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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다, 문학과 경계, 이진경, 2002년 본문

책/밑줄긋기

이것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다, 문학과 경계, 이진경, 2002년

건방진방랑자 2019. 6. 2.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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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리즈 (기억의 세 가지 시제)

마그네틱 로즈

우리 역시 아름다운 시간을 멈추게 하기 위해, 혹은 현재와 미래가 언제나 그 가장 아름다운 시절의 시간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욕망하고 있지 않은가? 사진이나 영상을 이용하여 시간의 흐름을 멈추게 하기 위해 수없이 반복된 시도들도 그러하다. “남는 것은 사진 밖에 없다!” 기억이란 이처럼 어떤 순간을 멈추게 하려는 의지의 형식이다. 추억이나 회상, 그것은 이런 기억이 과거의 시제를 취할 때 나타나는 단어이다. pp 66

 

 

 

 

最臭兵器

어떤 상황에서도 지워지지 않는 명령의 기억은 노부오의 행적을 따라 죽음의 가스를 살포한다. 마지막 장면은 이 점에서 더욱더 익살스럽다. 나사의 우주복을 입고 결국은 물건을 전하는 노부오.

이 경우 기억이란 단지 과거에 관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시제를 갖는다. 그것은 멈추어 선 현재, 과거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며, 지워지길 거부하는 현재이다. 그것은 변이를 멈춘 현재적 삶이며, 멈추어 선 삶의 시제다. 여기서도 기억이란, 비록 명령과 임무, 부과의 형식이긴 하지만, 주어진 어떤 삶, 혹은 현재라고 불리는 어떤 하나의 점을 멈추게 하는 의지와 집착의 형식이다.

(...) 차라리 더 우스운 건, 그러한 멈추어 선 현재, 고착된 현재의 삶의 우스꽝스러움마저 망각하여, 그러한 자신의 삶에 대해 웃을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 ‘동일성/정체성(identity)’은 현재의 삶을 멈추어 선 시간성 속에 붙들어 맴으로써 지워지지 않는 기억의 형식으로 변환시키는 고정의 형식이며, 멈추어 선 삶을 당연한 현재성의 시제 속에 고정하고 유지하는 재생산의 형식이다. ~69~71

 

 

 

 

대포도시

아이의 꿈, 혹은 공상은 이러한 삶 속(누구와 싸우는지, 왜 싸우는지 묻지 않는 삶)에서 만들어진다. “나는 아버지처럼 포탄을 나르는 사람이 아니라 대포를 쏘는 사람이 될 거야.” 그것은 미래에 관한 것이고, 미래 시제를 갖는, 아직 도래하지 않는 삶에 대한 꿈이요 이상이다. 하지만 그것은 현재의 삶. 현재의 세계의 투사요 투영이며, 비록 아버지에게, 그리고 에게 결여된 것이지만 현재가 만들어내는 기억의 효과다. 그것은 미래의 시제를 갖는 기억인 것이다. 기억에 미래의 시제가 있을 수 있다니! <포대도시>가 탁월한 것은 도래하지 않은 것에 대한 꿈조차 일종의 기억일 수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미래의 시제 역시 기억의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72

 

우리의 꿈, 때로는 소망 내지 욕망의 형식으로, 때로는 유토피아나 이상의 형식으로 존재하는, 우리 자신의 미래에 대한 꿈, 그것은 얼마나 빈번하게 우리의 현재적 결여의 투영인 것인지. 집을 마련하고 싶다는 꿈, 좋은 직장을 얻어 잘 살고 싶다는 꿈, 좋은 배우자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꿈, 돈을 벌어 잘 살고 싶다는 꿈, 불멸의 명예는 아니어도 남들이 선망할 만한 명예는 얻고 싶다는 꿈 등등. 이 모든 꿈은 분명 현재 부재하는 것에 대한 것이고,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에 관한 것이며, 이후 도래하길 고대하는 것에 관한 것이란 점에서 미래에 관한 것이 분명하지만, 그것은 사실 현재적 삶이 만들어내는 기억의 일종인 것이다. 마치 글자 그대로의 꿈이 낮의 사건들의 반영이며, 못 이룬 소망을 대신 충족하려는 기억의 보충물인 것과 마찬가지로. -73

