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들은 자주 실패했고, 가끔씩 성공했다. 하지만 우리는 실패를 즉시 잊었고, 성공 또한 오래 기억하지 않았다. 자기를 배려하는 힘이 흘러넘쳐야 비로소 타인을 배려할 수 있다. -6쪽
생의 길섶에는 무수한 우연들이 숨겨져 있는 법 …… 마음이 통하면 천 리로 지척이라고, 보이지 않는 인연의 선들이 작동하기 시작하면 아무리 광대한 시공간도 단숨에 주파할 수 있다는 것. -7쪽
자신의 고향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미숙한 초보자이다. 모든 땅을 자신의 고향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강인한 자이다. 그러나 전 세계를 타향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완벽한 자이다. 위그 「工夫」
근대성이란 한마디로 사람들을 ‘고향’에 묶어두는 인식론적 기제라고 생각한다. ……공부란 고향에서 떠나는 과정이라고, 더 정확히 말하면 고향이라는 표상들, 나를 구성하는 ‘근본적 所與’들로부터 떠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10쪽
밤과 잠에 대한 적대감 역시 근대적 사유의 한 축을 차지한다. 그 결과 20세기 내내 밤의 길이는 조금씩 줄어들었고, 더불어 잠은 하루의 일상 가운데 가장 무시해도 좋을 과정이 되어버렸다. -38쪽
수레나 마차, 역마 등 이전의 수송 수단에서 매주 중요한 고리였던 ‘사이공간’이 기차 수송에서는 사라졌다. 기차는 단지 출발과 목적만 안다. ……사이공간이 소멸된다는 건 인간과 공간 사이의 다양한 감각적 네트워크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 그 여행기(열하일기)가 특별했던 건 출발지와 목적지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한 사이공간에 의해서다. -53쪽
민족담론이 구성되려면 일단 외부가 설정되어야 한다. 안팎을 날카롭게 단절함으로써 내적 동일성을 구축하는 것이 민족담론의 매커니즘이기 때문이다. …… 시선이 이렇게 확장되면 안과 밖, 중국과 오랑캐, 物과 我의 구분 역시 절대적 구획에서 해방된다. …… 각자는 모두 자기 나름의 가치를 지니고 존재하는 것일 뿐 하나의 중심으로 수렴될 필요가 없다. -74쪽
500년에 한 번 하늘나라 선녀가 내려와서 여섯 푼짜리 가벼운 소맷자락으로 바위를 한 번 스친다. 다시 500년이 되면 또 이처럼 한다. 이렇게 해서 바위가 닿아 없어질 때까지의 시간을 一劫이라 한다. -82쪽
고공 1000미터 위로 솟아오르는 매의 날개를 본 적이 있는가? 그의 날개는 지극히 고요하다. 臥虎藏龍의 주인공 리무바이의 무공은 어떤가? 그 매혹적인 대나무 밭에서의 결투 장면에 나오는 그의 몸놀림에는 속도가 없다! 상대방의 흐름을 타고, 대나무의 리듬을 타고, 그래서 차라리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83쪽
바쁘면 바쁠수록 열정은 소거되고, 삶은 텅 비어버린다. 이런 구조에선 자신의 욕망에 ‘반하는’ 일을 ‘열나게’ 하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질수록 행복이나 지혜와는 점차 멀어지는 어이없는 역설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 코드화된 방향을 벗어나 새로운 리듬을 만드는 것, 삶과 지식의 새로운 배치를 구성하고, 상상력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이질적인 집단들의 네트워크를 만들 때 속도, 균질화, 화폐의 삼중주는 깨어진다. …… 이 조급증이 시간의 상상력을 얼마나 협소하게 만들었는지! 그 결과 인간은 우주와 교신할 능력도, 자연과 감응할 힘도,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장엄함도 모두 상실하고 말았다. -85쪽
‘사랑도 헛되면 어쩌나?’ 이 두려움이야말로 ‘연애의 토대’다. 삶의 허무에 대한 공포가 종교의 토대인 것과 마찬가지로. 하지만 삶이 그러하듯 사랑 또한 물거품 같은 것이다. …… 연애가 불멸의 위치로 상승하면 상승할수록 그것은 삶에서 멀어진다. …… 순정은 반드시 대가를 요구한다. 고로 사랑이 뜨거워질수록 증오 또한 함께 자란다. ……삶의 고난과 슬픔을 ‘한’이 아니라 신명으로 변주하는 마무리 …… 그에 반해 연애라는 근대적 판타지는 근본적으로 죽음충동을 그 밑에 깔고 있다. -226쪽
人生萬事 다 그런 것 아닌가? 붙잡는 순간, 손 안에는 아무 것도 없는 법. -231쪽
자의식이란 인간이 자연과 단절되는 그 순간 태동했다고 할 수 있다. …… 자의식이란 수렁 또는 늪이며, 근대인에게 주어진 일종의 저주다. …… 연애는 없는데 연애에 대한 담론(거리재기)만이 무성하다. 자의식의 줄에 꽁꽁 묶인 근대 도시인의 전형이다. …… <독립신문>의 ‘자유연애론’이 주장한 거리 재기와 탐색전은 여기에 이르러 극치에 도달한다. 이것은 대상으로부터 멀어지는 과정일 뿐, 자신의 욕망으로부터 소외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 242쪽
