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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호모 코레아니쿠스, 진중권, 웅진지식하우스, 2007 본문

책/밑줄긋기

호모 코레아니쿠스, 진중권, 웅진지식하우스, 2007

건방진방랑자 2019. 6. 12.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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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란?

 

보수성은 이론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대부분 이론의 반성 없이 습관으로 존재한다. 더 이상 있을 이유가 없는데도 그저 익숙하기 때문에 집요하게 존속하는 폭력들이 있다. 그것을 없애려면 우리 주위의 익숙한 모든 것들을 한 번쯤 낯설게 볼 필요가 있다. 한국인의 신체는 고통 받고 있다. 하지만 고통도 익숙해지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법. 적어도 한 번쯤 낯설게 보기를 통해 한국인의 신체가 어떤 고통을 당하는지 느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pp 14

 

 

출애굽기

 

Rural-exodus는 본질적으로 저곡가 정책으로 도저히 농촌에서는 먹고살 수 없게 한 정책의 결과였다. 해가 뜨고 지고, 달이 차고 기울고, 계절이 교차하는 자연의 리듬에 따라 살던 이들이 햇볕 안 드는 쪽방에서 자며 공장에서 18시간씩 일하는 일벌레로 바뀌는 과정이 마냥 평화로울 수는 없었다. 전태일의 분신은 그 과정의 잔인함을 증언한다. 어쨌든 이런 폭력적 과정을 통해 한국은 서구에서 수백 년이 걸린 산업화를 짧은 시간 안에 압축적으로 이루어냈다.

일본 우익은 자신들이 조선의 근대화를 도왔다고 말하고, 한국 우익이 박정희를 근대화 혁명가로 치켜세운다. 방식이야 어떻든 산업화 자체를 절대적 가치로 보는 이들에게는 당연한 발상이다. 이들에게 폭력적 근대화의 그림자에 대해 얘기해봤자 소용이 없다. 그들은 푸코를 들어 서구에서도 근대화는 어차피 감시와 처벌, 군대식 훈육의 결과였다고 할 테니까. 여기서 근대화자체를 비판하는 푸코의 논지는 한국적 근대화의 폭력성을 옹호하는 논리로 둔갑한다. -pp 24

 

 

기계화

 

Marshall Mcluhan에 따르면 미디어는 인간의 확장이다. TV는 눈의 연장, 라디오는 귀의 연장이며, 자동차는 다리의 연장이고, 크레인은 팔의 연장이라는 것이다. 이런 것을 흔히 미디어에 관한 의족 명제(Prothese-These)’라 한다. 미디어를 인간의 의족이나 의수로 바라보는 이 견해에는 아직 신체와 기계의 결합이 인간의 가능성을 그의 자연적 한계 너머로 넓혀준다는 근대의 낙관주의가 남아 있다.

Jean Baudrillard는 맥루언의 명제를 거꾸로 뒤집는다. 그에 따르면 외려 인간이 미디어의 확장이다. 그의 말대로 인간은 이미 미디어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점점 더 미디어의 에이전트가 되고 있다. 한마디로 인간의 신체가 외려 미디어의 가능성을 실현시켜주는 도구로 전락하는 것이다. 보드리야르의 탈근대적 시각은 맥루언의 근대주의와는 달리 신체와 인간의 결합을 비교적 비관적으로 전망한다. -pp 30

 

 

어떤 마라톤

 

근무 시간은 회사에 속하고, 퇴근 후의 시간은 가정에 속해야 한다. 하지만 취미를 인사에 반영하게 되면 이 벽이 무너지고, 근로자의 삶은 통째로 사장이 휘두르는 미시권력의 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자본주의적 관계는 어디까지나 노동력을 시간 단위로 사고파는 계약 위에 서 있으나, 이 경우 노동자는 사실상 노동력이 아니라 전인격을 판 셈. 그런 의미에서 이는 근대적노동계약이라기보다 신분 해방이나 노예 해방 이전의 상태에 더 가깝다.

물론 회사에서 숨진 그 직원에게 퇴근 후에 마라톤을 하라고 명시적으로 강요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숨진 그 직원도 자신의 마라톤 연습이 강요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것이라 믿었을지도 모른다. 자발적이면서도 강제적인 신체 만들기. 이는 한국 사회에 널리 퍼진 현상이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제 몸을 기업의 요구에 맞게 뜯어 고친다. 언뜻 자발적인 것으로 보이나, 존재미학은 실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강요한 생존미학일 뿐이다. -pp 41

 

 

이건희 회장의 고려대 명예철학박사 저지 사건에 대한 학생의 분노에 대해

 

나는 왜 사소한 것에만 분노하는가?” 어느 작가는 이렇게 물었다. 몰라서 묻는가? 거대한 것은 우리에게 분노할 자유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뭔가에 가로막힌 물이 제 갈 길을 찾아 우회하듯이, 분노의 흐름도 도전을 허용하지 않는 거대한 것을 피해 사소한 곳으로 흐를 수밖에. 학생들을 탓해서 무엇 하겠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피눈물을 맞고 처연히 서 있는 그들의 비루한 모습이 또한 우리의 모습인 것을.

