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대중의 흐름
1. 주변화와 소수화 : 국가의 추방과 대중의 탈주
전체를 위한 일부의 희생
노무현 정부는 이들 국책사업에 막대한 ‘국익’이 달려 있다는 이유로 사업 추진을 정당화했다. ‘전체’를 위해 ‘일부’의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논리가 시종일관 따라다녔다. 그러나 이제 희생이 불가피한 그 ‘일부’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아졌다. 지역 개발을 위해 불가피하게 희생된 자연, 무역해야 먹고 살 수 있다는 나라에서 희생이 불가피한 농민,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위해 불가피하게 희생된 노동자(특히 비정규직과 이주노동자), 국가 안보를 위해 자기 안보를 희생해야 했던 대추리 주민들. 신자유주의가 본격화된 지난 십여 년간 대중들의 삶은 이 ‘불가피하다’는 희생 속에 존재하고 있다. ‘전체’를 위해 희생된 ‘일부’, 결과적으로 ‘전체’에 포함되지 못하는 ‘일부’. 그것이 한국 사회 대다수 ‘대중’의 형상이 되었다. -pp 23
화성간척 & 새만금
지난 십여 년간 두드러진 대중들의 추방은 자본주의 초창기에 대대적으로 일어났던 ‘공유지의 사유화’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가 경기도 화성에서 만난 어민에게 들은 이야기는 공공재의 사유화 매커니즘 속에서 대중들이 어떻게 추방되는지를 잘 보여 준다. 대부분의 어민들은 농민들과 달리 바다나 갯벌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 바다와 갯벌은 ‘公有水面(바다, 하천, 호수, 갯벌 등 공용으로 사용되는 국가 소유의 수면을 가리킨다)’이라고 해서 국가가 소유한다. 원래 ‘공유수면’ 개념의 취지는 ‘소유’보다는 ‘관리’ 쪽에 있었다. 즉 공적인 이용을 위해 국가가 바다나 하천을 ‘관리’하는 것이다. 그런데 공유수면을 간척하는 순간 국가는 관리자가 아닌 소유자로 나타난다.
…… 국가는 어민들에게 일정한 보상금을 지급했는데, 그것은 소유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용권에 대한 것이었으므로 그 액수가 미미했다. 국가가 일정액의 보상금을 내밀며 바다로부터 떠날 것을 요구했을 때, 우리가 만난 어민은 마치 자신이 국가 바깥에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우리는 우리가 국가에 빌붙어 먹었던 거지였음을 깨달았다. ‘바다와 갯벌은 너희 것이 아니라 국가의 것이다. 그동안 그렇게 먹고 살게 해주었으면 된 것 아닌가.’ 그러고는 시혜 차원에서 거주지 이전이나 직업전환 비용이라며 돈을 조금 던져 주었다. 그때 깨달았다. 아, 우리는 국가의 주인이라기보다는 국가에 빌붙어서 생계를 꾸렸던 거지였구나. 우리는 국민이 아니었구나.” -pp 29~30
대추리 & 2011 제주도 강정마을
공공부문의 사유화는 국가에 의한 사적 소유권의 발생이자, 소유권 없는 대중들에 대한 추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소유권을 발생시킬 수 있는 힘은 소유권을 박탈할 수 있는 힘이기도 하다. 가령 평택 대추리에서 이루어진 대중들의 추방은 소유권 박탈의 형식을 띠었다. 대추리 주민들의 토지는 국가에 의해 모두 강제수용되었다. 자본주의에서 모든 상품들은 그 소유자가 판매할 때만 구매될 수 있다. 그러나 국가는 팔지 않은 것을 살 수가 있다. 미군기지 건설을 위해 한국정부는 수십 년간 살아온 농민들의 땅, 나아가 그들의 공동체를 강제로 구매했다. 가격은 중앙토지수용위원회가 정했다. 토지는 소유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팔렸고, 강제매매가 이루어진 이후에도 그곳에 거주하며 저항하는 농민들은 범법자가 된다. -pp 31
소수자 선언
나는 대중들의 탈주 현상을 ‘주변화marginalization’와 대비해서 ‘소수화minoritization’라고 부르고자 한다. 주변화가 척도에 대한 부차화를 가리킨다면, 소수화는 척도로부터의 탈주를 가르킨다. 주변인으로서의 대중이 지배적 척도에 의해 인정받기를 꿈꾼다면, 소수자로서의 대중은 척도로부터 탈주한다. 그런데 최근 국가의 추방이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소수자 대중을 양산하고 있다. -pp 39
2. 불안시대의 삶과 정치
‘주변’의 정의와 전복 가능성
주변은 주권이 강하게 작동하는 영역, 주권이 그 한계를 정하는 영역이다. 우리는 척도적 권력이 중심에 있다는 생각을 해왔다. 권력의 동심원적 공간, 즉 중심에는 핵이 있고 주변으로 갈수록 권력이 옅어지는 그런 공간을 상상해 온 것이다. 하지만 정작 핵심은 중심에 있지 않고 내부에 있지도 않다. 그것은 내부를 규정하는 주변에 있다. 주변이야말로 어디까지 내부인지를 규정하는 척도가 가장 선명한 곳이다. 주변은 내부가 확장하다가 멈춘 곳이 아니다. 오히려 내부야말로 주변으로부터 안쪽 방향으로 자라난 상상의 공간일 뿐이다.
그런데 주변은 또한 역설의 지대이다. 이곳은 분명 주권의 명령이 가장 선명한 곳, 주권의 정체가 가장 잘 드러난 곳이지만 또한 주권의 한계가 드러나는 곳이기도 하다. 주권의 명령이 가장 선명한 곳은 주권의 명령이 더 이상 작동할 수 없는 영역, 즉 외부를 이웃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암시하듯, 주변은 항상 척도보다 많은 것을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살기 위해 주권에 매달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거기서 탈주할 가능성이 공존하는 곳이 세계의 주변이다. -pp 46~47
피아를 가르다
푸코의 근대 생명권력biopower에 대한 설명은 이와 관련된 하나의 유용한 시각을 제공한다. 국가 권력은 사실 오래전부터 자기 인구의 생사여탈을 결정해 왔다. 그런데 푸코에 따르면 고전주의 시기(17~18세기) 국가와 근대(19세기 이후) 국가가 생사여탈권을 행사하는 방식은 아주 다르다. 고전주의 시기에 국가가 가진 생사여탈권은 기본적으로 ‘살리는’ 권리가 아니라 ‘죽이는’ 권리였다. 푸코는 그것을 “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 두는 권리”라고 불렀다. 군주가 누군가를 죽이기로 결심했을 때 그 권리가 행사된다.
