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어느 정도 산업화된 나라 중에서 왜 하필이면 한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이 ‘생계형 영세 창업’이 최근에 이렇게도 유행하게 됐는가? 나는 위에서 잠깐 언급한 한국 국가의 성격에서 그 대답을 찾고 싶다. 한국 국가는 재벌이나 토건 업체들을 중심으로 해서 돈을 풀어 성장률을 높이는 기술을 잘 구사해왔지만, 또 한 편으로는 노동 부문이 희생을 치러야 한다는 생각이나 복지가 우선 순위 중의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아주 익숙하다. 자본이 노동자의 임금을 깎으면서 성장하면 다행이고, 복지란 국가가 아닌 가족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은 IMF 이전에도 위정자의 ‘상식’이었지만 IMF 사태 이후에 개발주의와 신자유주의가 결합되어 노동은 그야말로 ‘동네북’이 된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전체 근로자의 65%나 되고, 적어도 월급이 3백만 원은 돼야 할 금속 내지 자동차 공장에서 월급 1백만 원도 받은 적이 없는 ‘사내 하청’ ‘사외 파견’ 노동자들이 가장 힘든 일을 떠맡는 나라를 세계 어디에서 또 볼 수 있는가? 정규직 청소부가 되려고 수십 명의 대졸자들이 경쟁을 하고, 비정규직은 되기 쉬워도 인간다운 대접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백수가 되기 싫은 젊은이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 <많은 국민이 자영업이나 택시기사가 되는 현실> 그 궁극적인 효과가 보장되지 않을뿐더러 처음부터 적지 않은 과학자들에게 의심을 불러일으켰던 황우석의 연구에 막대한 자금을 붓는 국가는 아동 보육이나 노령 인구의 간호, 장애인에 대한 보살핌과 같은, 공공시설과 인력이 절실히 필요한 부문에서 공공 일자리를 만들 생각은 별로 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적 개발주의 국가에서는 자영업 부문에서의 ‘전쟁과 같은’ 경쟁을 완화할 수 있는 공공 부문의 일자리가 ‘돈 먹는 하마’ 쯤으로 치부되고 복지는 각자가 ‘알아서 할’ 일로 이해된다.
…… ‘바깥’에서 보기에 우리의 ‘성공’을 가능케 한 것은 제대로 된 노동 생산성의 향상이나 기초과학 성과의 장기적 축적, 내수시장의 원만한 성장이라기보다는, 노동자로 하여금 말도 안 되는 대우를 감수하며 죽도록 일하게 만드는 ‘생존공포’의 분위기다. -15쪽
영어물신주의
우리말도 제대로 못 익힌 꼬마들이 이역만리로 유학이 아닌 유학을 떠나고, 민족사관학교가 “우리 민족이여 미국의 우수 대학을 정복하자!”는 구호 아래 거의 모든 과목을 영어로 가르치고, 고려대학교는 “우리가 2010년까지 절반 이상의 과목을 영어로 가르칠 테니 미국 대학 대신에 우리를 정복하라”고 외치고……. 통계를 봐서는 대미 무역이 아닌 대중국 무역이 우리를 먹여 살리고 있는 이 시대에 점차 ‘옛날 주인’이 되어가고 있는 미국에 대한 이와 같은 ‘기특한 충성심’은 문화 정치의 측면에서 웃고 지나갈 일이 결코 아니다.
유치원 때부터 주류에 편입될 수 있는 강남(내지 목동, 분당) 아이들이 커서 배타적인 특권의 권역을 만들어 지킬 것이고, 부모의 주머니 사정상 영어 유치원이나 민족사관고등학교, 고려대학교의 문턱 가까이도 갈 수 없는 이들은 영어라는 物神이 지배하는 조국에서 문화적인 소수자가 되고 말 것이다. 준주변부의 종속국가에서 ‘세계화’란, 일부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하얀 피부의 선생에게 ‘토미 킴’으로 불리는 명예(?)를 의미하고, 다수에게는 입시 감옥에서의 부질없는 형살이와 고졸의 몸으로 대졸자에게 단순한 아르바이트 자리까지 빼앗기고 사는 생활, 무명 대학 출신이라는 영원한 콤플렉스와 이름 없는 회사와 이름 없는 비정규직 머슴살이 등을 의미한다.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나는 것을 흔히 ‘팔자’라고 이야기하지만, 날로 윤택해지는 대한민국에서의 주변부 생활은 어쩌면 심리적으로 더 고된 일인지도 모른다. -18쪽
崇美主義에 犧牲된 耶蘇
조선 기독교의 이와 같은 저항적인 성격이 반대로 돌아서게 된 전환점이 언제일까? 주요 선교 단체들이 ‘정치적 중립’을 선언하고 독립 투쟁을 지원해 달라는 애국자들의 요청을 매정하게 외면한 1900년대부터일까? 학교 부실 운영과 조선 풍습에 대한 모독, 학생 생활에 대한 지나친 통제ㆍ감시로 학생들이 동맹 휴학을 해도 끝까지 ‘원칙(?)’을 고수하고 고집을 부렸던 1920년대부터일까? 사실 1920년대 초 배재ㆍ호수돈ㆍ정신 등 명문 개신교 계통 학교에서 학생 동맹 휴학을 취재한 신문 기사들을 보면 이미 학교는 ‘전제적 왕국’을 방불케 했다. ‘기독교는 선진 문명’이라는 공식은 이미 1920년대에 무너졌지만, 교단의 보수화ㆍ반민중화는 1930년대 후반 일제 전쟁에의 부역과 1945년 이후 미군정ㆍ이승만 체제 하에서 ‘준국교화’로 완결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성리학으로 탄압받았던 종교가 이제는 한반도의 한쪽에서 점령군의 위력에 힘입어 성리학이 비워준 자리를 그대로 차지해 그 폐단을 모두 답습하여 확대 재생산하게 된 것이다.