 

 

속도전

 

버스의 작동을 인간의 생체 리듬에 맞추는 게 아니라, 인간 생체의 움직임을 버스의 속도에 맞춘다. 한국의 버스는 인간을 고려하지 않는다. 거꾸로 인간이 버스의 편의를 배려한다. 빨리 달리고 싶어 하는 버스를 위해 인간의 몸은 신속히 승차하고, 신속히 하차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지체할 경우 운전석에 앉은 인격화한 버스에게 종종 욕을 들어 먹는다. 이 때 다른 승객들도 내심 버스 편이다. -pp 62

 

 

시간의 강박

 

레스토랑에 앉아 있는 것은 노동이 아니라 여가에 속하는 활동이다.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실 때에 나는 협업의 집단적시간표에서 벗어나 나 자신만의 사적 시간을 즐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노동의 기계적 속도가 여가의 영토까지 정복했다. 여가 시간마저 노동의 집단적 시간표에 따라 조직된다. 이것은 우리의 문화가 삶을 위해 일하는 문화가 아니라 일을 위해 사는 문화임을 의미한다. -pp 64

 

 

속도의 외연과 내포

 

Paul Virilio에 따르면 발전이란 곧 속도의 증가, 즉 가속화의 과정이다. 그렇다면 우리보다 발달한 나라의 속도가 외려 우리보다 느려 보이는 이유는 뭘까? 간단하다. 거기서는 노동생산성의 향상이 양적으로가 아니라 질적으로, 말하자면 기술의 혁신과 장비의 현대화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몸이 빨빨거리는 것은 당장 눈에 보이지만, 두뇌의 회로 속에서 아이디어가 팽팽 돌아가는 것은 당연히 눈에 보이지 않는다.

바빌리오를 딸 속도를 두 종류로 구별하는 게 좋겠다. 하나는 신체가 정신없이 돌아가는 속도. 이를 외연적 속도라 부르기도 하자. 다른 하나는 발명, 발견, 개발, 디자인과 같은 창의성의 속도, 이를 내포적 속도라 부르자. 인간의 몸은 기계가 아니기에 신체를 가속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가속화의 특정한 단계에서 양적인 속도는 질적인 속도로, 외연적 속도는 내포적 속도로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발전이 내포적 속도로 이루어지는 사회에서는 신체의 동작은 굳이 빠를 필요가 없다. 그런 사회는 또한 내포적 가속화의 성과를 번잡한 생활의 외연적 속도를 떨어뜨리는 데에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로써 삶의 질을 높이려는 것이다. 서구 사회의 느림은 게으름도 아니고, 비효율도 아니고, 경쟁의 배제도 아니고, 역동성의 결여도 아니다. 그저 속도의 다른 차원일 뿐이다. 그리고 삶은 전쟁이 아니다. -pp 68

 

 

Homo economicus

 

<열정과 이해관계>에서 앨버트 허슈먼은 이해관계’(Interest)라고 답한다. 이해관계란 궁정에서는 정치적 이익을, 시장에서는 경제적 이익을 가리킨다. 여기서 모든 정념의 즉발적 표출을 단 하나의 정념, 즉 물질적 소유욕으로 억누르는 근대인의 전형이 탄생한다. 중세인이 질주하는 야생마라면, 근대인은 소유욕이라는 엔진에 계산능력이라는 핸들을 단 자동차다. 이렇게 미래의 이익을 위해 순간의 격정을 억누르고 냉정하게 계산하는 근대인. 그런 인간은 호모 에코노미쿠스라 부른다. -pp 101

 

 

신앙과 신뢰

 

내가 어렸을 때부터 많은 잘못된 견해들을 참된 것인 양 받아들였고, 그렇게 불안정한 원칙들을 근거로 해서 내가 쌓아올린 것이 불확실한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학문에서 어떤 확고부동한 것을 이룩하려고 한다면, 지금까지 믿어왔던 모든 견해를 벗어나 아주 기초부터 새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얼마 전부터 깨달았다. (<병법서설> )

확실한 지식성에 도달하기 위해 먼저 모든 것을 의심에 부치자.’ 이것이 그 유명한 방법적 회의(데카르트)’. -pp 105

 

 

어떤 의인법

 

