 그 사람이 가장 많이 소유하는 자가 되는가? 그렇지 않다. 아마 가장 무능하거나 가장 약한 존재일 것이다. 증여의 매트릭스에선 이렇게 유형과 무형의 가치들이 서로 뒤섞인다. 카리스마와 권위를 누리려면 소유로부터 벗어나야 하고, 소유에 의존하게 되면 무능력하다는 자책이나 타인으로부터의 불신을 받아야 하고. 이런 세계에선 화폐가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가 없다. -163쪽
금강경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갠지스강의 모래알만큼 많은 공덕을 쌓았다 해도 금강경 ‘사구게’ 하나를 터득하는 것만 못하다고. 처음 이 구절을 읽었을 땐 절망했다. ㅡ 아, 공덕을 아무리 쌓아 봤자 말짱 헛거로구나! 물론 그런 식의 절망과 탄식은 전적으로 무식의 소치였다. 이 구절의 핵심은 유형의 세계와 무형의 세계는 서로 견줄 수 없다는 데 있다. 재물이나 돈은 유형의 세계다. 유형의 세계는 수치와 양이 지배한다. 그래서 많이 벌수록 위대해지고, 공덕도 많을수록 훌륭해진다. 하지만 무형의 세계에선 전혀 다른 척도가 작용한다. 수치와 양이 아니라 리듬과 강밀도(Intensity)가 가치를 결정한다. 이 척도가 작동하기 시작하면 액수 따위는 문제가 안 된다. ‘선물을 받지 않아도 좋을 만큼 부자도 없고, 선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이도 없다’는 말은 바로 이런 맥락의 소산이다. -192쪽
두려움을 모른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것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다른 사람에게 두려움을 끼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동시에 의미한다. 두려움을 모른다는 것은 바로 두 가지다. 그러므로 호랑이는 두려움을 모른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호랑이는 다른 동물을 두려워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총은 무서워하며, 게다가 호랑이는 다른 동물들에게 두려움을 주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두려움을 모른다는 것은 다른 존재를 노예로 만들지도 않고, 비굴하게 다른 존재에게 굴복하지도 않는 것이다. -『버리고, 행복하라』, 36쪽
이런 논리를 경제적으로 응용해 본다면, 첫째는 돈에 대한 두려움, 부자를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즉, 아무리 엄청난 부와 재물 앞에서도 자신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 여기까지는 뭐, 대체로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그 다음이다. 그 다음엔 내가 부자여도, 아무리 엄청난 돈을 가지고 있어도 아무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만약 내가 부자가 되었는데, 그 부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나를 멀리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무외시가 아니다. 내가 그 누군가를 두려워하지 않을뿐더러 어느 누구도 나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부로 인해서는 더더욱. 그건 부를 특권화하거나 부를 가지고 타인을 지배하려는 마음을 완벽하게 비울 때에나 가능하다. 그리고 그 정도가 되어야 순수증여라 할 수 있다. -199쪽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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