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노자: 국가의 발견과 제국의 형이상학, 강신주, 태학사, 2004 본문

책/밑줄긋기

노자: 국가의 발견과 제국의 형이상학, 강신주, 태학사, 2004

건방진방랑자 2019. 6. 12. 18:50
728x90
반응형

이중적인 전도와 착각 속에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민주주의를 자본주의와 동일시하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일치된 것으로 사유되는 민주주의는 결국 재분배를 강조하는 민주주의에 불과한 것이다. 더 자세히 말하면 자본주의와 결합될 수 있는 민주주의는 사회민주주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여기에서는 애초에 자본가가 자본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 문제되지 않는다. 이것은 노자가 남음이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전혀 문제삼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원초적인 불평등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파생되는 부족함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민주주의란 존재할 수 없다. 우리뿐만 아니라 태어나는 모든 우리의 후손들이 그들이 원하든 원하고 있지 않든 간에 원초적 불평등의 상황에서 태어나는 것은 정당한 것일까? 유한한 삶을 누리는 모든 인간들이 원초적인 불평등의 상황 속에서 태어나서 자신의 삶을 꽃 피우지 못하고 시들어 가고 있는 것을 방관한다면, 철학이 있어서 무엇 하겠는가? 우리 시대의 철학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민주주의라는 이념이 실현되어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환각을 벗어나게 해서 우리의 사회를 진정한 민주주의로 이끌기 위한 이론적인 전망을 주는 것이어야만 하지 않을까? 그렇기 때문에 아직도 우리 사회에 철학이 있다면, 그것은 자본주의를 혹은 국가주의를 민주주의로 호도하는 허구적인 담론들과 싸우면서 인간을 주인으로 돌려놓을 수 있는 담론을 생산해내는 것일 것이다. 반복하자면 국가와 자본을 생각하지 않는 철학은 철학일 수도 없다. 국가와 자본은 우리의 사유와 실존의 가능성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철학은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사유를 시작해야만 한다.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철학의 소명으로 긍정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저자의 이런 지적에 쉽게 동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철학은 비판과 상상력이 종합된 활동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비판의 대상이나 장소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즉 자본과 국가라면, 상상력의 대상과 장소는 우리가 살아야만 하는, 그렇지만 아직 도래하지 않는 현실일 것이다. -pp 122

 

통치자가 근원적인 폭력으로 수탈을 감행함으로써 피통치자에게서 결핍을 만들고, 그 후에 은혜로운 외관으로 수탈한 것을 재분배함으로써 부채감을 생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피통치자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을 잊고, 잊어도 되는 것을 잊지 못한다는 데 있다. 피통치자는 다음과 같이 말할 뿐이다. “나는 그 대가로 무언가를 해야만 된다!” 이것은 현대자본주의의 논리와 유사한 면이 있다. 실업이 심화되면 노동자의 임금은 그만큼 싸진다. 따라서 자본가는 자신의 경쟁력의 중요한 요소인 값싼 노동력을 얻을 기회를 갖게 되고, 그에 따라 잉여가치는 증가하기 마련이다. 실업을 야기시키는 것이 항상 자본주의 메커니즘의 내적 논리인데도 불구하고 대량 실업의 상태 속에서 우리는 취직이라도 하게 되면 마치 그것을 하나의 은혜인 것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아주 진지하게 나는 나를 취직시켜준 대가로 회사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고 말하게 된다. 이로써 자본주의 메커니즘에 대한 종속은 심화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피통치자는 국가의 수탈과 재분배라는 교환논리에 더욱더 종속되어 간다.

니체가 권한 망각은 그냥 단순히 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한 일종의 휴식 또는 충전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니체의 망각은 아무 것이나 잊어버리는 백치 상태가 아니라, 새롭고 능동적인 창조의 움직임의 일환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달리 표현하자면 니체의 망각은 잊어야 할 것을 잊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잊지 않는 초월론적 결단의 자리에 주체가 서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니체는 망각망각이란 단순한 타성이 아니라 일종의 능동적인, 엄밀한 의미에서 적극적인 저지 능력이라고 정의한다. 장자 철학에서 비움[]이라는 개념이 지닌 중요성도 바로 여기에 있다. 장자에게는 비움[]이 폭력으로 만들어진 허구의 기억과 자의식을 제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이것이 깨어남이란 긍정적인 계기다. 결국 비움이나 망각은 체계에 의해 구성된 주체, 즉 매체를 해체하고 새로운 주체를 주체 자신이 구성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이해되어야 한다. 새롭게 구성된 주체는 물론 뇌물의 논리에 의해 오염되지 않는 주체, 즉 선물의 논리를 실현하는 주체다. 이 주체는 타자에게 무엇인가를 주지만, 그 순간 그것으로 행복해하고 자부심을 느끼며 유쾌해 한다. 반대로 이 주체는 타인에게 무엇인가를 받았을 때 부채감을 느끼기보다는 즐겁고 유쾌한 행복을 느낀다. 우리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주거나 받을 때, 누구도 그것을 뇌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뇌물이라고 생각한다면, 연인 관계는 바로 채무와 채권 관계로 변질된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다. 모든 연인들이 알고 있듯이, 사랑은 채무와 채권 관계에서 가장 멀리 있는 것, 채무와 채권 관계를 잊었을 때에만 도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pp 131