하지만 근대 권력은 기본적으로 인구를 살게 하는 데 관심을 갖는다. 인구의 건강과 복리를 증진시키는 것이 권력의 관심사다. 20세기초 복지국가의 권력은 확실히 그 쪽에 어떤 관심을 갖고 있다. 하지만 왜 인구를 잘 살게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진 생명권력 시대에 잔혹한 인종학살이 그토록 빈번히 일어났을까. 푸코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전체 인구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즉 개개의 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종[가령 국민]의 생명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살아야 하는 것과 죽어야 하는 것”을 가른다는 것이다. 나쁜 인종, 열등한 인종을 정리하는 것이 전체 건강을 위한 일이라는 것이다. 고전주의 시기와 달리 근대의 생사여탈권은 “살게 하고 죽게 내버려 두는 권리”이다. 근대 생명권력은 전체의 건강을 위해 “살아야 하는 자”와 “죽어야 하는 자”를 구별한다. 전체를 살게 하기 위해 누군가를 죽이거나, 최소한 죽도록 방치한다. -pp 55~56
추방되었음에도 극단적 보수자가 되는 이유
아렌트의 말처럼 나라를 잃은 난민들은 어느 나라에서든 충성심 높은 시민을 연기한다. 나치의 탄압을 피해 독일에서 프랑스로 넘어온 한 유대인이 프랑스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듯이. “우리는 독일에서 이제껏 훌륭한 독일인이었습니다. 이제 프랑스에 왔으니 훌륭한 프랑스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난민들은 “원리상 무엇에도, 그리고 누구에게도 적응한다.” 난민들이 어느 나라에서든 그 나라 시민보다 애국적인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그들이 그 나라에서 커다란 존재 불안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존재의 불안을 느끼는 대중은 기본적으로 정치적 보수주의를 견지한다. 그들은 자기 삶의 불확실성을 키우는 사태를 견딜 수 없어 한다. 내부 난민의 경우에도 이런 태도는 크게 다르지 않다. 주변으로 추방된 대중은 대개의 경우 살기 위해서라도, 자신을 내치는 국가와 자본에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대중은 ‘내치는데도’ 매달리며, ‘내치기 때문에도’ 매달린다. -pp 56~57
숭고란?
비르노는 칸트의 숭고에 대한 설명에서 이 의미(주변의 삶이란 한마디로 ‘안’에서 ‘바깥’을 체험하는 삶이다.)를 잘 포착했다. 숭고의 감정이란 산중 대피소에서 창 밖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눈사태를 볼 때 드는 감정이다. 즉 저 엄청난 힘 앞 에 ‘나는 정말 무력하다’고 느끼는 동시에 ‘나는 안전하다’고 느끼는 감정의 뒤섞임이 숭고다. -pp 57
버려진 자는 항의하지 못하고 비굴해진다
자기 나라 안에서 정부를 잃은 이들, 의견을 형성할 자격을 상실한 이들이다. 우리들 중 상당수는 국가와 자본에 의한 삶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더 처절하게 거기에 매달릴지 모른다. 무질서에 대한 불안, 근거 상실에 대한 불안은 국가 질서에 대한 더 강력한 지지를 불러오기 쉽고, 그런 불안은 가령 기업 복지나 보험과 같은 상품에 더 기대게 만들 것이다. pp 71
3. 혁명 앞에서의 머뭇거림 : 2008년 촛불시위의 발발과 전개
비폭력 직접 행동
실제로 비폭력 직접행동은 어떤 의미에서 경찰을 포함해서 타자에 대해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폭력 행동보다 훨씬 더 어려운 시위 형태이다. 비폭력 직접행동은 충돌을 회피하는 운동이 아니라, 어떤 폭력에도 굴하지 않으며 결코 물러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한국에서는 가령 중증장애인들의 이동권 투쟁이나 활동보조인 쟁취 투쟁에서 그런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 이들은 자기 몸을 철로에 묶기도 하고 버스에 묶기도 했다. 또 이들은 전동휠체어에서 내려 한강대교를 기어가기도 했고, 사다리에 몸을 묶고는 도로 한복판에 서기도 했다. 위험에 자기 몸을 기꺼이 내던지고, 자주 실신하면서도 이들은 결코 물러나지 않았다. 비폭력이면서도 매우 과격한 행동으로 이들은 한국 사회의 중증장애인들이 처해 있는 상황을 쟁점화했고 커다란 사회적 긴장을 형성했다. -pp 100
전쟁사회
정부 때문에 대중은 불안에 시달리고, 그런 대중의 존재가 두려워 정부는 치안을 강화하는 것. 이 기괴한 구도가 우리에게 닥치고 있다.
…… 뒤르켐 이후 사회학자들이 믿는 것처럼 자살자들의 개인적 죽음은 또한 사회적 죽음이다. 거기에는 개인적 사정만큼이나 사회적 사정이 있다. 그래서 자살자들은 어떤 의미에서 피살자들이기도 하다. -pp 109
2부 지식의 운명
1. 한국 사회에서 지식인의 죽음을 예감하다
지식기반사회에서 지식인
지식인의 죽음과 관련해서 내가 희극적 감정을 느끼는 때는 가령 이런 경우다. 지식기반사회로의 이행을 꿈꾸면서(!) 한국정부는 김대중 정권 때부터 매년 수십에서 수백에 이르는 ‘신지식인’을 선발하고 있다. 사실 지식기반사회에서의 ‘지식’은 이와사키 미노루岩崎稔가 잘 지적한 것처럼, “결코 인격적 도야를 수반하는 지식이라든지 우리 삶의 상과 관련된 인식들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비즈니스 재료로서의 지식에 불과하다.” 김대중 정부 이후 매년 발표되었던 ‘신지식인’의 이미지도 이와 다르지 않다. 정부가 밝힌 정의에 따르면, “신지식인이란 자기 분야에서 다양한 지식을 습득하고, 그것을 창의적으로 적용해서,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이것을 사회적으로 나누는 사람”이며, 특히 “생산력 향상 및 국가경쟁력 강화에 기여하는 사람”이다. -pp 114~115
지식의 현장성
지식인들에게 ‘현장성’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이 ‘운동’하지 않는다는 것, 그들 이론에 ‘실천성’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들은 ‘사건’에 참여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건’이 일어나는 곳에 없다. 이는 그들이 사회운동에 결합하지 않았다든지,, 그들 이론이 변혁운동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든지 하는 의미가 아니다. 푸코는 이론의 실천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지식’, ‘진리’, ‘의식’, ‘담론’의 영역에서 자신을 대상과 도구로 만드는 권력형태들에 대해 투쟁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론은 실천을 표현하지 않고, 해석하지 않고, 그 적용을 돕지도 않습니다. 이론은 실천입니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이 그것이다. 문제는 ‘실천을 위한 이론이었는가’ 혹은 ‘이론이 실천 되었는가’가 아니라, ‘이론이 실천인가’에 있다. 그들의 이론이 투쟁하고 있는가. 그들의 이론이 운동하고 있는가.
