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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폭력과 상스러움, 진중권, 푸른숲, 2002 본문

책/밑줄긋기

폭력과 상스러움, 진중권, 푸른숲, 2002

건방진방랑자 2019. 6. 12.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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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의 평화

 

집단과 하나가 되는 한에서만 개체는 안전하다. 그리하여 부조리한 실존들은 괴상한 집단주의 속에서만 구원을 찾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필사적으로 자기를 집단과 동일시하려 한다. 그 집단은 작게는 교실 안의 패거리, 크게는 국가와 민족일 수 있다. 집단과 동일시에 실패하는 자는 공동체의 성스러움을 지키기 위한 희생양이 된다. 그러다가 희생자가 사라지면? 문제 없다. 개별자들은 집단 속에서 기어이 또 하나의 모난놈을 찾아낼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또 하나의 희생양이 선택되면, 적어도 그가 존재하는 동안은 개별자들은 다시 안심하고 살아간다. 그리하여 전체 빼기 하나의 화해와 평화, 보편적 카오스에서 벗어나기 위한 마이너스 1’祭儀 -pp 21

 

 

一家心中(잇카신주)

 

<자살론>을 쓴 에밀 뒤르켐에 따르면 개인주의적 산업 사회엔 이기적 자살이 많고, 전근대적 집단주의 사회엔 이타적 자살이 많다고 한다. 가령 공동체의 짐이 되지 않게 노약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거나, 가솔이 죽은 주인의 뒤를 따르는 것, 아내가 죽은 남편의 뒤를 따르는 것 등은 전근대적인 이타적 자살의 대표적인 유형이다. 산업 사회라고 해서 이기적 자살만 있고, ‘이타적 자살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전근대성이 남아 있는 보수적인 사회에서는 여전히 이타적 자살이 존재한다. 가령 이웃 나라 일본에서는 언젠가 수상의 비리를 덮기 위해 수상의 운전기사가 죽음으로써 제 입을 막아버렸다. 일본에서는 이렇게 상사의 잘못을 덮기 위해 부하가 대신 자살하는 사건이 종종 일어난다. -pp 48

 

 

숭고한 개죽음

 

뒤르켐에 따르면 전근대 사회에서 이 이타적 자살은 실은 의무란다. 자결 안 하면 공동체가 유형, 무형의 보복을 가한다는거다. 조선시대에도 한 남자가 죽으면 가문의 명예를 위해 가문에서는 은근히 아내에게 따라 죽으라고 사주를 했다고 한다. 여기저기서 여자들이 남편을 위해 자결까지 하던 당시의 일본 사회. 거기서 저 혼자 자결하지 않고 뻔뻔하게(?) 살아남은 여자들은 아마도 정절이 없는 헤픈 여자 혹은 애국심이 없는 반국가분자 취급을 받았을 게다.

…… 종교와 예술은 가상을 만든다. 정상인은 가상과 현실의 차이를 안다. 하지만 정치가 예술이 되고, 에술이 유미주의가 미적 종교가 되고, 그 종교가 광신에 빠질 때, ‘가상현실의 경계는 흐려지고 착란이 시작된다. 이 착란이 정치성을 띠는 곳에서, 정치와 종교와 예술이 만나는 그 가상현실의 교차로에서, ‘번쩍미사마의 니폰도는 섬광을 뿜는다. , 정치의 예술화, 국가의 종교화, 애국적 情死, 그 아름답고 숭고한 개죽음. 이게 우익적 죽음이다. -pp 55

 

 

불과 칼

 

동경대 법대 출신 최고의 인텔리 미사마 유키오. 그리고 스스로 바보라 불렀던 평화시장의 노동자 전태일. 이 둘의 희생은 하이데거식 어법으로 말하면 진리를 세웠다. 즉 일본의 신우익운동의 부활과 한국의 변혁운동의 시작. 그럼 이 두 사람의 자살은 같은 종류일까? 현상적으로는 비슷해 보인다. 어쨌든 둘 다, 어떤 대의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 현상의 유사함 뒤로 본질의 상이함이 존재한다. 가령 미시마의 죽음은 어디까지나 국가 권력을 세우기 위한것이었다. 반면 전태일의 자살은 철저하게 거기에 반하는것이었다. 미시마의 할복은 국권을 위한 것이었다. 반면 전태일의 분신은 민권을 위한 것이었다. 미시마가 국가의 주권(=開戰權)을 회복하여 일본을 무장력을 갖춘 소위 정상국가로 되돌리려 했다면, 전태일은 그 죽음으로써 국가에 몰수당한 민중의 주권(=노동3)을 되찾으려 했다.