 

 

 

 

이러한 현실적 꿈이라는 것이, 현재 내지 과거로 소급되는 기억의 형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그것은 변이 가능성이 없는 미래요. 현재의 연장일 뿐인 미래다. 비시간적인unzeitlich - 반시대적인 것이라고 불리는 비현재적이고 비과거적인 요소들을 포함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저 아직 오지 않았다는 의미를 제외하고는 현재 내지 과거의 시제에서 벗어나지 못한 미래며, 멈추어 선 미래다. 멈추어 선 미래, 그것은 차라리 현재 이전의 미래요, 단순한 과거의 연장일 뿐이다. 그것은 새로운 변이의 선을 포함하지 못하며, 새로운 생성의 선을 그리지 못한다. -73

 

기념이란 무의식적 의지의 영역인 기억과 망각의 문제를 의식의 표면으로 떠올리기 위한 의식적 상기 행위다. 기념 내지 기념일은 이미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망실되고 사라져가는 과거의 사건을 상기시키는 방식으로 과거를 현재로 불어낸다. 하지만 이것이 수행하는 것은 정확하게도 과거의 사건에 다시금 현재를 연결시키고, 다른 곳으로 흘러가고 있는 현재를 과거의 그 방향으로 되돌리려는 안쓰러운 노력이다. 또한 그 기념일들은 기념의 행위 속에 포섭된 주체들에 하나의 동일성을 부여한다. -80

 

기억력에 대해서 망각능력의 능동성과 적극성을 보는 니체의 지적이 중요하다. 새로운 것이 되기devenir 위해서는 기억의 형태로 보존되는 무언가를 망각하고 지우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해 아무 것도 망각할 수 없는 자는 동일성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어떤 새로운 것이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바로 이것이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죽음의 선으로 이어지는 이유다. 죽음이란 새로운 것의 생성이 중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81

 

사실 생물학적 측면에서든, 사회학적 측면에서든 우리 자신의 동일성/정체성이란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지? 우리는 끊임없이 변한다. 현재의 순간에 몰두하여 있을 때, 우리는 동일성에 대한 물음에 시달리지 않으며, 동일성을 상기하려 하지 않는다. 언제 우리는 동일성을 상기하고 찾으려 하는가? 그것은 현재를 능동적으로 만들어가는 데 몰두하지 못할 때, 새로운 것을 생성하는 데 충분히 몰두하지 못할 때, 혹은 거기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할 때, 요컨대 현재를 긍정할 수 없을 때, 바로 그 때가 동일성을 의식적으로 상기하게 되는 때는 아닐까? 긍정할 수 없는 현재를 억지로 긍정하기 위하여 어떤 과거를 동일성의 형식으로 계열화하려고 하는 건 아닐까? -83

 

기억으로서의 미래, 지워지지 않는 기억으로서의 미래란 이후의 변이의 가능성을 봉쇄하고 있다는 점에서 죽음의 선이었다. 그것은 도래할 새로운 세계, 새로운 시간으로서 미래가 아니라 현재의 투사에 불과한 미래요, 현재를 구성하는 과거의 투사일 뿐인 미래다. 반대로 생성적인 미래란 거꾸로 현재를 변환시키려는 의지가 작동하는 미래고, 그것을 통해 현재를 유효하게 바꾸어가는 현재 시제로서의 미래며, 그것을 밀고 나아가 과거 자체도 얼마든지 지우며 새로이 구성할 수 있는 미래다. 종종 목적론으로 혼동되기도 하는 이러한 미래적 현재, 전미래적 시제는 기억에 반하는 반-기억(counter-memory)으로서의 망각의 선, 생성의 선이 자유롭게 뻗어나갈 자유의 공간을 통해 구성되는 현재라는 점에서 목적론에서 언제든지 벗어난다. -84

 