그래서 “지식인이 다시 현장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어느 교수의 말은 내게 이렇게 들렸다. “나는 내가 서 있는 곳에서 더 이상 싸우지 않으며, 내 이론은 더 이상 불온하지 않다.” “나는 더 이상 사건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
니체는 “대학의 사상가들은 왜 위험하지 않은지 아느냐”고 물었는데, 내 식으로 답하자면 그것은 ‘현장성’을 잃었기 때문이다. 부르디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이 던지는 질문들은 “긴급하기 때문이 아니라 해결의 즐거움을 위해 제기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어떤 문제가 ‘긴급하게 제기되었다’는 것은 그가 ‘현장’에 있음을 의미한다. 그가 느낀 ‘절박함’이 그의 ‘현장성’을 말해 준다. 그런데 한 해에도 수백 편씩 쏟아져 나오는 논문들, 그 곳에 들어 있는 수백 수천의 질문들은 과연 어떤가. 부르디외의 말처럼 그것은 혹시 ‘해결의 즐거움을 위해 제기된 질문들’이 아닌가. 국가의 공안기관도, 대중도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는 논문들. 오직 해당 전공 분야의 몇몇 학자들만이 문제와 답변의 ‘소소한’ 즐거움을 느끼는 그런 논문들이 아닌가. -pp 123~124
현장성의 상실은 달리 보면 지식인이 자기 해방의 과제를 상실한 것을 의미한다. 대중에 결합한 존재가 아니라, 자기 해방을 위해 싸우는 대중으로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는 데 실패했음을 보여 준다. -pp 125
일부 그룹은 지식인을 대중들로부터 분리시키고자 했고, 일부 그룹은 지식인임을 포기하고 대중들에게 뛰어들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누구도 지식인이 지식인인 채로 대중이 되는 것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지식인은 현장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것을 성찰하는 사색가도 아니고, 현장에서 쓸 사상적 무기를 제조하는 장인도 아니다. 그는 현장에서 자기 해방을 위해 싸우는 당사자여야 한다. -pp 126
2. 교도소에서 인문학을 한다는 것
최근 몇 년 동안 나는 아주 다른 두 청중 앞에서 인문학 강연을 해왔다. 한쪽은 내게 인문학 강의를 해달라고 부탁한 사람들이고, 다른 한쪽은 내가 인문학 강의를 하게 해달라고 부탁한 사람들이다. 나의 극히 주관적인 분류에 따르면, 전자는 정신적 즐거움을 얻기 위해 지식 상품으로서 인문학을 구매하는 사람들이고, 후자는 내가 보기에는 인문학을 하는 것이 절실한데 본인들은 정작 ‘인문학 따위’에 물질적ㆍ정신적 에너지를 쓰는 걸 아까워하는 사람들이다. 전자의 상당수는 삶의 물질적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지금이야말로 ‘정신의 양식’으로서 인문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후자의 상당수는 그 물질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인문학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면 인문학은 배고픔이 해결된 한가한 사람들의 소일거리처럼 보인다. pp 141
학자들은 종종 자기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조건들, 자기 사유에 내재해 있는 무의식적 성향들을 까맣게 잊어버리곤 한다. 학교라는 제도적 여가 속에 오래 머물면 삶의 절실함이나 긴박성이 사라져 버린다. 종종 학자들의 연구가 단순 호기심의 충족에 머무르는 것은 그 때문이다. pp 142
다른 삶을 살기 위한
인문학에 필요한 ‘여유’가 생계로부터의 분리를 지칭한다면 일반 민중들은 인문학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필요한 것은 ‘삶으로부터 여유’가 아니라 ‘삶 자체의 여유’이다. 한 삶에서 다른 삶으로 변화될 수 있는 잠재성, 한 삶이 가진 변이의 폭이 바로 그것이다. 인문학을 백번 해도 삶이 바뀌지 않는 사람은 부유한지 여부에 상관없이 삶의 여유, 삶의 잠재성이 없는 사람이다.
삶의 ‘절실함’도 마찬가지다. 그것 역시 생계에 대한 몰입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생계에 몰입한다고 해서 사회적 조건에 대해 더 잘 아는 것은 아니다. 삶의 절실함이나 긴급함은 무엇보다 현재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의 강렬함으로 이해되어야 하다. 그것들은 다른 삶에 대한 ‘무관심’이나 ‘시간 없음’이 아니라 다른 삶을 향한 강렬한 욕망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왜 우리가 여기서 인문학을 해야 하는가. 그것은 여유와, 절실함, 모두의 문제이다. 만약 당신이 다르게 살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거나 갖고 싶다면, 만약 당신이 지금과 다르게 살기를 간절히 바란다면, 당신은 인문학을 할 수 있고, 해야 한다. -pp 143
삶의 기술과 죽음의 기술
“여러분의 삶을 잘 가꾸고 있습니까?” 내 물음은 그렇게 시작됐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하는 짓은 한마디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다. 앞에서 떠들던 나도, 내 앞에 앉아 있던 재소자들도, 세상의 그 누구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니체는 “인간은 행복조차 배워야 하는 짐승”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최선을 다해 살려고 하는 짓이, 죽지 못해 안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왜인가. 철학은 여기서 자기 존재이유를 발견한다. -pp 144
철학은 어떤 삶의 기술을 갖고 있는가. 바로 ‘생각하기’이다. 철학자들은 ‘생각하는 삶’, ‘지혜로운 삶’을 좋은 삶이라고 본다. 문제가 되는 것은 ‘생각없음’ 내지 ‘생각할 수 없음’이다. 가령 아렌트는 유대인 학살 혐의로 재판정에 선 아이히만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악은 나쁜 생각에서가 아니라 생각없음에서 나온다.” 여기서 ‘생각없음’은 정신적 해이를 뜻하지 않는다. 독일의 정보부서 고위 관료였던 아이히만은 아주 신경을 써서 유대인 학살이라는 임무를 수행했다. 다만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