…… 모든 희생진리를 세우는 건 아니다. 어떤 이가 희생을 했다는 사실에서 그 희생이 대변하는 이념의 정당성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변태적 유미주의. 미적 형식주의의 극단일 뿐이다. 오직 인간으로부터 자립한 압제적 권력에 대항하는 희생, 허구적 이념과 주관적 드라마를 탈극화하여 현실로 돌아오는 냉철한 희생, 집단이나 이념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고 자기의 정체성을 주장하는 희생, 이런 희생만이 진리를 세울 수 있다. 전태일의 희생이 값진 건 그 때문이다. -pp 59

 

 

죽은 자를 심판하라

 

산 자들은 항상 죽은 자들에 의해 다스려진다. 이 거부할 수 없는 지배……일본이 과거를 반성하지 못하는 건 이 때문이다. 즉 산 자들이 야스쿠니 신사의 죽은 자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지배를 받고 있기에 과거사를 뉘우칠 수가 없는 것이다. 조상신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호국영령은 절대로 학살자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일본은 죽은 자들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는 것이다. “이 거부할 수 없는 지배……남 탓할 거 하나 없다. -pp 65

 

 

자유주의의 두 얼굴

 

흔히 자유=민주라 생각하나 실은 양자는 서로 대립하는 개념이다. ‘자유는 본질적으로 불평등을 함축한다. 예를 들어 시장에서 경쟁의 자유는 필연적으로 사회적 불평등을 낳게 된다. 그리하여 평등 없는 순수한 자유란 현실 속에선 결국 다리 밑에서 잠잘 자유를 의미하게 된다. 나아가 평등 없는 자유가 보수주의와 결합하여 정치적 자유마저 포기할 때 나치즘과 같은 또 하나의 멋진 신세계가 펼쳐진다. 한 편, ‘민주는 본질적으로 평등의 이념이다. 경제적 평등의 요구가 나아가 자유를 억누르며 관철될 때 공산주의라는 극단이 성립한다. 우리가 자유민주주의라고 자유와 민주를 붙여서 말할 때, 이는 위에서 말한 극단들을 피하기 위함이리라. 자유와 민주는 서로 보완해야 한다. 그리하여 이 두 요소가 다양한 형태로 결합하여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만들어내야 한다. -pp 97

 

 

애국적 공동체

 

군사독재자들은 자기들에게 결여된 정통성을 창출하기 위해 집권 초에는 늘 범죄 소탕이라는 정치 쇼를 벌이곤 한다. 이는 정변으로 위해 어지러운 공동체를 안정시키기 위한 일종의 희생양 제의라고 할 수 있다. 이 제의를 통해 독재자들은 자기들의 죄를 엉뚱한 사람들에게 뒤집어 씌우고, 그들이 흘릴 피를 통해 자기들의 죄를 깨끗이 씻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깡패들의 목에 팻말을 걸어 행진시키는 봉건적 돌림빵 제의요, 무고한 시민들을 군대식으로 고생시키는 삼청교육의 제의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이른바 비도덕적 분자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강제 수용소 구상이 나온다. 애국적 공동체에 동화되지 않는 불순분자들은 공동체의 물을 흐리지 않도록 따로 격리 수용해야 한다. 그 극단적 형태를, 우리는 국가적 목적에 동의하지 않는 이물질들의 처리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볼 수 있다. -pp 111

 

 

육체의 훈육

 

지나치게 급진적인 비판은 당장 가능한 개혁조차 우습게 보고, 그 결과 본의 아니게 현상 유지에 복무하는 결과를 낳을 수가 있다는 것. 가령 요즘 북유럽에서 각광 받는 체벌 방식이 있다. 범죄자를 감옥에 가두지 않고, 경찰이 추적할 수 있게 발목에 조그마한 발신기를 채워 제 집에서 살게 한다는 거다. 그리고 그가 움직일 수 있는 반경만 입력시켜 놓고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게만 감시한다는 것이다. 그럼 정상적 환경에서 사회 생활을 계획할 수 있어, 사회 적응이 빨라지고 재범률도 떨어진다나? 좋은 생각. , 이 제도를 어떻게 봐야 할까? 휴머니스트는 이를 진보라 부를 게다. 하긴 옥에 가두는 것보다야 인간적이지 않은가? 무정부주의자라면 여기서 인간을 다시 노동기계 속에 쑤셔넣는 권력의 사이버 통제 전략을 볼 게다. 하긴 발목에 채운 발신기가 끔찍하긴 하다.