자파만이 구원받고 타자들은 모조리 ‘이단’으로 몰아 지옥 간다고 저주하는 일부 개신교도의 배타성은 이북에서 성리학이 비운 자리를 차지한 ‘유일 주체사상’과 과연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그들과 북한 지배 이데올로기가 다 같이 자기중심주의, 자만적 과대망상증, 절대성의 논리와 타자 배제를 특징으로 하는 세계관을 공유하는 것은 그들의 놀랄 만큼 광적인 ‘반북 정서’를 설명해주는 단서가 된다. -65쪽
국내에서 수구 결사대로 활동하는 보수적 대형 교회들은, 국외에서 물질적 시혜주의와 교세 확대 제일주의, 현지의 전통에 대한 경멸, 그리고 일그러진 세계관으로 ‘제국의 시녀’라는 한국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강화한다. 빈민의 하나님, 신음하는 자의 하나님, 칼과 재판관의 법복을 부정한 하나님을 망각해버린 그들의 신앙 아닌 신앙의 안타까운 결과인 것이다. -69쪽
마음을 파괴하는 사회
국가적 살육은 폭력성의 극단적인 형태지만 전쟁 이외에 자본주의 세계에 내재돼 있는 폭력 장치들은 무수하다. 예컨대 사회적 자원(신분 상승, 위신 등)을 놓고 벌이는 경쟁은 인간의 폭력화에 가장 많이 기여하는 제도적 폭력의 형태다. 학교에서의 성적 경쟁도 ‘남들은 다 잠재적인 것’이라는 폭력적 의식을 주입하지만, 유치원 때부터 하는 대항적인 스포츠도 경쟁이라는 형태의 규범화된 폭력을 내면화 한다.
운동이야 신체ㆍ정신적으로 필요하지만, 왜 꼭 남과 싸워서 승패를 가리는 운동을 정상적인 것처럼 가르쳐야 하는가? 몸의 움직임 자체와 과정을 즐기고 경쟁을 생각지 말라고 하면 안 되는 것인가? 그러나 사회는 신체적 경쟁을 당연지사로 가르칠 뿐 아니라 대자본의 돈벌이일 뿐인 올림픽ㆍ월드컵과 같은 국가 대 국가의 상징적 대항전을 전 지구적 볼거리로 만든다. ‘싸워서 이긴’ 자가 영웅이라는 허구를 어릴 때부터 진리인 양 착각하게 된 사람들이 폭력을 아파하는 어린아이의 본성(거친 충돌 장면을 보일 때, 신기하게도 아이는 당황하거나 인상을 쓰며 텔레비전을 향해 “그럼 안 돼, 저 사람 아파!”라고 한다. pp 88)을 간직할 수 있겠는가? 우리 팀이 이기기 위해 코치의 말을 무조건 잘 들어야 한다는 제도권적 스포츠의 법칙에 익숙해진 사람, 즉 명령이 떨어지는 대로 당장 실행해야 한다는 것이 본능화된 사람이라면, 저놈을 쏘라는 장교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확률이 얼마나 높을 수 있을까? 장성하여 경우에 따라 본인의 노력으로 폭력 사회의 본질에 대한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평생 ‘국가’ ‘군대’ ‘성공’의 신화에 묻혀 살 가능성이 훨씬 크다. 몸이 멀쩡하다 해도 남을 걱정하는 측은지심을 잃어버린 마음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90쪽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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