장금이는 아주 일찍부터 사랑에 빠지지만, 사랑 때문에 무얼 못 해본 적이 없다. …… 삶이 사라진 자리에 사랑을 메웠는데, 사랑은 무상하게 변해간다. 그 무상함을 ‘불멸의 가치’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둘 중 하나가 죽거나 아니면 둘 다 죽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으니까. …… 그녀(장금)에게 사랑이란 삶의 모든 과정을 멈추게 하고 결국에는 죽음이라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사랑들과 함께 가면서 끊임 없이 새로운 관계 속으로 진입하는 과정인 것이다. -249쪽
내가 보고 있는 이 세상은 그저 나의 시각에 의해 구성된 것일 뿐, 세상의 ‘본래 면목’은 아니다. 그걸 더 확대하면, 내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세상은 그만큼 달라진다는 뜻이다. -292쪽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은가? 그러면 지금 당장 마음의 장벽을 박차고 나와 ‘距離들’을 지워버려라.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람과 기계, 몸과 마음 등 이 모든 것들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들을. …… 밥을 혼자 먹을 때와 여럿이 함께 먹을 때 그것이 흡수되는 영양의 질이 달라진다든지, 마음이 서로 통하면 몸의 기운이 활발하게 돌지만, 그렇지 않으면 바로 옆에 있어도 기운을 추스르기가 어렵다든지. -333쪽
나이가 들면서 문득 머리가 좋다는 건 바로 집중력 자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고로 공부에 집중할 줄 모르면 머리가 나쁜 것이다. …… 머리가 나쁨에도 불구하고 계속 정진할 수 있다는 건 미덕 중의 미덕인데 말이다. - 340쪽
죽음이 있으므로 삶이 있다. -387쪽
웃음은 혈관이 굳는 것을 막아주기 때문에 혈관 순환을 돕고 면역 체계를 활성화한다고 한다. -404쪽
몸이 외부와 맺는 관계는 오직 은유를 통해서만 말해지게 되었다. 왜냐 하면 인간은 인간과 동물, 인간과 자연, 인간과 대기, 그 사이에서 가능했던 변이와 생성의 능력, 즉 ‘되기’의 능력을 몽땅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409쪽
질병을 고친다는 건 곧 일상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감정의 흐름을 바꿀 수 없고, 감정의 흐름이 바뀌지 않는 한 그 거처인 장기가 지속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417쪽
질병과 몸은 적대적이지 않다. 오히려 삶을 다르게 살도록 추동해주는 스승이요 친구인 것이다. -417쪽
병리학적 이분법이 죽음을 내팽개침으로써 삶조차 죽음충동에 휩싸이게 했다면, 이들은 죽음의 문을 자유롭게 넘나듦으로써 삶에 충만한 파토스를 부여한다. -431쪽
앎은 어딘가 보관하거나 누군가 점유하는 것이 아니라 허공을 가득 메우는 대기 같은 것이다. 우리는 다만 그 사이를 이리저리 가로지르며 그 흐름을 ‘절단, 채취’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내 마음의 크기가 곧 ‘나의 우주’를 결정한다. -438쪽
비판과 분석이라는 척도에는 일단 지식이란 오직 언어, 곧 논리의 영역에서만 이루어진다는 전제가 작동한다. 다시 말해 모든 지식의 이면에는 논리적 법칙, 곧 논리학이 자리하고 있다. -461쪽
근대 지식인들은 앎의 즐거움을 잃어 버렸다. 앎을 통해 자신의 번민을 구제하지도, 타인의 삶에 희망과 전망을 부여하지도 못한다. 그저 비판과 분석을 통해 자신의 천재성과 지적 권위를 과시할 수 있을 뿐이다. -463쪽
중화문명의 배치 하에서 ‘앎’은 국가나 민족이라는 경계를 갖지 않는다. 아울러 분과학의 체계를 갖추지도 않는다. 중화라는 전범을 축으로 文ㆍ史ㆍ哲이 천지자연의 장 위에서 자유자재로 혼용될 뿐이다. -465쪽
교양이란 지식이 전문 영역에 따라 분화하는 것을 전제로 할 때에만 가능한 개념이다. 즉, 전문성과 짝하는 개념이고, 그런 점에서 철저히 근대적 산물이다. -469쪽
대체 무엇이 ‘대학의 붕괴와 인문학의 위기를 불러온 것일까? 누구나 인정하듯이 분과 사이의 견고한 장벽이 원인 가운데 하나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 앎의 영토에서 ‘민족, 국가, 자본’의 흔적을 지워버리기! 궁극적으로 주체와 타자, 지식과 일상, 인간과 자연 또는 인간과 기계 등 이 모든 항을 대립적으로 설정하는 근대적 인식론의 뇌관을 전복하려는 ‘무모한 열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때서야 진정 우리는 새로운 앎의 매트릭스 안으로 전입할 수 있을 것이므로. -479쪽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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