무정부주의자들은 이런 사소한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체제순응적인 부르주아의 앞잡이라 부를 것이다. 반면 개혁론자들은 무정부주의자들을 목소리만 급진적일 뿐 당장 가능한 실천조차도 포기하여 결국 체제 유지에나 일조하는 결과적 보수주의로 볼 게다. 이게 바로 포스트모던의 문제다. , 어느 거 할래? 취향은 자유. -pp 143

 

 

신을 위한 원죄의식

 

국가에서 시민의 생명을 빼앗는다. 이를 어떤 논리로 정당화할 수 있을까? 먼저 자유의지론에 기초해 보복론을 펼 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을 보라. 사형수의 절반이 흑인이다. 흑인의 신체에 범죄의 유전자가 들어 있는 게 아니라면, 범죄의 책임은 사회에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왜 사회는 책임을지지 않고 책임을 물으려고만 하는가? 이어서 사형의 협박으로 범죄를 예방하겠다는 논법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효율적일지 모르겠다. ? 사형제도가 있는 나라에서 외려 강력범죄의 발생률이 높기 때문이다. 하긴, 국가도 죽이는데 시민이라고 왜 못 죽여. 그렇다면 재사회화론’? 좋은 생각이다. 하지만 죽은 자를 어떻게 사회로 돌려보내? 사회계약론? 그러니까 애초에 사회를 만들 때 성원들이 이러저러한 일을 할 경우 국가에서 목숨을 빼앗아도 된다고 합의를 했다. 따라서 사형은 정당하다? 글쎄, 생명을 어떻게 제약의 대상으로 삼아? 사실 사형제도는 매우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나 따지고 보면 그게 정당해야 할 이유는 별로 없어 보인다. -pp 147

 

 

우익이 무서워

 

레드 콤플렉스는 빨갱이에 대한 공포감이 아니다. 외려 빨갱이 갑는 극성스런 반공 투사들에 대한 공포에 가깝다. 말하자면 언제라도 빨갱이로 몰려 죽을 수도 있다는 막연한 두려움.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강박적으로 시도 때도 없이 반공주의적 언행을 하게 만드는 것이리라. 즉 타인을 향해 나는 빨갱이가 아니에요.”라고 고백을 시끄럽게 하는 방식. 그것도 타인에게 폭력을 가하는 공격적인 방식의 고백. 그것이 레드 콤플렉스다. 공포에 사로잡힌 인간은 사고의 유연성을 잃어버리고 도미노 속의 블록이 되어 연쇄 반응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하여 별 것 아닌 일이 결국은 핵분열과 같은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며 사회가 발칵 뒤집히게 되는 것이다.

…… 이 반공 깡패들의 행패를 보면서 시민들은 공포감을 갖게 된다. 이 공포감은 만인의 것, 마녀사냥에 쫓기는 사람만이 아니라 집단을 이루어 마녀를 사냥하는 사람들 역시 갖고 있는 것이다. 이 공포감은 분명 휴전선 너머의 북에 대한 공포감이 아니다. 늘 내 주변에 있어 언제라도 내게 해코지를 할 수 있는 반공 깡패들에 대한 두려움이다. 공포 정치는 계속된다. -pp 199

 

 

춤추는 반공

 

냉전을 구축하여 북을 주적으로 규정한 다음 성스런 반공 십자군 구축에 들어간다. 그 파트너 중의 하나가 일본 우익이다. 일본 우익은 한반도의 분단을 원한다. 그래서 이들은 한국의 우익 못잖게 일본 내에서 극성스런 반북 캠페인을 벌이곤 한다. 물론 거기에는 북한의 군사위협을 빌미로 재무장을 하려는 의도도 있다. 그리하여 반북, 반공의 전선에서 한국과 일본의 우익은 공동의 이해관계를 갖게 된다. 아울러 한국 우익의 원류가 친일파라는 것 역시 이들 간의 국제연대(?)의 튼튼한 정서적 토대를 이룬다.