어느 경우든 기억을 지우려는 시도는 현행적인 의미를 갖는 한, 현재의 시제로서만 존재한다는 점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기억을 지우는 문제는 이처럼 과거로 되돌아가거나 미래로 가서 수행할 수 있는 어떤 일이 아니라, 언제나 현재의 시제로, 현재 속에서 수행해야 하는 현재적 문제일 뿐이다. 그것은 무엇을 지우는 부정적과제가 아니라 새로운 것을 생성하는 긍정적인과제다. 망각이란 잊고 지운다는 부정적 과정이 아니다. 현재의 생성에 몰두함으로써 과거가 자연히 그 안에 끌려들어가면서 변형되거나 망각되게 되는 긍정적 과정인 것이다. -85

 

기억과 망각의 문제는 남기는가 지우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멈춤 없이 흘러가는 현재적 순간 그 자체에 몰두하는 것이며, 그렇기에 현재 그 자체에도 머물지 않고 고착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현재에 집착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과거, 현재, 미래 어느 시제에도 머물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따러서 우리는 이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

생성에는 시제가 없다.

이 지점에 이르면 생성의 문제가 절대적 생성의 문제로 변환된다. 그것은 어떤 기억에도 머묾이 없음이요, 어떤 현재에도 집착함이 없음이며, 어떤 미래에도 사로잡히지 않음이니,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시제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금강경의 유명한 문구는 바로 이러한 사태를 표현하고 있다. -86

 

과거의 마음도, 현재의 마음도,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과거의 일은 이미 지나가버렸으니 생각하여 헤아리지 아니하면 과거의 마음이 끊어지니, 곧 과거의 일은 없다 함이요, 미래의 일은 아직 다가오지 않았으니 원하지 아니하고 구하지 아니하면 미래의 마음이 스스로 끊어지니 곧 미래의 일이 없다고 함이요, 현재의 일은 이미 현재라 일체의 일에 집착함이 없음을 알 뿐이니, 집착함이 없다 함은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음이 곧 집착함이 없음인지라, 현재의 마음이 스스로 끊어져서 곧 현재의 일이 없다고 하느니라. 頓悟入道要門論 12

 

 

 

공각기동대

 

불행히도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반성하는 기준이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잣대, 그리고 우리가 되고 싶은 이미지, 가장 갖고 싶은 것, 최고로 생각하는 가치 등은 우리 자신이 만든 게 아니다. 그것들은 어느샌가 우리 머릿속에 프로그램화된 것들이다. 우리는 그것들에 비추어 다른 모든 것들을 판단하고 행동한다. 이 프로그램이 입력되는 과정은 우리가 하나의 정체성을 획득하고 실존하는 방식 그 자체이므로 완전히 무의식적이고 자동적이다. 우리가 사는 것 자체가 바로 프로그램이 입력되는 과정이다. TV를 보고, 학교에 가고, 일터에 나가고, 축구 경기를 관람하는 것 자체가 자본주의 한국이 훌륭한 시민이 되는 과정이기도 하며, 우리의 프로그램이 완성되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42

 

인간은 많은 것들로 구성된다. 얼굴, 목소리, , 기억, 친구, 부모, 상사, 연인, 사랑, 우정…… 이 많은 것들의 교차점에 인간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들, 이러한 네트워크가 나를 만들고 동시에 내가 가진 능력을 표현한다. 내 사이버네틱 어디션이 엑세스할 수 있는 정보와 네트워크가 라는 의식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동시에 나를 어느 한계로 제약한다. 나는 나의 능력만큼 엑세스할 수 있고, 그것은 또한 나의 한계다.” 지금 나를 있게 해준 모든 것들이 다른 나를 만드는 데 제약으로 다가온다. 이제 나는 나를 바꾸어줄 방대한 정보와 네트를 가진 다른 신체와의 만남을 꿈꾼다. -48

 

 

 

우리는 우리 신체의 조성을 어떻게 늘릴 수 있을까? 그것은 다른 신체와의 합체를 통해서다. 내가 다른 신체와 만나서 다시 더 큰 하나의 신체를 구성한다면 그 신체의 조성은 매우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외부적 신체와의 만남이 신체적 조성을 높이기는커녕 그것을 축소하고 심지어 파괴하는 것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54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신체에 맞는 신체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스피노자는 기쁨과 슬픔을 그 기준으로 내세웠다. 기쁨은 우리와 만난 신체가 우리 신체에 잘 맞아서 합체 후 능력이 증가했을 때 느껴지는 정서이다. 반대로 슬픔은 그 만남이 서로의 신체를 파괴해서 능력이 감소했을 때 느껴지는 정서이다. -55