습관적으로 살아갈 때, 편견이나 통념에 빠져 있을 때, 어떤 강제적 명령 아래 있을 때, 우리는 어떤 입력된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기계와 다를 바 없다. ‘남들도 그렇게 사니까’,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그런 명령을 받았으니까’. 우리는 이 경우 아무리 정성을 다해 산다고 해도 ‘생각없이’ 사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한다’는 것은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할 수 없음’이란 ‘다르게 생각할 수 없음’이다. 또한 ‘생각한다’는 것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내가 가진 생각, 내가 빠져 있는 생각은 사회적 통념이나 편견, 관성과 다르지 않을 수 있다. ‘생각’은 ‘갖는’ 게 아니라 ‘낳는’ 것이다.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생각하며 산다’고 할 수 있다. -pp 145~146
생각하는 힘은 삶의 길을 선택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삶의 길을 창출하는 데 있다. -pp 146
다르게 생각할 수 없었다는 것, 다르게 행동할 수 없었다는 것은 법적ㆍ도덕적 규범을 어겼다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내가 제기하고 싶었던 것은 ‘위반’이 아니라 ‘빈곤’의 문제다. 왜 우리 삶은 이토록 빈곤한가. 왜 우리 삶은 이토록 협소한 선택지만을 갖고 있는가. 어느 화폐심리학자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신이 끙끙대는 문제의 90% 이상이 돈만 있으면 해결된다고 믿는다. 해결책은 ‘그것’ 뿐인데 ‘그것’을 얻을 방법이 없는 사람들. 그들 중 일부가 범죄의 기술을 익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삶의 기술, 삶의 해결책, 삶의 출구는 왜 그렇게 빈약한가. -pp 146~147
어리석음과 처벌
나는 최초의 인간 ‘아담’에 대한 스피노자의 해석을 빌려서, 아담의 ‘죄’와 ‘벌’은 그의 유치함 내지 어리석음이 지어낸 것이라고 말했다.(2번째 강의 시간에)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신의 말을 어겼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신이 아담에게 그 과일을 따먹지 않게 결정했다면, 신의 절대성이 훼손되지 않는 한 그것을 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 아담은 자신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숨어야 한다고 믿었다. 아니 숨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신은 정말 아담을 찾으러 다닌다. ‘아담아, 어디에 있느냐’ 그러나 신은 실제 아담이 있는 곳을 모를 리 없기에 찾으러 다닐 필요가 없다. 이 모든 것이 아담의 유치한 상상이다.
스피노자는 아담이 신의 뜻을 어긴 게 아니라고 했다. 아담은 제 몸에 해로운 과일을 먹어 탈이 났다. 신은 그것을 경고했으니, 아담은 신의 말을 어긴 게 아니라 증명한 것이다. 그런데도 아담은 엄마 말을 어기고 풋과일을 먹은 어린아이처럼 숨었고, 제 몸에 난 탈을 심판과 형벌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유치함, 이런 어리석음이 그의 죄이고 그가 갇힌 감옥이다. 아담은 ‘어리석음’과 ‘죄’를 통일시했고 자기 삶의 파괴를 ‘형벌’과 동일시했다. 그러나 ‘어리석음’은 행위 자체의 성격이지 심판을 통해 행위에 내려진 규정이 아니다. 어리석은 행위를 하는 그 순간, 우리는 그 누가 보지 않고 심판하지 않아도, 또 누가 형벌을 내리지 않아도, 삶의 파괴를 경험하게 된다. -pp 149
“지혜로운 자에게 그 지혜가 생명의 샘이며, 어리석은 자에게는 그 어리석음이 징계가 되느니라 (16:22)” 우리가 지혜로운 행동을 했다고 별도의 보상을 받지 않으며, 어리석은 행동을 했다고 별도의 처벌을 받지 않는다. 보상과 처벌이 있다면, 지혜로운 행동 그 자체가 보상이고, 어리석은 행동 그 자체가 처벌이다. 좋은 삶을 살면 천국에 가고, 나쁜 삶을 살면 지옥에 가는 것도 아니다. 좋은 삶은 그 자체로 천국이고, 나쁜 삶은 그 자체로 지옥이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좋은 삶을 꾸려나갈 것인가에 있다. -pp 149
교정한다는 것과 공부한다는 것
우리가 ‘생각을 하는 것’,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에게 ‘생각이 일어나는 것’은 바로 그때이다. 사유하지 않을 때 우리 정신은 자동기계처럼 움직인다. ‘여성? 집안일이나 잘 하시지!’ ‘동성애자? 이 변태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생각하는 게 아니다. 우리 시대의 인종주의나 성차별의식이 우리 안에서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외부에서 낯선 것이 안으로 뚫고 들어올 때 우리는 비로소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과거의 생각, 과거의 삶에서 낯설어질 때, 그때 우리는 뭔가를 깨닫는다. 그것이 공부다. -pp 151~152
어느 강연이 더 좋았다고 쉽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내 생각에 철학자가 교도소에서 어떤 지위를 갖는다면, 그것은 ‘교정자’로서가 아니라 ‘공부하게 하는 자’로서이다. 철학자는 ‘가르치는 자’라기보다 ‘배우게 하는 자’에 가깝다. 철학자는 남의 인생을 대신 공부해서 알려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단지 삶이 ‘끊임없는 공부’라는 사실을 일깨울 뿐이며, 누군가에 ‘생각하도록’, ‘깨닫도록’, ‘공부하도록’, 때로는 유혹하고 때로는 매섭게 공격하는 사람일 뿐이다(어쩌면 우리는 우리를 생각하게 하는 모든 것, 우리를 공부하게 하는 모든 것을 ‘철학자’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니체는 디오게네스의 말을 따라서 “누구 하나 아프게 하지 않고 어떻게 위대한 철학을 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는데, 나 같으면 문장의 앞뒤를 바꾸어 썼을 것 같다. 즉 “위대한 철학은 우리를 아프게 한다.” -pp 153
교도소는 대학이 될 수 있을까
교정의 현실적 목표는 ‘재범죄율’을 낮추는 것이다. 이에 대한 해결책이 확고한 법질서 의식과 선한 도덕 감정의 주입이라고 믿는다면 교도소는 결코 대학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범죄의 기술이 삶의 기술의 부족에서 오는 것임을 인정한다면, 즉 삶을 풍요롭게 가꿀 수 있는 기술의 부족이 범죄의 기술을 낳았다고 생각한다면, 인문학은 교정의 현실적 목표에 상당히 부합할 수 있다.
