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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춤추는 죽음 2, 진중권, 세종서적, 2005 본문

책/밑줄긋기

춤추는 죽음 2, 진중권, 세종서적, 2005

건방진방랑자 2019. 6. 12.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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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없는 죽음은 극히 드물다에서 고통스런 죽음은 극히 드물다. 이는 그동안 죽음의 이미지가 어떻게 변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과거 교회는 죽음에 육체적 고통의 흉측한 이미지를 덧붙임으로써 죽음의 공포를 팔아먹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백과사전은 이 교회의 프로파간다를 믿는 우매한 민중을 향해 계몽적인 어조로 외친다. “고통스런 죽음은 극히 드물다. ……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관습, 교육 혹은 편견 때문이다.” -pp 29

 

 

죽음과 악

 

과거 천 년이 넘는 세월동안 죽음은 인류가 지은 죄의 대가였다. 하지만 낭만주의 시대에 들어오면 사정이 달라진다. 사랑하는 너의 죽음을 죄의 값과 연결시키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랑하는 너의 죽음이 네가 지은 죄의 당연한 대가라니. 때문에 죽음과 죄를 잇는 인과의 끈은 이제 결정적으로 끊어진다. 그리고 이로써 천여 년이 넘도록 변하지 않았던 세 번째 변수에 마침내 변화가 닥친다.

중세의 시체들은 자신들이 지은 죄를 고백하기 위해서 냄새를 풍기며 썩어가야 했다. 하지만 너의 아름다운 주검이 악취를 풍기며 썩어 간다면? 이 때문에라도 죽음과 악의 연결고리는 끊어져야 했다. 사랑하는 너의 주검은 죽는 순간의 아름다움으로만 기억될 뿐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죽음의 묘사는 사랑하는 자가 마지막 불꽃처럼 아름다움을 발하며 죽어가는 순간에 집중되고, 이로써 중세 이후의 마카브로 전통은 역사 밖으로 퇴장한다.

 

 

죽음 다음의 세계

 

더 이상 죽음이 악과 관계가 없다면, 악인을 벌주는 지옥과도 관계가 없다. 이렇게 죽음과 악의 연관관계가 끊어지면서, 죽음 다음에 올 세계에 대한 관념도 변한다. 하긴 사랑하는 자가 유황냄새 나는 지옥에서 처참하게 고문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참을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내세의 의미에도 변화가 생긴다. 내세는 더 이상 선인이 상을 받거나 악인이 벌을 받는 곳이 아니다. 죽음 다음에 오는 세계는 죽음이 갈라놓았던 사람들이 언젠가 다시 만나는 곳, 사랑하는 자들의 완전한 결합의 장소가 된다. 그리하여 이 세계로 들어가는 죽음을 달콤한 것이 되고, 이 달콤한 죽음은 동경의 대상이 된다. -pp 32

 

(마녀사냥에 대해) 고야는 또 하나의 폭력, 즉 무지와 몽매에서 비롯된 야만적 행위를 그려내고 있다. 이 무지와 몽매의 폭력을 앞에서 본 이성의 폭력과 비교해보라. 그럼 그동안 인류가 얼마나 진화했는지 알 수 있다. 천진난만한 폭력에서 이성의 조직적인 폭력으로. 굳이 어느 쪽이 나은가를 말한다면, 후자가 전자보다 더 고약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 하면 어느 식인종 추장의 말대로, ‘먹지도 않을 거면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정말 나쁜 짓이기 때문이다. -pp 84

 

 

이성의 두 얼굴

 

계몽 시대의 이상은 밝은 ’, 즉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이었다. 인간들이 이렇게 자기도취에 빠져 있을 때, 고야만은 그 밝은 빛의 그림자를 볼 줄 알았다. 이성을 실현하기 위한 학살과 처형. 이성의 이름으로 사회에서 배제된 광인과 부랑인의 참상. 그렇다고 고야가 일방적인 이성비판자, 계몽비판자였던 건 아니다. 그의 이성과 무지가 저지른 폭력 또한 시야에서 놓치지 않았던 것 뿐이다. 배반자에게 폭력을 가하는 무지몽매한 민중들. 아무런 죄책감 없이 선교사를 요리해 먹는 야만인들. 시대의 변화와 문명의 발전 속에서도 변함없이 인간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이 어두운 힘. 이성의 빛이 닿지 못하는 아득한 심연. 계몽의 물결로도 씻어낼 수 없는 잔인한 핏빛 얼굴. 거인 사투르누스는 바로 이 인간 존재의 어두운 본질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pp 88