 

신체의 안전과 능력의 확장을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우리 자신이 능동적으로 자신에게 맞는 신체를 찾아나서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능동과 수동 사이에 커다란 질적 차이가 있음을 누차 강조했으며, 자유인과 노예의 구분을 그것에 상응시켰다. 자신이 기쁨의 원인이 되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것이다. 처음엔 수동적으로라도 기쁨을 경험하기 위해 노력해야겠지만, 결국에는 스스로 기쁨을 만들어내고 스스로 자기 신체에 맞는 신체를 찾아 결합해야 한다. -56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자연에 대한 정복을 인간 이성의 위대한 승리로 이해했던 근대인들은 이성적이지 못한 것들에 대해 狂氣라는 이름표를 붙였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근대 이성이 계몽이라는 명목으로 행한 광기적 폭력들을 많이 알고 있다. 아마도 자연은 그러한 폭력의 대표적인 희생자일 것이다. 자연은 자주 무지와 야만의 상징으로 간주되어왔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인간에게 무언가를 제공해주기 위해 창조된 부속물 정도로 여겨졌다.

그러나 자연의 눈, 너구리의 눈으로 보면 근대 인간은 자연을 갉아먹는 벌레인지도 모른다. 영화가 처음에 벌레처럼 산을 갉아먹는 포크레인들을 보여주는 것도 근대 인간을 바라보는 자연의 시선을 드러내기 위해서일 것이다. 자연은 인간보다 훨씬 더 큰 지성에 의해 움직인다는 말이 있다. 만약 자연에게 지성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이성을 하나의 광기로 파악할 것이다. 미친 듯이 자연을 파먹고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는 정신나간 벌레가 자연의 눈에 비친 인간의 모습은 아닐까? 그 때문인지 늙은 너구리인 오로쿠 할멈은 인간의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는 민둥산 언덕을 가리켜 광기의 언덕이라고 불렀다.

자연이 패배자임을 모르는 승자, 제 삶을 갉아먹는 행위 속에서 행복을 발견하는 바보만큼 불행한 이도 없을 것이다. 도대체 어떤 집합적 운명의 힘이 근대 인간의 정신을 그렇게 기만했던 것일까? 어떤 운명의 힘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을 닦달하고 착취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어떤 운명의 힘이 우리에게 자연은 우리의 땔감일 뿐이라고, 혹은 우리에게 엄청난 빚을 진 빚쟁이일 뿐이라고 부추겼던 것일까? -121

 

인간이 자연의 지배자가 되었을 때 너구리들의 다음 말처럼 그는 세상의 유일신처럼 막강한 존재였다. “야아! 사람이란 대단하군요. 여지껏 우리와 같은 동물의 일종인 줄 알았는데 이번 일로 하느님이나 부처님 같은 힘이 있다는 걸 잘 알았어요.” 하지만 인간은 동시에 유일신처럼 고독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와 대화를 나누어줄 자연은 사라지고 없다. -127

 

노동에 종사하는 자, 그에게는 신체에 변화가 생기지 않을 수 없고, 그토록 일하는 것은 분명히 정신에 큰 해가 되기 때문이다. 또 돈을 받고 노동을 파는 사람은 사실 자신을 팔게 되고 스스로를 노예로 만들 우려가 있다.” 고대인들은 노동이 불가피한 경우에도 그것을 숭상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노동을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항상 그것에 지나치게 빠져들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한 것이다. -129

 

노동놀이는 근대인과 너구리의 가장 큰 차이를 드러내는 말일 것이다. 어떤 힘든 일도 놀이로 바꾸는 너구리들과 달리 어떤 즐거운 일도 노동처럼 하는 인간! 놀이 공원에 아이를 데리고 가는 일은 대단한 피로를 동반한다. 쉬는 일조차 노동이 되고 마는 것은 노동하는 동물에게는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인 듯하다. 이 점에서 확실히 근대 인간의 잃어버린 타자라고 할 수 있다. 너구리 전쟁의 오프닝 송은 이렇게 시작된다. “너구리야! 너구리야! 놀지 않겠니?” 너구리들은 이렇게 자신을 규정한다. “노는 기질이 없다면 너구리는 더 이상 너구리가 아니다.” 너구리들에게는 생사를 건 인간과의 일전을 앞두고 배우는 변신술마저 즐거운 놀이가 된다. 그 어떤 심각한 것들도 이들을 지배할 수 없다.

