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에는 끝이 없다고 한다. 정말 그런가?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 대학에 자리 잡으면 그 때부터 공부는 끝난다는 게 우리 시대의 상식이다. 대학원, 석ㆍ박사과정을 마치려면 30대 중반이 넘는 게 보통이다. 그리고 요즘 같은 대량 교육 시스템과 지적 풍토에서 박사논문은 하나의 출발점일 뿐이다. 따라서 제대로 라면 도제과정이 끝나는 30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앎을 구축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정반대이다. 그때부터 교수임용 전선에 뛰어들어, 실패한 경우는 세상을 비관하느라, 성공한 경우는 온갖 프로젝트니, 회의니 하는 것들에 휘둘리느라 공부는 바로 끝이다. -43쪽
(노브레인, 크라잉넛이) 먼저 의기투합하는 친구끼리 밴드를 짠다. 그 다음에는 작업실을 하나 마련해 합숙을 하면서 연습한다. 그러자니 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가 없어 대개 중퇴나 휴학 중이었다. 돈이 떨어지면 공사판이나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모은다. 다시 모여 또 죽도록 연습을 한다. 대충 이런 식이었다. 음악이 좋아 24시간 음악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돈이나 인기는 그 다음 순이었다. 그러니 거리낄게 없었다. 물론 그들의 목적도 음반을 내고 콘서트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굳이 공중파를 타기 위해 애쓰기보다 일단 길거리나 클럽 무대부터 선다. 출연료가 있을 리 없다. 노브레인이던가, 한 번은 무슨 회사 기념일 콘서트를 맡아 한달동안 미친 듯이 연습을 했는데 관객이 한 명도 오지 않아 자기들끼리 신나게 노래 부르다 만적도 있다고 한다. 자신들을 위한 축제를 벌인 것이다. -54쪽
‘원하는 것이 있으면 자꾸 입으로 떠들어 대라. 그러면 이루어질 것이다.(衆口鑠金 「龜旨歌」)’라는, 말하자면 원하는 바를 미리 말로 표현함으로써 뜻하는 바를 성취하는 주술적 전략을 구사하는 셈이다. (...) 믿어지지 않는다고? 일단 한 번 해보시라. 밑져야 본 전 아닌가. 안 되면 될 때까지 하면 되고. 물론 조건이 하나 있다. 마음을 최대한 비워야 한다. 잔머리를 굴리거나 초조하다고 오락가락하면 절대 안 된다. 텅빈 마음으로 치열하게 열망할 것. 이것이 비결이다. -64쪽
강의의 가장 큰 조건은 가르치는 이가 그 내용에 매혹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학교육이 왜 학생들에게 외면당하는가? 선생 자신도 감동하지 않는 메마르고 건조한 지식을 썰렁하게 반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구실 강좌에서 ‘썰렁암송’은 금물이다. 수강생이 많건, 적건 신명나게 떠들어야 한다. 즉, 지식의 즐거움을 촉발하지 못하는 강의는 일단 실패라고 봐야 한다. -73쪽
맹목적 질주! 지극히 당연하게도 욕망의 주체가 자신이 아니기에 목표에 도달한다 해도 절대 만족감을 느낄 수가 없다. 끝없는 갈증 아니면 참을 수 없는 공허감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95쪽
소유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만큼 물질적 순환은 활발하게 이루어진다는 것. 그것은 집단적 차원에서건 개별적 차원에서건 다르지 않다. -82쪽
물건들은 지천에 넘치는데 사람들은 그것들을 활용할 줄 모른다. 그래서 다시 물건들을 폐기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 지긋지긋한 반복을 끊고 싶다면 먼저 물건들을 해방시켜라. 삶이 훨씬 가벼워질 것이다. 가족과 연애가 사람들을 붙들어 매는 중력장치라면, 소유에 대한 집착은 자신의 몸을 얽어매는 사슬이다. 증여와 순환에 대해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주고받음이 오직 혈연의 울타리를 넘지 못하는 차디찬 ‘계산기계’들! 그런 몸으로는 타인은커녕 자신의 삶도 구제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탈주란 그렇게 거창한 구호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가벼워지는 것, 부와 재물이란 멀리 떨어져 있는 누군가에게 양도되기 위해 잠시 내게 머무르는 것일 뿐이라는 걸 알아차리는 것이다. 바야흐로 견고한 자본의 성벽을 가로지르는 경쾌한 발걸음들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2500년 전 붓다가 탁발을 떠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오직 날개의 무게로만 가는 새처럼 가라!”
사랑이란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하게 하는 것이다! 소유와 집착이 아니라, 혹은 자기와의 동일성에의 요구가 아니라, 그의 본성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하도록 촉발해주는 것이 바로 사랑인 것이다.