교도소와 마찬가지로 대학의 개념도 변해야 한다. 특정한 캠퍼스 안에서 일정액의 돈을 납부하고 일정한 지적 자격을 갖춘 사람들끼리, 게다가 현실에서 격리된 채로 학문 활동이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더 이상 대학을 ‘배움’의 장소라 부를 수 없을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배움에 필요한 ‘여유’는 삶으로부터의 격리가 아니라 삶 자체의 잠재성, 다른 삶을 낳는 데 필요한 잠재성이고, 배움에 필요한 ‘절실함’은 삶 자체의 강렬함, 다른 삶을 향한 욕망의 강렬함이다. 배움은 삶의 잠재성과 욕망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능하다. -pp 154~155
3. ‘앎’은 ‘삶’을 구원할 수 있는가 : 인문학자와 ‘현장’
‘현장’으로의 초대
‘현장인문학’은 ‘앎에 대한 신뢰’, 조금 더 좁혀 말하면 ‘인문학에 대한 신뢰’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문학이 우리를 넓은 의미의 ‘가난’으로부터 구원해 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또한 우리는 가난한 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게 인문학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pp 157
「희망의 인문학」에서 쇼리스는 가난한 자들이 ‘포위망에 걸려든 사냥감’처럼 극도의 무력감에 빠져 있으며 철저하게 고립되어 있다고 말한다. 앞서 사카이 다카시의 표현을 빌리자면 극도의 ‘관계적 결핍’에 시달리고 있는 셈이다. 쇼리스는 가난한 이들이 사적 고립에서 벗어나, 그리스인들이 ‘정치적 삶’이라고 부른, ‘공적인 영역에서의 행동하는 삶’을 살 수 있을 때 가난이 극복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정치적 삶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길이라면, 인문학은 성찰적 사고와 정치적 삶에 입문하는 입구이다.” -pp 158
인문학자는 가난한 이들에게 구원의 선물을 나눠주는 산타클로스도 아니고 그렇게 행동해서도 안 된다. 그의 삶이 그의 삶으로 증명되지 못한다면, 그의 말이 그의 행동으로 표현되지 못한다면, 인문학자는 ‘앎을 통해 삶을 바꾼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서구에서 ‘professer’라는 말의 라틴어 어원은 무언가를 ‘말하다’, ‘선언하다’, ‘고백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교수한다’는 것은 단지 어떤 사실을 확인하는 말이 아니라, 행동을 인도하고 야기하는 말, 즉 선언이나 고백처럼 수행적인 말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수로서 배움의 장에서 말하는 자는 ‘말한 대로 살아야 하고’[그런 선언이고], 그 전에 ‘살아온 대로 말해야 한다’[그런 고백이다]
인문학자의 경우에도 ‘앎을 추구하는’것은 ‘삶을 추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인문학자는 결코 ‘완성된 앎’을 갖고 ‘미완의 삶’에 다가가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앎을 생산하는 방식으로 삶을 생산하며, 삶의 과제를 앎의 과제로 떠안은 사람이다. 따라서 앎에 대한 인문학자의 열망은 삶에 대한 열망 자체이며, 그 열망의 강도나 절박함은 ‘현장인문학’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현장인문학’은 인문학자 자신에게도 ‘현장’이다. -pp 160~161
배움이 없는 교육자
‘현장인문학’이 갖는 의미를 스스로에게 묻는 인문학자가 많지 않다는 것은 단지 기간과 참여 횟수의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현장인문학’을 바라보는 인문학자의 시각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인문학자들이 느낀 ‘좋은 경험’은 대체로 피교육자에게 나타나는 변화를 보고 느끼는 교육자의 보람에 가까운 것 같다. 정작 자기 자신의 변화, 자기 자신의 배움을 자세히 언급하는 인문학자들은 드물다.
인문학자의 자기 배움, 자기 구원에 대한 무심함은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쇼리스는 ‘클레멘트코스(The clemente course in the Humanities)’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그 과정에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참여했지만, 책에서 그는 가난한 ‘그들’에게 일어난 변화만을 적고 있다. 즉 그의 책은 타자의 구원에 대한 관심은 가득하지만 인문학자로서 자기 구원에 대한 관심은 보이지 않는다. -pp 161~162
하지만 누가 누구를 주체로 만드는가. 인문학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그렇다면 가난한 자들은 ‘주체화 프로젝트’의 ‘대상’에 머무르는 건 아닐까. 왜 ‘주체화’가 ‘대상화’의 느낌을 주는 것일까. 그것은 인문학과 가난한 자들의 결합이 잘못된 시도이거나, 거기서 일어날 구원에 대한 믿음이 잘못되어서가 아닐 것이다. 바로 인문학자들의 자기해방에 대한 관심이 결합되지 않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가르침을 전적으로 교사의 몫이고 배움이 전적으로 학생의 몫일 때, 교육은 ‘지배자-교사’의 가치를 ‘피지배자-학생’에게 주입하는 일 이상이 되지 못한다. -pp 163
“만약 당신이 나를 도우러 여기에 오셨다면 당신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가 당신의 해방이 나의 해방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함께 일해봅시다.” 멕시코 치아파스 원주민 여성이 했다는 이 말은 ‘현장 인문학’ 프로그램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문장을 한 번 바꾸어 보자. “만약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가 우리를 가르치러 온 것이라면 당신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가 당신의 배움이 우리의 배움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함께 공부해 봅시다.” -pp 164
“사건 속에 객관적인 관찰자란 없다.”(최진석, 「교뮨주의와 타자」) 인문학자가 현장에 참여하고 있다면 그는 관찰자로 떨어져 있을 수가 없으며, 관찰자에 머무는 한에서는 현장에 참여한 게 아니다. ‘교수 행위’를 하는 인문학자는 ‘배움의 공동체’의 일원이며, 그의 교수 행위 역시 자기 배움의 방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누군가의 해방에 관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자기 해방을 구하는 과정에서 이며, 누군가를 교육할 수 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스스로의 배움을 통해서이다. -pp 165
이명원은 「교도소로 부치지 못한 편지」를 이렇게 맺고 있다. “어쩌면 나는 한 편의 시를 강의하면서도, 갇혀 있는 그들의 외적 환경에 대해서는 자못 섬세하게 의식한 것처럼 보이지만, 나 자신의 ‘마음의 감옥’에는 둔감했던 것인지 모른다. 나는 강의를 하면서 이 더 큰 ‘마음의 감옥’에서 희망하는 법을 배운 것처럼 느껴졌다. 큰 깨달음이었다.” -pp 165
앎이 삶을 바꿀 수 있는가
현장인문학의 수강생들은 대학의 수강생들과 지식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조금 다른 것 같다. 대학에서 강연을 하면 수강생들은 대체로 자기가 알고 있는 학자의 말이나 책을 떠올린다. ‘저 말은 누구의 견해와 비슷하군.’ 혹은 ‘저 개념은 누구의 개념과는 아주 상반되는군.’ 그런 식이다. 즉 아카데미의 사람들은 하나의 지식을 다른 지식을 참조함으로써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현장인문학에서 만난 ‘가난한 사람들’은 지식을 받아들임에 있어 자신의 삶을 참조하는 것 같다. 물론 이것은 이 사람들 대부분이 학력이 낮다는 데서 일부 연유하는 특징일 것이다. 그러나 앎이 다른 앎을 참조하지 않고, 곧바로 삶을 참조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pp 166~167
더 흥미로운 점은 앎이 삶을 참조하고 있기 때문에, 그 배움이 곧바로 삶의 변화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언제부턴가 머리를 단정하게 자르고 온다든지, 옷매무새를 다듬는다든지, 말투를 고친다든지 하는 식의 변화가 나타난다. 공부가 그런 신체적 변화로 표현되는 것이다. 아카데미에서 강의를 했을 때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일들이다. 내가 목격한 사례와 비슷한 것을 어느 노숙인의 글에서 발견했다. “사회가 관심을 보이자 학생들은 몸가짐에서 행동까지 변화하기 시작했다. 의복의 세탁, 두발, 거친 말투 고치기, 삶의 의미 등 많은 변화가 서서히 몰려왔다.”(박진철, 「인문학과 삶의 의미」) -pp 167~168
여기서 ‘앎’과 ‘삶’은 분리되어 있다. 이 분리 탓에 오늘날 지식인들은 ‘알고도 행하지 않을 수 있는’ 혜택[혹은 불행]을 누리고 있다. 대학에서 교수는 자신이 살아온 것과 무관한 앎을 학생에게 전하고, 자신이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을 ‘올바른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삶과 분리된 앎의 정보의 형태로 상품처럼 가공되고 판매되기도 한다. 돈을 받고 앎을 품고, 돈을 내고 앎을 얻는, 한마디로 삶의 소통 없이 앎을 거래하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해졌다. -pp 168
앎의 냉소주의와 대학
‘앎’과 ‘삶’이 분리된 곳에서만 ‘알지만 행하지 않는’ 냉소주의가 가능하다. 그러나 고대 견유주의는 ‘삶’으로 구체화되지 않는 ‘앎’에 코웃음을 쳤다.