고대 사회에서는 왕 또는 사제가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존재이거나 신의 화신이라고 여겨지고는 했다. 사람들은 왕이 자연의 운행을 어느 정도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악천후나 흉작 등의 재해는 왕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 그래서 가뭄, 기근, 역병, 폭풍우 등이 닥치면 그 재난이 왕의 태만이나 죄악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왕을 채찍질하거나 칼을 씌웠다. 그래도 잘못을 뉘우치지 않으면 왕위를 박탈하고 죽였다.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 <황금가지> )

왕이 자연의 운행을 지배한다고 생각한 것은 고대인들만이 아니다. 한국에 돌아와서 들은 것 중에서 제일 인상적인 것이 박정희 덕에 먹고산다는 어법. 미국에도, 독일에도, 프랑스에도, 일본에도 이런 어법은 없다. 자신이 먹고사는 것을 정치 지도자의 덕으로 돌리는 봉건적 어법이 존재하는 곳은 남한과 북한 뿐이다. 남한은 박정희 덕, 북한은 김일성 덕. 남들 다 제 덕에 먹고살 때, 남북의 인민들은 여전히 왕의 은덕으로 살아간다.

반면 잘 안 되는 일 역시 왕의 탓이다. 경제 사정에 관한 보수 언론의 보도를 보면 딱 인터넷에 떠도는 유머 수준이다. “명왕성이 태양계에서 퇴출하도록 노무현 정권은 뭘 하고 있었느냐?” 비정규직 확산, 한미 FTA 체결 등 이 정권의 주요 정책은 보수 야당이나 보수 언론에서 주장하는 것과 일치한다. 이른바 서민의 고통은 자기들이 주장하는 정책의 필연적 결과다. 그런데도 원인에 대한 과학적 분석은 없고, 그저 왕의 목을 치라는 아우성 뿐이다. -pp 159

 

사회적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하는데 익숙하지 않은 사회는 원인을 밝히기 전에 일단 범인부터 지목하려 한다. 여기서 무리한 뒤집어씌우기의 억울한 희생양들이 나온다. 이는 다시 비리를 저지르다 발각된 공직자들이 억울하다거나 음모가 있다고 변명을 할 빌미를 준다. 원인 파악이 제대로 안 되면 책임도 제대로 물을 수 없는 법. 한국 사회에선 요란한 성토로 시작한 일이 결국 책임 소재 하나 못 밝히고 흐지부지 끝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 어떤 일의 원인을 밝히는 것은 사실 머리가 아픈 일. “실업이 급증한 원인은 무엇이냐?”고 묻는 대신에 실업을 늘린 놈이 누구냐?”고 물을 때, 머리 아픈 과학은 재미있는 얘기가 된다. 원인의 분석을 생략한 채 잘되면 왕의 덕이요, 못되면 왕의 탓이라 말하는 어법은 여기서 비롯된다.

경제학을 이야기로 바꿔주는 이 의인법에는 놀라운 효용이 있어 사람들에게 제 인식의 피안에 있는 일을 해결할 능력을 쥐여준다. 비결은 간단하다. 즉 경제 위기를 왕의 탓으로 돌리면, 선거 때 왕의 목을 치고 다른 왕을 세움으로써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게다가 왕의 목을 치는 그날 우연히 그동안 안 오던 비가 내릴 수도 있잖은가. 현대의 어법으로 표현하면, 경기 사이클의 상승이 우연히 취임식과 맞아떨어질 수가 있다. -pp 161

 

 

주술과 기술

 

저발전의 사회는 당면한 문제에 대해 주술적으로 접근하고, 고발전의 사회는 기술적으로 접근한다. 주술적 사유는 부정을 타게 한 범인을 잡으려 하고, 기술적 사유는 사태의 원인을 찾아내려 한다. 한국 정치에 나타나는 강한 주술성은 다른 모든 미시 영역의 활동에서 드러나는 주술성의 요약에 불과하다. 한국 사회가 발전하려면 성원들이 주술성에서 벗어나 사회적 문제를 과학적으로 인식하여 합리적으로 해결하는 기술성에 도달해야 한다. -pp 162

 

 

시장의 공포

 

공포는 판단을 마비시킨다. 말도 못하는 아기들에게 원어민 선생을 데려다가 영어를 가르치고, 이제 겨우 두세 살 먹은 아기들에게 철학 수업을 받게 하는 광기는 공포에서 나온다. 공포는 인간을 잔혹하게 만든다. 유치원 다니는 아이에게 하루 종일 과외공부를 시키거나, 영어 발음을 좋게 한다고 아이의 부리를 잘라내는 잔혹극도 공포에서 나오는 것이다. 과거에 한국인의 심성을 지배하는 것이 전쟁의 공포였다면, 오늘날 한국인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시장의 공포다. -pp 181

 

원초적 폭력의 세계에서 생존하려면 모든 수를 써서라도 다수에 속해야 한다. 무슨 일에서든 유난히 쏠림현상이 심한 것은 실은 고립되는 것에 대한 공포감 때문이다. 다수 속에서 안전함을 느끼고, 소수 속에서 불안함을 느끼는 사회에서 혁신과 창안을 위한 용기는 설 자리를 잃는다. 이런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낡은 습관에 따라 행해진다. 이렇게 공포는 습관을 낳고, 이 두 가지가 짝을 이루어 한국인의 보수성을 구성한다.