(...)사랑에 빠지면 동요하고, 불안에 잠기고, 어찌할 줄 몰라해야 한다는 도식에는 사실 소유와 집착에 대한 욕구가 작동한다. 거절당할수록 더욱 끌려가는 것도 그 상실에 대한 불안감, 다시 말하면 소유를 타인들에게 과시하고 싶은 인정욕망이 깔려 있는 것이다. -101쪽
사랑이 생에 대한 기쁨이라면 그 충만함은 흘러넘치게 마련이다. 흘러넘치지 않고 단지 두 사람의 관계 속에서만 멈추어버린다면? 그렇다면 두 가지 길이 있을 뿐이다. 하나는 짧은 열정 뒤의 긴 권태. 그리고 그 이후에는 권태를 제도와 도덕의 힘으로 버티려는 안간힘. 그리하여 다시 연민과 희생이라는 수령 속으로 들어가면서 체념하는 것. 다른 하나는 변태적 쾌락의 길. 사랑의 강도를 단지 성욕의 강렬함으로 해소하려는 처절한 고투. 그 종국에는 ‘죽음충동’이 똬리를 틀고 있다. 쾌락은 삶의 욕망을 생성하기는커녕, 끊임없이 그것을 소거함으로써 마침내는 육체의 소멸, 곧 죽음을 욕망하는 경계로 나아가게 마련이다. -104쪽
서로 다르다는 건, 소중하다는 것. 만약 내가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무대포로 일관했다면 나 자신의 돌부리에 수없이 부딪혀 넘어졌을 것이다. 나와 정반대로 세상을 보는 이가 좌우에서 당겨주기 때문에 나는 계속 나의 속도를 측량하고 조절할 수 있었다. -128쪽
끊임없이 변이를 추구하면서 활동마다에 특징을 부여할 수 있어야 외부와 소통하는 능력이 증대된다. 코뮌의 생명은 외부와의 소통 능력이다. 코뮌이 실패하는 여러 가지 이유 가운데 하나가 ‘자족적’이라는 데 있다. 자족이라는 것은 자신의 내적 경계를 고정시킨다는 뜻인데, 개인이든 집단이든 경계가 명료해지는 만큼 활동 에너지가 위축되는 건 만고불변의 법칙이다.
“텍스트는 외부의 주름이다.”라고 했던가. 사람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건, 어떤 일들과 접속하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변이, 생성한다. 관계의 변이가 수시로 일어나는데 나라는 고정된 구체가 어디 있겠는가. 연구실이 여타 조직들과 구별되는 지점도 바로 거기에 있다. 대개의 조직은 조직표를 그리는 데 전력투구 한다. 상부에서 아래까지 어떤 지위들을 정해놓을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학연, 지연, 세대별로 골고루 안배할 것인가가 최대 관건이 된다. 그러다보니 정작 구체적인 실천 활동에는 소홀해지게 마련이다. 심한 경우 조직표는 완벽하게 구축되었는데, 어떤 활동도 부재하는 역설이 일어나기도 한다. (‘수술은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환자는 죽었습니다.’라는 꼴이라고나 할까.) -151쪽
질병이란 몸이 보내는 메시지요 신호라는 것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치유란 단지 종양의 제거가 아니라 낡은 습속을 바꾸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도. 한방 치료를 받으면서 요가와 등산을 시작했다. 그 때부터 요가와 등산이 연구실의 주요활동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질병이 가져다 준 멋진 선물들! -167쪽
대체 왜 이렇게 되었을까? 행복하게 살기 위해 코뮌을 구성했는데, 왜 나는 나 자신을 자꾸 궁지로 몰아가고 있는 것일까? 해답은 간단 했다. 나는 엄청난 노력을 투여한 대신 연구실 사람들에게 그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나는 능동적 배려가 아니라 희생이라는 자의식에 묶여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나에게 연구실을 위해 돈과 시간과 능력을 투여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내가 좋아서 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나는 어느덧 ‘내가 이렇게 희생했는데 너희들은 대체 왜 그 모양인가’, ‘왜 스스로 활동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가?’라고 분노를 키웠던 것이다. 그러니 아주 작은 문제조차도 그런 마음 작용과 결합되면서 사태가 몇십 배로 증폭되곤 했다. 또 그런 식의 분노는 몸고 마음이 약해질 때 더더욱 기승을 부린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188쪽
명상의 출발은 정확히 ‘보는 것’이다. ‘보면 사라진다.’는 말도 있잖은가. 자의식의 뿌리를 볼 수 있으면 그것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뜻이리라. 오래된 습속, 자신에 대한 맹목적 집착을 벗어나지 않는 한 코뮌은 불가능하다. 욕망과 능력에 따라 자유롭게 활동하되, 코뮌적 리듬을 구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습속이 나로 하여금 그리로 가는 길을 막고 있는지를 명료하게 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그것을 돌파하는 출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이 여정에는 어떤 예외도 업다. 누구든 자신이 선 그 자리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돈 안토니오 할아버지의 말마따나, “투쟁은 둥근 원과 같다. 어디서든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결코 끝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의식, 그것은 코뮌의 가장 큰 적이다. 아니, 능동적 접속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넘어서야 할 문턱이다. -189쪽
우리 바로 자신인 이길, 이 길은 아주 유쾌하고 즐거운 길이군.