견유주의자들, 가령 디오게네스는 누군가를 말로써 반박하지 않았다. 그는 직접 공격했다. 현대 냉소주의자들은 제아무리 신랄해도 그다지 큰 공격력을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은 단지 말의 비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대의 견유주의자인 디오게네스의 행동은 유머스러울 때조차 매우 공격적이었다. 그는 플라톤이 고상한 에로스에 대해 말할 때 그 앞에서 자위행위를 했고, 영혼을 말할 때 숨을 쉬는 코를 후볐다. 플라톤이 ‘인간을 두 발로 걷는 깃털 없는 동물’이라고 말할 때, 닭 한 마리를 잡아 깃털을 뽑고는 ‘플라톤의 인간이다’라는 말과 함께 플라톤 학파에 보냈다. 그의 ‘평민적 뻔뻔함’에 지배자들은 자주 감정적 억제력을 상실했다.
고상한 이데아를 잣대로 현실을 교정하려는 ‘고상한 이론가’에 맞서, 디오게네스는 겉보기에 가난하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결핍되지 않은 삶의 유머-이 유머야말로 길거리에서 잠을 자던 디오게네스의 삶이 얼마나 부유했는가를 보여 주는 징표다-를 던졌다. 그가 개처럼 누군가를 물 때, 몸을 파는 여성들과 즐겁게 대화를 나눌 때, 막대한 권력과 부를 가진 알렉산더 대왕 앞에서 뻔뻔하게 고개를 쳐들 때, 그는 ‘입’이 아니라 ‘몸’으로 자기 앎을 주장했던 것이다. 슬로터다이크의 표현을 빌리면 “이상주의[관념론]를 반박한 것은 그의 말이 아니라 삶이었다” -pp 169~170
처음에 성 프란체스코나 성 도밍고가 ‘탁발’에 대해서 말했을 때, 그들은 손수 노동이 불가피한 경우 구걸이라도 하라고 했다. 여기에는 교단의 세속적 음모나 정치권력의 간섭에서 벗어나 배움에 필요한 독립성을 얻으려는 의지가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탁발 수도회들은 일하지 않는 앎의 공동체를 꿈꾸었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교황과 재력가들의 후원을 바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기 힘으로 살아야 한다고 믿는 지식인들과, 지식인의 일은 일반 대중의 일과 다르다고 생각한 지식인들의 갈등이 후기 중세로 갈수록 강해졌다. 스콜라 학문이 노동을 천시한 것을 두고 르 고프는 지식인운동과 관련해 볼 때 중대한 과오라고 지적한다. “그것은 지식인의 일을 특별한 것으로 고립시킴으로써 대학의 기초를 약화시키고, 도시 일터에서 지식인과 다른 노동자들의 연대를 끊는 데 스스로 동의한 셈이기 떄문이다.”
대학인들, 특히 교수들은 점차 귀족이 되어 갔다. 교수직은 세습되기 일쑤였고, 의복이나 표장들은 귀족적 상징으로 변했고, 교단은 높고 웅대하게 올라갔으며, 금반지와 교수모는 직능의 표장이 아니라 위엄의 표장이 되었다. 마침내 중세가 저물고 15세기 인문주의가 득세했을 때, 그나마 희미하게 남아 잇던 만인에게 열려 있던 지적 작업장, 삶과 앎이 결합해 있던 배움의 공동체는 사라져 버렸다. 그 대신에 폐쇄된 아카데미아로서 대학이 최고의 교육기관이 되었다. 청중이 쇄도하는 가운데에서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중세의 교수는 점차 자기 서재에서 사색에 잠긴 인문학자의 모습으로, 그리고 어디서든 둘러앉아 앎을 논하던 현장으로서의 중세의 대학은 ‘소음’과 ‘먼지’가 없는 곳에 설립된 근대의 대학으로 변하고 말았다. -pp 170~172
인문학자의 감옥과 배움의 사건
다소 가혹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아카데미에서 이루어지는 강의를 그대로 현장인문학에 옮기려는 시도는 배격되어야 한다. 설령 그 강의 내용이 똑같다 하더라도, 전달되는 앎에 대한 태도, 배움이 일어나는 과정에 대한 접근은 아주 달라야 한다. 현장의 인문학자는 정보의 전달자 이상이어야 한다. 무엇보다 그가 전달하는 것이 정보에 그쳐서는 안 된다. 그는 자기 행동, 자기 삶에 규정력을 갖는 말을 하도록 노력해야 하며, 그런 말을 현장에 있는 사람들, 그와 배움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선언해야 한다.