한국 우익과 일본 우익에게 미국은 큰 형님. ‘친일파로 민족적 단죄를 피할 수 없었던 한국의 우익, 그리고 전범으로 역시 국제적 단죄를 받아야 했던 일본의 우익에게 미국의 반공 노선은 생명의 은인이었다. 가령 공화당의 당선을 제 집 경사처럼 환영하는 <조선일보>와 한나라당의 사대주의적 경향을 보라. 또 아시아 여러 나라에 그토록 무례하게 굴던 고이즈미 총리가 미국에 대해 취하는 한없이 비굴한 태도를 보라. 이 과도한 친미 경향 때문에 한국 우익은 우리의 이익과 미국의 국익이 다르다는 기초적 사실조차 종종 잊는다. 그리하여 미국인들보다 더 미국의 이익을 위해 설치는, 애쓰는, 이해할 수 없는 형태를 보이는 것이다.

한마디로 일본의 우익과 나란히 미국 공화당 극우파들이 주도하는 반공의 십자군에 가입하여 북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는 한편, 대북 강경책으로 남북의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고, 나아가 내부의 정치적 반대자를 연공혹은 용공으로 몰아 하나씩 제거해나가고 주기적으로 거국적인 마녀사냥의 카니발을 벌여 시민들에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이 공포 정치를 통해 아주 손쉽게 자기들의 기득권과 헤게모니를 유지해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 보수주의의 본질이다. 아주 간단하고 원시적인 메커니즘이다. 한국의 정치는 본질적으로 공포 정치, 대중의 본능적 공포를 자극하는 협박의 정치다. 그리고 이 공포 정치에 대중은 기꺼이 참여한다. ? “직접적으로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공격자와 동일시하는 것은 생존전략의 일환이다.”(홀거 하이데)

 

 

정체성으로서의 예비역

 

몸이 군대를 제대하는 데에는 2년이 좀 넘는 기간이 필요하지만, 정신까지 군대를 제대하는 데에는 그보다 오랜 세월이 걸린다. 특히 우리 사회처럼 개인이 쉽게 집단에 함몰되는 분위기에서 개인은 주체적으로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자기가 선택하지 않은 정체성을 자기 존재의 본질로 간주하는 사태가 벌어지곤 한다. 그 강요된 정체성 중의 하나가 바로 군대생활을 했다는 예비역이라는 것이다. 2년이 넘는 기간을 엄마 품을 떠나 살아보았다는 자부심, 고달팠던 생활에 대한 아프면서도 달콤한 향수, 군대생활을 해보지 못한 사람들, 특히 여성들에 대한 모종의 우월감이 함께 어우러져, 군대를 제대한 후에도 오랫동안 자신을 군인으로, 예비역군인으로 동일시하게 만든다. -pp 221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

 

이런 사회적(?) 필요(국가주의화 교육)보다 학생들 개개인의 교양, 인격적 발달과 같은 것을 더 강조하는 교육철학도 있다고 들었다. 좋은 일이다. 하지만 학생 개인의 교양을 앞세운다는 이 가상한 생각이 천박한 사회에서는 국가와 가정 양면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된다. 지배를 하는 국가 권력은 자기 재생산에만 관심이 있을 뿐 학생 개개인의 교양 수준에 별관심이 없는 반면, 지배를 받는 개개의 가정들을 권력의 위계 질서 속에서 자기 자녀가 교양이 있는 인격자가 되어 낙오하기보다는 교양이 없어도 출세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여기서 국가와 가정의 묘한 공모가 이루어진다.