너구리들은 인간을 쳐죽이자고 외치면서도 튀김과 꽁치조림, 옥수수, 햄버거를 만들 인간은 살려줘야 한다고 말하는 천연덕스러움을 지녔다. 강경파 곤타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로 상황은 우습게 흘러간다. ‘궁지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를 문다는 비장한 선언은 우리는 쥐가 아니야’, ‘고양이를 물어봐야 소용 없잖아.’ ‘쥐라고? 요즘 귀도 먹어보지 못했구만……’, ‘쥐는 무침 튀김이 제일이라고……’, ‘아냐, 그냥 튀김이 최고야’, ‘난 밀가루 무친 게 더 좋은데’ ‘그 바삭바삭한 튀김……심지어 쿠데타의 장본인인 곤타까지 무슨 말들이야? 너희들! 난 쥐튀김이 제일이라고! 호이호이라고 말한다. 쿠데타 상황은 다른 모든 것들처럼 놀이로 미끄러져 버린다. 놀이와 유머, 웃음이 이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 덕목들은 사실 근대 인간들에게 가장 결여된 것이고, 근대의 도덕이 가장 경멸했던 것이다.

연신 드링크제까지 마셔가면서 노동하는 근대인들을 낯설게 만드는 너구리의 시선, 사실 너구리는 우리들 생활에 낯설어진 우리들 자신의 시선인지도 모른다. 우리 안에 있는 우리의 타자. “대부분은 심한 스트레스를 못 견뎌 몸이 약해서 산으로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 정말이지 인간들은 잘도 이런 생활을 견뎌내는구나 하고 감탄했습니다.” -131

 

영화 속에서 너구리들은 결국 사람으로 변신을 해서 살아가지만 그것은 변신이라기보다는 적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변신이 놀이였다면 적응은 노동이다. 어떤 즐거움도 어떤 놀라움도 없는 변신이 바로 적응이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 샐러리맨, 스낵 점원, 심지어 삼림 개발을 하는 사업가라도 변신해야 한다. ‘의태보다 더 나쁜 것이 있다면 적응일 것이다. 그것은 길들여지는 것이고 굴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34

 

Endign Song

언제든지 누군가가 꼭 곁에 있어

생각해주세요. 그 멋있는 이름을

마음이 울적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에

꼭 꼭 누군가가 언제나 곁에 있어

태어난 마을을 멀리 떠나 있어도

잊지 말아주세요. 그 마을의 바람을

언제든지 곁에 있어

비오는 아침엔 도대체 어떻게 해

꿈에서 깨어나도 역시 외톨이야

언제든지 네가 꼭 옆에 있어

생각해주세요. 멋있는 그 이름을

싸움에서 상처 입고 빛을 보이지 않으면

귀를 기울여봐요. 노래가 들려와요

눈물도 아픔도 언젠가 사라져가

그래 꼭 너의 웃는 얼굴을 원해

바람 부는 밤엔 누군가를 만나고파, 꿈속에서 봤지. 너를 만나고파

 

 

 

 

원령공주

 

신을 인간적으로만 이해하는 것이 인간의 착각임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을 초월적인 존재로 생각해서 신에 대한 이해를 포기하는 것도 올바른 것은 아니다. 신이 오직 인간을 통해서만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지만, 인간 역시 신의 표현 중의 하나라는 사실도 분명하므로, 인간도 신을 이해하고 신과 소통하는 통로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어떤 사물도 신과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난 어떤 사물도 신과 떨어져서 존재하지는 않는다. - 256

 

신은 한번도 우리에게 죽음을 말한 적이 없다. 유한한 양태들의 죽음은 본질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맺고 있는 외적인 관계에 의한 것이다. 우리를 구성하는 많은 유기체적이고 사회적인 관계들이 해체될 때 우리는 죽음을 맞이한다. 우리를 구성하는 수많은 입자들이 더 이상 하나의 정신적ㆍ신체적 질서를 표현하지 않을 때 우리는 죽는 것이다. 전통적인 기독교의 해석과 달리 신이 우리의 삶과 죽음을 일일이 관장하는 것은 아니다. 신은 다만 우리가 더 이상 우리를 구성하는 관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우리는 해체될 것이라고 말할 뿐이다.