여기서 인문학자가 자기 해방의 싸움을 벌이는 것이 중요하다. 현장인문학은 결코 가난한 자들을 ‘훌륭한 시민’으로 만드는 교정이나 재활 프로그램이 아니다. 재소자들에게 법 준수의 필요성을 설득하고, 노숙인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성매매여성들에게 고상한 설교를 늘어놓기 이전에, 인문학자는 우리의 집과 법, 도덕, 정상성을 의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는 ‘인간됨’을 가르침으로써 현장에 서는 것이 아니라, ‘인간됨’ 자체를 문제화problematique함으로써 현장에 서는 것이다. -pp 173
2001년 장애인의 날에 ‘전국에바다대학생연대회의’ 학생들은 시민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유인물을 나누어 주었다. “인간승리……동정…… 해마다 이날이 되면 대중매체들은 하나같이 특집을 내보낸다. 그것은 대부분 아름다운 미담들이다. 자신의 장애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성공을 거둔 ‘인간 승리자’를 칭찬하거나, 어렵게 살고 있는 장애인들을 찾아내어 ‘우리 이웃’이라며 동정심을 유발한다. …… 그래서 [모두가] 장애는 ‘극복’되어야 하는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장애는 [정말] 극복되어야 하는 것일까?” 나는 이 유인물에서 자기긍정을 통한 해방의 가능성을 읽었다. 이들은 극복되어야 하는 것은 장애인이 아니라, 장애인 스스로를 결핍된 존재로 상상하게 만드는 ‘정상인’ 이미지 자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우리가 극복해야 하는 것은 ‘장애’가 아니라 ‘정상성’이라는 것, 우리는 우리 시대의 지각구조, 우리 시대의 공통감각을 문제 삼아야 하는 것, 여기서 나는 인문학자의 자기 해방 과제가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철학자들은 우리가 ‘현장인문학’을 통해 만나는 사람들, 즉 재소자나 노숙인, 여성, 어린이, 장애인 등을 결핍과 미숙의 존재로 이해해 왔다. 사슬에 묶인 죄수는 고집 센 무지를 상징했고, 여성과 어린이, 외국인, 환자 등은 이성을 사용할 자기 관리를 갖지 못한 자, 따라서 후견인에 판단을 의존해야 하는 자들로 불렸다. 한마디로 이들은 오류와 미숙이 여러 양상으로 구현된 신체들이었다. 인문학자가 이런 익숙한 편견에 빠져 자기 감각과 구조를 문제 삼지 않는다면, 그는 십중팔구 자기 병은 모르는 채 박애주의자를 자처하는 돌팔이 의사가 되고 말 것이다.
죄, 유치함, 광기, 부도덕, 이것들은 인문학자들이 ‘인간됨’에 대해 말할 때, 그리고 철학자들이 진리에 대한 믿음을 얻고자 했을 때 즐겨 이용했던 ‘부정적인 것’들이다. 오류들은 진리됨에 실패하는 식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라는 게 있다고 믿게 한다. 마찬가지로 재소자들, 어린아이들, 광인들은 ‘인간됨’에 실패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마치 ‘인간됨’이라는 것이 원래 존재하고 있었던 것처럼 착각하게 한다. 마치 장애인의 ‘장애’를 ‘비정상’으로 포착함으로써, ‘정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쟁점은 무시한 채, ‘정상’이라는 게 원래 있었던 것처럼 간주하듯이 말이다. 이 점에서 오류는 진리의 협력자이며, 비정상은 정상의 다른 얼굴이다. 철학자들은 오류를 극복하고 진리에 도달해야 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우리가 극복해야 하는 것은 진리 자체이다. 우리는 우리 시대의 진리를 극복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 시대의 어리석음을 극복하는 길이다. 진리란 한 사회가 가진 체계적이고 객관적인 오류이며, 그 사회에 고유한 어리석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객관적 오류, 이 고유한 어리석음이 인문학자들이 갇혀 있는 감옥이다. 인문학자들은 재소자, 여성, 노숙인, 장애인 각각에서 ‘정상성’의 어떤 결핍을 보겠지만, 정작 그 결핍을 정의하는 인문학 자신은 총체적이고 구조적인 결핍을 구현하고 있다. 인문학자가 가진 앎이야말로 그 시대의 오류이자 그 사회에 고유한 미숙함이 구현된 것이다. 거기서 재소자이고 미성년자인 것은 인문학자 자신이다. 그는 자유롭기 위해 우리 시대의 지각구조, 우리 시대의 공통감각과 싸워야 하고, 거기서 벗어나야 한다. 바로 여기가 해방을 위해 도약해야 할 인문학자의 로도스이다. -pp 174~176
현실의 학자는 이성의 공적 사용이 담보되어 있을까. 그렇지 않다. 학자가 자기 시대의 통념 아래서 단순한 정보 전달자에 그칠 때 그는 ‘기계’와 같고, 자기 시대의 통념을 감히 넘어설 용기를 가질 때 ‘학자’가 되는 것이다. 칸트 식으로 보자면, 학자 역시 ‘학자’가 되는 한에서만, 즉 자기 시대의 미성년을 기꺼이 벗어날 용기를 갖는 한에서만 계몽적 인간이 될 수 있다.
따라서 현장인문학은 거기에 참여하는 모두에게 배움의 현장이어야 한다. 배움의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에 함께하는 한에서, 우리는 ‘현장인문학’에 참여하는 셈이다. 가난한 이들은 자기 안에서 학자를 발견하고 ‘학자-되기’를 시도해야 한다. 그것이 그들의 배움이다. 윙이 말한 것처럼 “‘자활’이란 삶 전체를 바꾸는 거대한 ‘변혁’의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근복적인 물음에 접근하지 못하고 즉각적인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는 현실”을 타파해야 한다. 모든 민중은 칸트의 말처럼, ‘감히 알려고’ 시도함으로써, 즉 우리 시대의 근본적 물음에 접근하면서 모두 ‘학자로서’ 말하고 행동할 수 있다.
한편 인문학자들은 자기 안에 심어진 ‘인간’이라는 독단적 이미지와 싸우는, 즉 우리 시대의 객관적 편견과 싸우는 모든 가난한 자들이 되어야 한다. 학자들은 모두 영역에서, 가타리의 용어를 빌리면 ‘어린이-되기’, ‘부랑자-되기’, ‘여성-되기’를 해야 한다. 그것은 인문학의 오랜 과제인 ‘인간-되기’의 반대 방향이다. 현장의 인문학자는 재소자가 되고, 여성이 되고, 노숙인이 되고, 장애인이 됨으로써, 그래서 ‘인간됨’ 전체를 근본적으로 문제 삼을 수 있게 됨으로써 자기 해방의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어떤 면에서는 학자의 ‘학자-되기’이다. -pp 176~177
학자가 ‘가난한 자들-되기’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가난한 자들이 그들을 가난하게 만드는 우리 사회 구조를 증언하는 한에서, 그들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라면 우리는 여성적이지 않은 여성이 되어야 하고, 장애인적이지 않은 장애인이 되어야 하며, 범죄자적이지 않은 범죄자가 되어야 할지라도 모른다.