생존의 공포는 개개인에게 동일성에 대한 열망을 낳고 결국 모두의 획일성으로 실현된다. 놀이의 기쁨은 차이에 대한 욕망에서 나와서 혁신과 창안으로 이어진다.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 창의성이 생기지 않는다. 한국에서 창의성의 결여는 두개골 용적의 한계가 아니라 신체 전체의 한계. 그것은 인식론적 현상이 아니라 이제까지 한국인이 살아온 역사를 반영하는 존재론적 현상이다. -pp 182

 

 

정서와 감정

 

<문자문화와 구술문화>에서 Walter J. ong은 구술문화에서 대화는 감정입적성격을 띤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한국에서 논쟁은 이성적이라기보다는 정서적이며, 판단은 논리적이라기보다는 감정이입적이다. 문자문화의 토론이 논문 발표 같다면, 구술문화의 토론은 장바닥의 몸싸움에 가깝다. 물론 옆에서 지켜보기에는 냉정한 학술대회보다 격정적인 몸싸움 쪽이 더 재미있을 것이다. 문자문화의 논쟁은 지루하나, 구술문화의 논쟁은 오락성이 강하며 구경꾼을 잡아끄는 경향이 있다. -pp 194

 

 

시뮬라크르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복제의 발전에는 단계가 있다. ‘복제는 실재의 반영이다. 복제는 실재를 변질시킨다. 복제는 실재의 부재를 감춘다. 복제는 실재와 관계를 갖지 않는다. 복제는 자신의 순수한 시뮬라크르다한마디로 복제는 처음엔 원본을 베끼다가 점차 독립된 삶을 살게 되고, 나중에는 아예 원본을 사라지게 하고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다는 얘기다. 이렇게 원본을 대신하는 복제, 원본 없는 복제, 원본보다 더 원본 같은 복제를 흔히 시뮬라크르라 부른다. -pp 239

 

 

한국 근대화의 성찰

 

한국 근대화는 일면적이었다. 신체를 기계화하는 군대화과정 속에서 근대의 또 다른 프로젝트가 무시된 것이다. 한국에서 존재의 개성화, 정신의 합리화는 미완의 근대화 프로젝트다. 또 산업화 과정에 수반된 무차별한 시장주의는 문화적, 생태적, 인간적 가치들을 간단히 계량화해 버렸다. 여기서 한국 사회의 황폐함이 비롯된다. 이 살풍경에 분위기를 주려면 가끔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치들도 있다는 것을 사회적으로 재확인하는 성찰성이 필요하다. -pp 290

 

 

너 자신을 design하라

 

철학자 니체는 존재의 상투성에 빠진 사람들을 향해 너 자신을 발명하라라고 외쳤다. 실제로 꿈이 생산이 되고, 삶이 예술이 되는 시대에 가까울수록 인간은 자기 자신을 늘 새로이 발명하는 존재의 디자이너가 될 것이다. 이 어법이 풍기는 낙관적 냄새에도 불구하고, 디지털 유미주의가 모든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 같지는 않다. 사실 니체의 격률은 아직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실천할 수 있는 엘리트주의 미학에 가깝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노동자들의 비정규직화와 아나운서들의 프리랜서선언은 얼마나 다른가. 소수의 사람들에게 노마드는 더 높은 가능성의 세계로 도약하는 것을 의미하나, 다수의 사람들에게 노마드는 아직 일할 나이에 직장에서 쫓겨나 노동사무소를 전전하거나, 퇴직금으로 창업을 해야 할 상황으로 내몰리는 것을 의미한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인간들은 자기 자신을 늘 새로 발명하도록, 새로 디자인하도록 요구받고 있다. 여기에는 어떤 잔인함이 있다.

특히 한국은 세계에서도 이런 변화가 가장 신속하고 극단적으로 일어나는 곳. 이곳에서 신체가 받는 중력의 하중은 다른 곳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하지만 신체는 권력의 생체공학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나, 동시에 어느 정도는 존재미학을 통해 제 스스로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잠재성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자신을 늘 새로이 디자인하는 신체는 최소한 강요된 유목에 따르는 고통을 적게 받을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유례가 없던 가능성의 세계로 들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pp 297

 

 

 

 

 

인용

목차

야매와 설국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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