 

많은 사람들은 인간의 욕망 때문에 자본주의가 생겼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자본의 운동이 인간의 욕망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그것이 인간의 욕망을 만든다고 해야 한다. 또 많은 사람들은 인간의 권력욕 때문에 국가가 생겼다고 말한다. 그러나 국가가 인간의 권력욕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가 인간의 권력욕을 만드는 것이다. 결과에 입각한 인식은 항상 원인인 것을 결과로, 역으로 결과인 것을 원인으로 전도시키기 마련이다. 따라서 우리는 진정한 원인을 사유하기 위해서 발생에 입각한 인식, 즉 계보학적인 인식을 필요로 한다. -pp 182

 

주종관계란 사람들의 상호의존과 그들을 결합시키는 서로의 욕구가 있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을 복종시킨다는 것은, 미리 그를 다른 사람이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처지에 두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처지는 자연상태에서는 존재할 수 없으므로, 거기서는 누구나 구속에서 떠나 자유의 몸이며 강자의 법률이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루소 인간불평등기원론-

 

수탈과 재분배라는 국가의 교환논리에 포획된 우리는 주체라기보다는, 그 논리에 따라 작동하는 기계, 즉 매체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통치자도 이 논리에 종속된다는 점에서 예외는 아니다. 이것은 마치 현대자본주의 경제에서 진정한 주체는 자본가나 임금노동자가 아니라 자기 증식하는 실체로서 자본인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구성된 매체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 주체가 타자와 마주침을 통해 역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면, 타자는 주체로 하여금 새로운 역사를 모색하게끔 하는 힘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역사는 주체와 타자의 마주침으로 발생하는 새로움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구성되는 매체에서 구성하는 주체로 변형되기 위해서, 우리는 외재적인 타자와 만나야만 한다. 이 말은 역으로 우리는 자신을 구성하는 일자적인 원리를 내성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높이나 깊이로 사유하거나 보지 말고 옆으로 보고 사유해야 한다. 일자적 원리에 의해 매개되어 내면화되는 타자가 아니라, 무엇으로도 내면화되지 않는 타자와 마주치고 스스로를 변형시켜야 우리는 구성하는 주체 혹은 자유로운 실존으로 변할 수 있는 법이다. 우리는 여기서 알뛰세의 우발성의 철학이 가지는 폭발적인 성격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코나투스를 타고 난, 다시 말해 자신의 존재를 집요하게 유지하려는 힘 및 의지, 그리고 자신들의 자유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하여 자기 앞을 비워두려는 힘 및 의지를 타고난 개인들이 (나중에 마주치게 될) ‘사회의 원자들이다. -pp 186

 

해체의 끝에서 우리는 타자, 더 정확히 말해서 외재적인 타자와의 마주침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새로운 관계와 연대를 발견하게 되었다. 바로 이 지점에 윤리학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바디우의 사유가 지닌 중요성이 있다. 그는 외재적 관계에서 만나게 되는 타자를 사건이라는 개념을 통해 더 치밀하게 사유하려고 하였다. “주체를 구성하도록 소환하는 것은 잉여의 것이라는 점, 또는 상황에 도래하는 것이지만 그 상황이, 그리고 그 속에서의 일상적 행동방식이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 …… 이 잉여적 부가물을 사건이라고 부르자. …… 사건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존재방식을 경정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사랑의 예로 설명한다. “사랑이라는 만남의 영향 아래 내가 그 만남에 실질적으로 충실하고자 한다면, 이 상황에 거주하는나 자신의 방식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바꾸어야 한다는 사실이 명백하다. -pp 188

 

진정한 타자는 무엇보다도 다른 무엇으로 환원불가능한 단독성을 통해, 바디우의 지적처럼 타자와의 마주침 혹은 만남이란 사건을 통해, 우리의 삶의 차원에서 관계할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이자, 우리로 하여금 계속 반성하고 사유하도록 만드는 강제력을 가지고 있는 무엇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오직 이런 마주침을 통해서만 그리고 마주침을 지속하려는 코나투스를 통해서만 국가 논리에 포획된 매체가 아니라 국가 논리를 대신할 자유로운 연대를 구성할 수 있는 새로운 주체로 변형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pp 189