누가 한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마르크스)가 아니랄까 봐 일제와 미국의 지배를 받아온 우리 사회의 이데올로기 역시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친일을 하다가 반공주의자로 돌변한 군사 독재자들의 일본제 국가주의, 이들 밑에서 아무 생각 없이 테크노크라트로 복무하며 개인적으로 출세했던 미국 유학파들의 천박한 미국제 자유주의’. 일본식 국가주의와 미국식 자유주의의 결합. 이것이 우리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이고, 우리 교육의 문제다 근본적으로 바로 이 권력 구성에서 비롯된다. 아이들에게 오직 출세하는 데 필요한 영어, 수학, 컴퓨터만 가르치려 드는 가정. 그리고 이런 아이들의 세계관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국가가 제공해주는 애국이라는 허위의식. 참교육은 이 두 가지 전선에서의 싸움이다. -pp 226

 

 

시민 길들이기

 

우리는 국가를 의식하지 못한다. 국가가 직접ㆍ간접적으로 행하는 감시와 통제는 어느새 우리 몸 속에 기입되어 자동화 메커니즘을 이룬다. 그리하여 우리는 국가가 행하는 간섭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그것이 마치 자기 스스로 알아서 자율적으로 행하는 자기규율이라고 착각한다. 외국에 나가기 전만 해도 주민등록증은 국민이면 누구나 갖고 다녀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또 그 을 얻기 위해 파출소에서 지문을 찍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에, 일본에서 재일동포들이 지문날인은 민족차별이라 반대한다는 게 매우 이상하게 돌리기까지 했다. 그 이상함이 우리에게 별로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마 강한 반일 감정 덕일게다. 국가의 간섭은 보이지 않는다. 국가는 투명인간이다. -pp 227

 

이 길들여진 근대인의 인성 구조를 엘리아스는 내면화합리화로 특징짓는다. ‘내면화란 한마디로 사회적 초자아를 내면화하는 것, 즉 과거의 외적ㆍ타율적 강제를 자기 안의 내적ㆍ자율적 강제로 바꾸어 놓는 기제를 의미한다. 한편 합리화란 정념을 극복하고 현실의 진행과정의 인과 관계를 냉정하게 따져보는 습속을 말하는데, 엘리아스에 따르면 그것은 먼저 격정적인 기사들의 전쟁이나 결투를 차가운 음모와 계략으로 바꾸어 놓았던 봉건 귀족 계급의 궁정적 합리성으로 출발하여, 시간이 흐르면 시민 계급의 등장과 함께 냉정하게 손익을 따지는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상인적 합리성으로 변모하게 된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합리주의 철학은 데카르트의 발명품이 아니라 사회에서 이루어진 문명화 과정의 이론적 반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시기의 철학자들이 정념론을 쓴 것 역시 이 인간 만들기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엘리야스의 문명화이론과 미셀푸코의 권력 비판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논리적 연관을 볼 수가 있다. 푸코의 사상이 전복적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이 내면화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이기 때문이다. 근대 철학은 의식 철학 혹은 반성철학이었다. 이렇게 내면성의 철학이라는 형태로 발달한 서구의 근대 철학은 외적 강제가 아닌 내적 규율에 의해 사유하고 행동하는 자율적 주체를 인간이라는 관념의 역사를 쓰기 위해 국가 권력이 현실 속에서 얼마나 인간들의 몸에 철저한 강제를 가했는지 충격적으로 보여준다. 관념의 자율성이라는 근대적 이상 이면에는 엄청난 물리적 폭력을 동원한 신체의 타율이라는 현실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푸코는 내면화라는 문명화 과정이 얼마나 야만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보여줌으로써, 근대 철학의 환상에 사로잡힌 우리의 존재 망각을 일깨워준다. 자율적 주체란 어떤 의미에서는 알아서 기는존재인지도 모른다. -pp 231

 

엘리야스의 분석 속에서 문명화 과정은 다분히 무질서에서 질서로 이행하는 평화적인 모습으로 묘사된다. 반면 푸코의 분석 속에서 그 과정은 아이들의 머리에 예법서를 주입하는 과정이 아니라 국가 폭력을 빌려 행사되는 거대한 생체 권력의 메커니즘으로 묘사된다. 엘리야스가 국가를 이해의 조정자로 보며 국가 자체의 정당성을 의문시하지 않는다면, 푸코의 분석에는 암암리에 국가 자체의 정당성에 대한 물음, 그것에 대한 급진적 비판이 내재되어 있다. -pp 232

 