자연의 시각에서 볼 때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없다. 선과 악의 문제는 구체적인 개체, 가령 인간에게나 있는 문제다. 그것도 자신의 몸에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의 문제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계란이 바위에 부딪혀 깨지는 일은 계란 입장에서는 참으로 안 된(bad) 일이지만 그것을 깨뜨린 바위가 악한 것도 아니고 계란이 깨지는 것을 신이 의도했던 것도 아니다. 신의 뜻이란 계란이 바위에 부딪히면 깨진다는 것 정도나 될까…… 아마도 신은 계란에게 그런 무지한 일을 하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259

 

더러운 인간들, 서로 미워하는 마음과 고통을 맛보거라.” 멧돼지 신이 원한의 정신에게 내뱉은 거대한 저주이다. ‘미워하는 마음’, 원한의 정신은 모든 관계가 슬픔의 관계, 고통의 관계로 뒤바뀐다는 것을 의미한다. 니체는 원한의 정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사람들의 관계가 이렇게 일그러진 것을 가리켜 피에 독을 탄 사건이라고 부른다. 노예들 도덕의 특징인 원한의 정신은 다른 사람과의 선의 경쟁을 통해 자신을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 대한 비난을 통해 자신을 정당화한다. 이른바 노예의 삼단 논법! “저 놈들은 사악한 놈들이다. 나는 저놈들과 적대적 관계에 있다. 따라서 나는 선하다.” -261

 

인간이 악했던 만큼 자연도 악했던 것이다. 이 점에서 에보시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네가 동료의 한을 풀려고 왔다면 여기엔 산개에게 목숨을 잃은 남편들의 복수를 하려고 마음을 정한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원한의 정신이 딛고 서 있는 지반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죽음에 대한) 공포이다. 우리는 우선 멧돼지 신이 원한의 괴물로 변한 것이 죽음에 대한 공포와 관련되었음을 어미 개로부터 듣는다.

멧돼지 신은 죽음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죽었어. 지금 나처럼 말이야. 나의 몸에도 인간의 독들이 들어가 있다. 멧돼지 신은 도망쳤지만 나는 도망치지 않고 나의 죽음을 바라볼 것이다.”

멧돼지들은 어미 개 모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단지 산개 일족의 사슴 신을 독차지하고 있기 때문에마오(멧돼지 신)가 죽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생각은 인간과 전형적인 대립쌍을 이룬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함으로 해서 멧돼지들은 원한의 괴물로 돌변했다. -263

 

자유인은 죽음 같은 것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으며, 그의 지혜는 죽음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숙고이다. (스피노자)

 

거대한 자연의 무질서한 힘에 맞서기 위해 인간은 자연을 관리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든다. 홍수를 일으키던 거대한 자연은 강수량에 따라 수위를 조절할 수 있는 댐 안에 갇힌다. 우리의 근본적인 불안과 공포는 우리가 알 수 있고 관리할 수 있는 형태가 될 때까지 자연을 닦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266

 

공포에 기반한 원한의 정신은 결국 서로의 살을 썩게 하고 죽음을 가져오는 저주가 된다. 아시타카의 말대로 더 이상 원망에 마음을 바쳐서는 안 된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자연에 대해 공포를 갖지 말라고 말하는 것도, 더 이상 서로 원망하지 말라고 호소하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선에 대한 도덕적 가르침도 아니고, 욕망에 대한 비난도 아니기 때문이다. 관계가 바뀌지 않는 한 권한이 풀리지 않는 한 누구도 그렇게 쉽게 딴 사람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267

 

 

 

인용

목차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이 보여준 정복욕의 인과응보

이성을 비웃으며 노는 너구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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