 

저자는 동양철학의 고유성이, 즉 그것이 유가철학이든 불교철학이든 도가철학이든 무엇이든지 간에, 타자에 대한 감수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 점에서 동양철학의 고유성을 수양론의 발달에 있다고 보는 것은 옳은 지적이지만, 얕은 평가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왜 수양을 강조하게 되었을까하는 점이다. 이렇게 물었을 때에만 동양철학 전통이 인간을 유한자로, 다시 말해 외부에 타자가 존재하는 현존으로 보았다는 사실이 우리의 눈에 들어올 수 있다. 그래서 화두를 뚫고 깨달음의 소식을 들은 선사도 저자거리에 나가 술집아주머니와 이야기를 하고, 마음 가는대로 해도 법도를 어기지 않았다는 공자도 제자들과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으며, 태극을 이야기하던 신유학 사상가들도 걸핏하면 사물이 도래하면 그에 따라 대응해야 한다.(物來而順應)’고 했던 것이다. 문제는 대가급에 속하는 뛰어난 철학자들만이 수양의 최종 목적이 타자와의 소통에 있다는 것을 망각하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그들 밑에서 기생했던 사람들은 오히려 자기 수양의 최종 목적을 신적인 완전자, 혹은 모든 세속적인 일들로부터의 초월이라고 오해하곤 했다. 다시 말해 그들의 눈에는 수양의 완성이 모든 타자들과의 관계로부터의 초월로 보였던 것이다. -pp 267

 

더 이상 병합시킬 국가가 없다면, 제국은 재분배와 수탈을 계속해서 수행할 수 있을까? 이런 상황이 도래하면 이제 외적으로 활기차 보이는 제국의 시대는 끝난 것이다. 이제는 내적인 수탈과 재분배, 그리고 더 계속되는 수탈을 견디어 낼 수 있는 주체와 내면의 구성만이 문제의 해법으로 남았을 뿐이다. 이제 금욕주의가 미덕으로 여겨지고, 일체의 욕망은 도덕적으로 비난 받는 것이 돼버린다. ‘제국의 시대에 내면이 발견되고 이로부터 주체의 수양론이 발전한다는 것이 이것을 증거하지 않는가? 로마제국에서의 스토아철학의 발달, 중국제국에서의 도교와 불교, 그리고 신유학의 발달, 미국제국에서의 티베트불교를 필두로 하는 뉴에이지 운동! 이제 활기찼고 실천적이었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철학은 사라지고 만다. 아니 존재할 수 있는 공간 자체가 없어져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가 혐오스러우면 조용히 국가를 떠나서 국가를 조롱했던 은자들도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이제 내면으로 들어가 침잠하고, 그리고 내면에서 진리의 빛과 영원의 안식처를 찾는 일만 남은 것이다. 이런 경향은 너무나 강력해서 노자마저도 도교의 수양론으로 왜곡되고, 불교의 수양론으로 왜곡되어 읽히게 되었다. 지금도 눈앞의 물질적 욕망에 자신을 무너뜨리지 말고 정신적 쾌락에 눈을 뜨라는 선사들의 말씀이 주기적으로 언론 문화면에 소개되고 있다. -pp 278

 

저자는 개체들한테서 국가와 자본을 대신할 수 있는 연대를 구성할 수 있는 힘, 다시 말해 타자와 마주칠 수 있는 힘과 계기가 있다고 긍정하고 싶다. 만일 개체들에게 이런 역량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개체들이 주체일 수 있다는 것이 부정된다면, 우리는 국가와 자본을 문제 삼고 극복할 수 있는 힘이 개체들에게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에게는 역사와 변화라는 것이 증발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타자와 마주쳐서 연대를 구성할 힘이 부여된 개체, 따라서 역사를 가능하게 하는 개체인 주체의 구성은 분명코 가능한 일이다. 더구나 주체는 기본적으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존재다. 왜냐 하면 주체가 연대를 구성하는 능동적인 힘을 놓고 국가 및 자본의 논리와 싸우는 존재가 아니라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런 구성하는 힘을 국가와 자본에 이양할 때, 그리고 그것들의 힘에 의존해서 자신의 삶을 영위할 때, 우리는 이제 주체가 아니라 단지 어느 때이든 교환가능한 매체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노자를 읽고 마지막 책장을 넘기면서 우리는 최종적인 결단의 자리에 남겨지게 된다. ‘주체로 살 것인가, 아니면 매체로 살 것인가? 타자와의 마주침을 긍정할 것인가, 아니면 내면의 본질로 침잠할 것인가? 유쾌한 삶을 영위할 것인가, 아니면 우울한 삶을 영위할 것인가? -pp 290

 

 

 

인용

목차

매체가 아닌 주체로 살아가는 방법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