시민을 길들이는 국가 권력을 주체화하면서도 그 비판의 준거에 대한 논리적 검토는 종종 생략되곤 한다. 이 경우 국가는 오로지 시민들을 감시하고 관리하고 강제하는 억압의 메커니즘으로만 표상되고,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으로는 탈주노마드와 같은 아르스 비벤디(생활양식)로 상정된다. 이는 사태를 너무나 단순화하는 것이다. 푸코의 무정부주의적인 비판은 권력의 감시를 느끼는 우리의 감수성을 민감하게 해주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실천적 방안을 찾는 상상력을 자극하지만, 거기에서 기계적으로 어떤 대안을 끌어낼 경우 종종 다분히 허구적인, 현실성 없는 얘기를 하게 되기 쉽다. 국가가 존속하는 것은 그 폭력적 근원의 계보학적 비밀이 여전히 베일에 가려 폭로되고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것이 여전히 현실 적합성으로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 권력에 대한 비판의 준거는 기술적ㆍ규범적 관점을 통합한 좀 더 섬세한 관점이 되어야 한다. -pp 233

 

 

패거리 의식

 

이 자화상(패거리 의식)을 지우려면 먼저 개인들이 지역ㆍ혈연ㆍ학연과 같은 마이크로 집단주의, ‘한국’, ‘한국인’, ‘한민족어쩌고 하는 매크로 집단주의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집단에 함몰되는 것은 봉건적 주체(?)의 특성이다. 근대적 주체가 되려면 먼저 쓸데 없이 자신을 원소로 포함시키려 달려드는 크고 작은 집단으로부터 자기를 지켜야 한다. 나아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허위의식을 벗고, 이 공허한 애국주의를 사회적 책임 및 사회적 연대의 의식으로 바꾸어야 한다. “해방된 개인의 자유로운 결사해방된 개인은 패거리 속의 노예들과는 달리 주인이 되어 제 정체성을 주체적으로 선택한다. 그런 개인은 제 개성과 주체성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사회적 책임감과 연대의식을 가질 수 있다.

이런 개인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가능하다. 다만 인간관계의 점성이 높은 우리 사회에서 그렇게 사는 게 좀 피곤할 뿐이다. 푸코의 말대로 권력은 정말 도처에 있다. -pp 251

 

 

혈통에서 시민적 연대로

 

민족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것은 최근, 그러니까 자급자족의 소규모 경제단위의 벽을 깨고 국민국가 단위에서 자본주의 시장이 형성되면서부터였다. 한마디로 민족주의는 자본주의 국민경제를 향해 사회를 통합하는 이데올로기로 등장한 것이다. 물론 제3세계의 경우는 좀 다르다. 여기에서는 민족이라는 집단을 이루어 무섭게 달려드는 서구 제국주의의 침탈에 대항하기 위해서 마치 거울에 비친 반영상처럼 자기를 민족으로 조직해야 했다. 우리는 민족이 되고 싶어 된 게 아니다. ‘민족이야말로 국산품이 아니라 대표적인 수입품이다. 일제 시대의 지식인들이 민족의식을 고취하느라 애썼다는 것은 그 이전에는 우리에게 민족의식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까. -pp 256

 

두 번의 세계 대전을 거친 후 서구에서 민족주의는 이제 퇴물이 되었다. 가령 누군가 민족주의자를 자처한다면 극우파로 보아도 좋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이 없어서 고생했던 구식민지 국가에서는 경우가 다르다. 여기에서 민족주의자란 말은 여전히 애국자를 의미한다. 물론 애국그 자체가 진리인 것은 아니다. 국가가 그릇된 길을 갈 때 열심히 애국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독립투사들을 기리는 것은 단지 그들이 애국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애국이 동시에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부합했기 때문이리라. ‘해방적 민족주의에 대해서도 같은 얘기를 할 수 있을게다. -pp 257

 

세계에서 민족주의 문제가 제일 복잡한 나라가 바로 한국이리라. 우리나라에서는 국가=민족의 등식이 간단히 성립하지 않는다. 국민 국가의 건설이 민족 반역자들에 의해 주도되었기 때문이다. ‘해방적 민족주의의 상징이 극우파들에게 암살 당한 뒤, 우리 사회에서는 사이비 우익들이 국가주의’(=통합적 민족주의)와 김구 후예들의 해방적 민족주의가 서로 대립해왔다. 가령 김구 선생을 깎아내리며 독재자 이승만을 국부로 추앙하는 <조선일보>의 행태를 생각해보라. 한국의 자칭 우익은 대단히 유감스럽지만 사이비다. 프랑스에는 항독 레지스탕스를 했던 드골이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진정한 우익이 사이비들에게 탄압을 받아왔고, 아직도 가증스런 역사 수정주의에 의해 이념적으로 능멸당하고 있다. (가령 이한우의 <이승만- 거대한 생애>) -pp 257