 

낭만주의자들은 죽음을 아름다움과 타협시켰다. 이 때 그들이 즐겨 이용했던 도구는 바로 온갖 미사여구로 가득 찬 시적 수사학이었다. 인류가 감성이 예민한 청소년기에 있었을 때, 그리하여 모든 일에 기꺼이 감동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시기에는 아름다운 수사학만으로도 죽음의 공포를 가라앉히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인류가 사춘기를 보내고 성인이 된 오늘날, 낭만주의적 수사학은 닳고 닳은 현대인에게 더 이상 감동을 주지 못한다. 잘 해야 촌스럽게 느껴질 뿐이다.

죽음에서 시를 제거하자. 시체는 다시 냄새를 풍기며 썩기 시작했다. 죽음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 그건 다시금 추한 것, 창피한 것이 되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 냄새나는 물건을 일상생활에서 떼어내어 병원에 가두어버렸다. 오늘날 죽음은 더 이상 예술의 대상이 아니다. 그저 임상의학의 대상일 뿐이다. 과거와는 달리, 우리들은 이제 연극의 주인공처럼 장렬하게 죽지 않는다. 차가운 벽으로 둘러싸인 병원에 갇혀 홀로, 또는 기껏해야 가족 몇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외롭게 죽어간다. -pp 209

 

과거 임종의 침상엔 항상 성직자가 있었고, 주위엔 공동체의 성원들이 둘러서 있었다. 하지만 그 많던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이제 환자는 혼자서 쓸쓸히 죽음을 맞고 있다. 환자와 의사와 죽음. 오늘날 임종의 장면은 이 삼각구도로 압축된다. -pp 233

 

엘리야스는 현대에 등장한 새로운 살인의 유형으로 나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라는 논리를 든다. 이 현대판 학살 메커니즘의 특징은 희생자는 있되 가해자는 없다는 것이다. 명령의 계통을 밟아 올라가 봤자 소용 없다. 결국 위에서 듣게 되는 소리는 그런 명령내린 적 없다는 것일 테니까. 내린 명령은 없는데 따를 명령이 있는 이 도깨비 같은 상황. 그렇다면 명령은 부재하는 동시에 존재하는 디페랑스(differance)! 이 디페랑스의 놀이 속에 인간이 저지른 학살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우연한 사고나 자연재해가 되어버린다. 재해는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찾아오게 마련이다. 그래서 고야의 작품은 유감스럽게도 영원한 사회성을 갖는다. 꼭 그래야만 할까? -pp 279

 

죽음의 공포는 임종시에 따르는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다. 죽음의 공포는 자기가 사회화 맺었던 관계, 혹은 다른 인간들과의 의사소통이 궁극적으로 단절되는 데에 대한 두려움이다.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산물이다. 죽음은 주체를 이루는 이 관계의 끈을 하나 하나 풀어내어 그것을 무로 되돌린다. 물론 여기엔 아픔이 따른다. 불교에서는 이를 我執이라 부른다. 세계를 구성하는 데미우르고스는 아집을 버리기 쉽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이고, 자신의 죽음은 곧 세계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세계가 없어진다면, 자신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할 근거도 사라진다. 실존적 공포의 정체는 바로 이 보편적 무의미 앞에서의 두려움이리라.

죽음의 공포를 이기는 유물론적 전략이 있다면, 아마 인간과 인간간의 연대, 세대와 세대 간의 연대에 있으리라. 삶이 있으려면 죽음이 있어야 한다. 앞서 살았던 사람들이 내게 세계를 물려주고 갔듯이 나 역시 언젠가 후세에게 이 세계를 넘겨주고 가야 한다. 그래야 인류는 새로 태어날 생명들과 함께 영원히 젊음을 유지하며 계속 살아갈 수 있다. 이 점을 인식하고 아집을 버릴 때, 나의 죽음은 비로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삶도 마찬가지다. 죽음의 의미든, 삶의 의미든, 그것은 오로지 인간과 인간의 관계, 세대와 세대의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pp 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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