우리는 이 길을 좀더 나은 것으로 만들려고 걸어가고 있다.
우리가 바로 길이다.
다른 이들이 한 곳에서 다른 곳까지 걸을 수 있게 하는 길
모두에게는 그들 자신이 걷는 길이 있고, 그 길에는 처음과 끝이 있다.
우리 바로 자신이 이 길, 이 길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즉 우리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모두에게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우리가 바로 길이다. 하기에 우리는 쉬지 않고 계속 걸어야 한다.
-마르코스, 『마르코스와 안토니오 할아버지』
사람의 마음은 본래 저절로 즐겁다. 배움이란 이 즐거움을 배우는 것이다. 즐겁지 않다면 배움이 아니고, 배우지 않는다면 즐겁지도 않다. 즐거운 연후에야 배운 것이고, 배운 연후에야 즐거운 것이다. 즐거움이 배움이고 배움이 즐거움이다! 아아! 세상의 즐거움 중에 이 배움만한 것이 있는가? -王心齊
지식의 본래면목이 즐거움이라는 데 동의한다면, 자연히 가르침과 배움의 경계는 사라진다. 가르치는 것이 배우는 것이고, 배우는 것이 곧 다른 이들을 일깨우는 훌륭한 가르침이 되기 때문이다. 일단 배움의 즐거움에 동의하기만 하면 성별, 세대별, 학과별 경계들을 넘나드는 것을 그다지 힘든 일이 아니다. -207p쪽
강을 건너면 뗏목을 버려야 한다. 그래야 다시 길을 갈 수 있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경계로 나아가려면 익숙하고 낡은 것들을 가차없이 내려 놓아야 한다.
(...)비운다는 걸 그저 욕심을 버리는 정도로 이해해서는 곤란 하다. 비운다는 건 소극적으로 내면에 침잠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외부의 역동적 흐름 속에 자신을 아낌없이 던진다는 뜻이다. 따라서 자신에 대한 집착, 지나간 인연에 대한 집착에 사로잡혀 있는 한 유목은 불가능하다. 비울 수 있는 자만이 새로운 삶을 구성할 수 있다. -247쪽
대체 앎의 영역에서 스승과 제자가 어떻게 고정된 선으로 구획될 수 있을 것인가? 나이가 많다거나 학벌이 좋다거나 지력이 뛰어나다거나 하는 것은 그저 하나의 특이성일 뿐이다. 앎의 세계에는 종착점이 없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배우고, 쉬지 않고 가르치는 앎의 흐름만이 있을 뿐. 이런 관계에서는 교육의 주체가 아니라 오직 지식이 구성되고 전수되는 ‘벡터’만 작동하는 까닭에 학문외적 권위나 위계 따위는 설자리가 없다.
(...)지식 자체가 사람 사이의 친밀감을 높이는 중심요소가 될 때 비로소 ‘스승과 친구가 하나인 우정의 교육’이 가능한 법이다. 따라서 공간의 수평적 배치는 교사와 학생의 경계 뿐 아니라, 학습자들 상호간의 친화력을 상승시키는 데도 결정적인 기능을 한다.
강의건 세미나건 토론회건 항상 차와 간식을 준비하는 것도 그 점을 고려한 것이다. 함께 먹고 마시는 것보다 친화력을 키우는 일도 드물지 않은가. 그리고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아도 강의하는 사람도 힘들지만, 열심히 듣기 위해서도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 지식은 힘든 것을 참는 게 아니고, 기쁨을 증식하는 일이다.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실 수 있는, 가능한 한 신체적 자유를 누릴 수 있을 때, 지적 공명의 주파수는 더욱 상승될 수 있는 것이다. -206쪽
청년들이 금간판이나 내걸고 있는 지도자를 찾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차라리 벗을 찾아 단결하여, 이것이 바로 생존의 길이라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함께 나아가는 것이 나으리라. 그대들에게는 넘치는 활력이 있다. 밀림을 만나면 밀림을 개척하고, 광야를 만나면 광야를 개간하고, 사막을 만나면 사막에 우물을 파라. 이미 가시덤불로 막혀 있는 낡은 길을 찾아 무엇할 것이며, 너절한 스승을 찾아 무엇 할 것인가! -루쉰 「청년과 지도자」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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