 

재미있는 것은 남북의 통합적 민족주의의 유사성이다. 김일성과 박정희의 주체사상은 본질적으로 국민들을 독재체제 아래 복종시키려는 고약한 통합적 민족주의. 그러나 남북의 독재자는 이를 애써 해방적 민족주의로 지칭한다. 가령 북의 주체사상은 조선 인민을 외세의 입김에서 해방시켜주는 조선식 사회주의이념이고, 남한의 그것은 자기를 닮을 것을 강요하는 미국과 서구 민주주의에 맞서 자주성을 세우려는 한국인들이 만들어낸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한다. 이렇게 해방적 민족주의의 껍질만 입히면 독재는 손쉽게 정당화된다. 이른바 주사파의 오류는 주체 사상을 해방적 민족주의로 착각해 주는 그 천진난만함에 있다. 대한민국의 우익들도 천진하기는 마찬가지다. -pp 259

 

 

해석의 싸움

 

역사란 일어난 일을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위해 과거의 기억을 조작하는 것. 우리 앞에는 70,80년대에 죽은 자들을 위협하는 또 하나의 커다란 싸움이 놓여 있다. 사회의 일각에서는 독재자의 신전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이렇게 역사의 기억은 그 건물의 재질인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인 물질성을 띤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현재를 위해, 자기 자손의 미래를 위해 자기들의 기억을 조직하려 한다. “적은 승리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 위험한 시기에 우리 역시 우리의 현재와 우리 후손의 미래를 위해 우리의 기억을 조직해야 한다. 피억압자의 전승을 수호해야 한다. 저들의 기억이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인 물질성을 띠는 것처럼 우리의 기억 역시 한갓 관념의 형태로 머물 수는 없다. 기억을 조직하는 것은 머릿속에서 관념적 현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머리 밖에서 유물론적 실천이 되어야 한다. -pp 283

 

 

정의와 힘

 

현실이란 물리적 힘들이 충돌하여 일으키는 다양한 사건의 연속이다. 개인적인 힘이든, 집단의 힘이든, 현실은 이 다양한 힘들이 시시각각 변화하면서 만들어내는 벡터로 볼 수 있다. 이 물질적 힘들이 담론이라는 관념의 영역으로 올라올 때에는 대개 보편이익의 외양을 띤다. 이 보편성 요구는 대개 허위의식에 불과하기에, 담론의 세계에서 논쟁은 대개 보편성의 가면 뒤에 숨은 특수이익을 들춰내는데 집중된다. 이것이 고전적인 이데올로기 비판의 방법이다. 말하자면 이런 종류의 투쟁에서 관건을 이루는 것은 상대의 논리 속에서 특수 이익과 보편 이익이 어긋나기 시작하는 지점을 정확히 지적하며 대중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들은 그 말로써 무엇을 원하는가?” -pp 288

 

 

별자리 진보

 

최근 시민들의 활동을 바라보며 나는 별자리를 생각한다. 암울하기 짝이 없는 우리의 깜깜한 사회. 거기에서 이름 없는 별들이 서로 연결되더니 별자리를 만들어 낸다. 까만 밤하늘에 갑자기 나타난 별자리. 나는 거기에서 미래의 희망을 본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인 결사체. 그것은 별자리를 닮았다. 별자리들은 그림이면서 그림이 아니라. 그래서 시민들의 연대는 총선이 끝나면 별자리를 해체하고 다시 별들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다가 문제가 생기면 따로 빛나던 별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또다시 새로이 별자리를 짜고, 그러다가 또 흩어지고……. 나는 우리 사회가 이런 식으로 발전했으면 좋겠다. 시민들이여, 어둠에 묻혀도 빛나기를 멈추지 말라. 세상의 어둠을 배경으로 외로이 빛나다 때로는 다른 별들과 합쳐 어두운 밤 하늘을 수놓는 별자리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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