‘현장인문학’에서 재소자, 여성, 노숙인, 장애인과 마주친 인문학자들은 자기 안에서 또한 그들이 들끓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광인과 만난 인문학자는 그 광인과 함께할 수 있을만큼 충분한 광기가 자기 안에서 들끓음을 발견할지 모른다. 이것은 인문학자가 범죄를 저지른다는 것도, 성전환이 된다는 것도, 신체적 손상을 입는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인간됨’이라는 편견 아래서 모든 비정상인 것들은 억눌려 왔던 요소들이 인문학자 안에서 끓어오른다는 이야기다. 인문학자는 우리 시대의 지배 이념을 구현하고 있는 한에서, 내부에서 끓어오른 이 가난한 자들로부터 총체적인 공격을 받을 것이다. 그의 신체는 온갖 힘들의 전쟁터가 될 것이다. 그 싸움이 인문학자를 오랫동안 가두어 온 감옥으로부터의 탈출구이다.
이것이 바로 배움이다. 모든 깨우침은 깨뜨림에서 온다. 통념이 깨질 때 사유가 일어난다. 인문학자는 현장의 힘들에 자신을 개방함으로써 배움의 사건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인문학자가 현장에 간다는 것 혹은 자신의 시간과 장소를 현장화한다는 것은 이 배움의 사건에 참여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 사건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 사건에 자신을 개방하는 일이다. 적극적으로 자신을 내맡기는 행동, 능동성과 수동성이 더 이상 구분되지 않는 그 행동 속에서, 인문학자는 사유를 경험하고 배움을 경험한다. -pp 178~179
삶으로 사유하기 위하여
니체는 기독교인을 구별짓는 것은 그들의 ‘신앙’이 아니라 ‘행동’이라고 말한 바 있다. 무엇보다 예수의 삶이 그러했다. 니체에 따르면 예수는 신앙이나 기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복음적인 실천을 통해서 신을 만날 수 있음을, 복음의 실천이 곧바로 신임을 보여 주었다. 구원이란 이런 실천에 따른 변화 혹은 이 실천 상에 나타난 변화일 뿐이다. 니체에 따르면 예수에게는 천국을 느끼기 위해 어떤 삶을 살 것이냐가 중요했지 어떤 신앙을 갖는냐가 중요하지 않았다. -pp 179~180
걸으면서 질문하기
우리는 추상적인 지표와 통계 수치들로 대중의 구체적 삶을 표현하는 지식에 반대합니다. 새만금 갯벌의 가치를 거기에 세워질 공장의 가치로 표현하고, 쌀시장 개방으로 유랑하게 될 농민들의 수를 도시에 새로 생길 서비스직의 수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며, GDP 몇 % 성장으로 대중들의 삶 전체를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지식인들을 비판합니다. -pp 193
코뮨주의 선언
우리는 ‘나는 사유한다’, ‘나는 존재한다’고 말하기 이전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나’라는 이름 아래서 사유하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것들이 ‘나’라는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지 말하고 싶다. 마치 ‘니체’라는 이름이 그가 횡단했던 수많은 건강 상태,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의 코뮨이었듯이. 우리는 “‘분할 불가능하다’ in-dividual는 의미에서의 개체는 없으며, 모든 개체는 항상 - 이미 집합체” 라는 의미에서 “개체는 중생”(衆生, multi-dividual)이라고 생각한다. 개체와 집합체의 대립은 무의미하며, 우리에게는 단지 코뮨이 있을 뿐이다. -pp 211
근대의 사적 소유 체제에서 사유화할 수 없는 것은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 어디에 있든 사물이든, 누구에게 붙어 있는 특질이든, 그것이 분리 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처분될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사유화할 수 있다. 여기에 어떤 역설이 있다. 내가 어떤 사물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그것과 결합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반대이다. 사적 소유권의 핵심은 ‘결합’이 아니라 ‘처분’과 ‘분리’에 있다. 맑스가 지적한 것처럼, “처분이 불가능하다면 내가 가진 곡물의 양은 내가 먹어치울 수 있는 한계를 나타낼 뿐”이다. 자유롭게 처분 가능한 것, 매매 가능한 것만을 나는 소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가난한 자들이 진정 가난해진 것은 그들이 뭔가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신체와 정신이 처분 가능한 것임이 밝혀졌을 때, 즉 그들이 그것을 진정으로 소유하고 있음이 발견되었을 때, 그들은 먹고 살기 위해 그것들을 즉각 팔아야만 했다.
그래서 사적 소유의 체제란 내가 가진 것을 안전하게 지키는 체제이기 이전에, 남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체제인 것이다. 한 사람이 자기 집의 울타리를 두르는 동안 다른 사람은 그 울타리를 넘어서 그의 재산을 훔친다. 울타리 치는 자가 있는 곳에 도둑이 있고, 도둑이 있는 곳에 울타리 치는 자가 있다. 소유 체제 아래서 우리는 “이 두 쌍둥이를 구분하기 어렵다.” -pp 221~222
가장 슬플 때조차 우리는 그 작아질 대로 작아진 기쁨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스피노자의 말처럼, 그 순간부터 슬픔은 더 이상 우리를 슬프게 만들 수 없다. -pp 225
모든 이질적인 것들이 소통! 그러나 자본주의 화폐경제에서 발견하는 것은 특이성들의 소통이 아니라 특이성 상실의 소통이다. 화폐는 공통된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곳에서 오직 화폐만을 보는 자본주의적 환상 속에서만 그럴 뿐이다. 화폐는 이질적인 것을 매개하지만 이질적인 것이 그 특이성을 상실하는 한에서만 그렇다. 우리는 화폐를 사용할수록 우리의 후각을 잃어버렸다. 모든 짐승은 다른 짐승의 똥에서 역겨움을 느낀다. 그러나 ‘똥 중의 똥’인 화폐에서는 아무 냄새도 맡을 수 없다.
단지 우리가 느끼는 것은 부족과 결핍의 감정이다. 공통된 것이 결핍된 곳에서 우리는 결핍을 공통된 것으로 느낀다. 결핍을 소비하게 하지 않았다면, 자본주의가 이 세계에 이처럼 충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장 부유한 자본가마저 결핍감에 시달리는 곳, 그곳이 자본주의다. 자본은 결핍으로 충만한 신체이다! -pp 227~228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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