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개체들의 연대는 타자에 대한 맹목적인 애정이나 민중들에 대한 연민의 감정으로부터 모색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산다면 연대의 운동은 또 다시 초월적 가치의 형태들 가운데 하나로 전락하고 말 겁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자유로운 개인들 간의 연대, 그것은 오직 우리 자신의 삶을 되찾기 위한, 그리고 우리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운동으로 진행되어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 이 운동은 그 자체로서 우리 삶의 전체 과정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의 삶과 연대는 비로소 수단과 목적이 통일된 유쾌한 대장정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pp 8
상에 대한 욕망은 선을 실천하려는 의지로, 그리고 벌에 대한 공포는 악에 대한 죄의식으로 내면화 된다. 니체가 지적했던 것처럼 이런 내면화의 과정이 완성되면서 우리는 죄의식을 가진 도덕적 주체로 탄생하게 된다. 마침내 이런 방식으로 특정 공동체의 규칙을 선과 악이라는 초월적인 가치로 수용하게 되면, “우리는 삶을 살고 있지 않으며 단지 삶과 유사한 어떤 것을 영위하게” 되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바로 여기서 노예에게나 어울릴만한 우울함 혹은 슬픔의 정념들이 발생하게 된다. -pp 135
탈중심적인 존재로서 단독자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망각의 단계를 반드시 거쳐야만 한다. 이 점에서 망각은 우리의 삶에 일종의 공백을 가져다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망각이란 항상 ‘비움(虛)’이라는 개념을 동시에 수반하는 것이다. 이런 공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타자와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다. 이 점에서 공백은 타자를 담을 수 있는 열린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할는지도 모르겠다. 기존이 생각, 혹은 기존의 의미를 배웠기 때문에 단독자는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의미를 채워야 할 숙명에 놓이게 된다고. 물론 새로운 의미는 타자와 마주쳐서 이 공백을 채우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pp 157
우리는 마찰이 없는 미끄러운 얼음판으로 잘못 들어섰던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 조건은 이상적인 것이었지만,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걸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마찰이 필요하다. 거친 땅으로 되돌아가자!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비트겐슈타인에게 ‘미끄러운 얼음판’이란 유아론적 형이상학의 세계를, 그리고 ‘거친땅’이란 구체적인 삶의 세계를 상징하는 것이다. ‘거친 땅’이란 표현에서 우리는 자신의 삶에 불가피하게도 어떤 저항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직감할 수 있다. 물론 이 때의 저항이란 타자와의 우연한 마주침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pp 180
우리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하여 바깥에 있는 것을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으며, 바깥에 있는 사물과 아무런 상관이 없이 생활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리고 더욱이 우리들의 정신을 살펴볼 경우 만일 정신이 홀로 존재하고 자기 자신만을 인식한다고 하면, 확실히 우리의 지식은 더 불완전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바깥에는 우리들에게 유익한 것, 즉 우리들이 추구할 만한 것이 많이 주어져 있다. 그 중에서 우리들의 본성과 전적으로 일치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생각해 낼 수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전적으로 본성이 똑같은 두 개체가 서로 결합한다면 단독의 개체보다 두 배의 능력을 가진 개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인간 자신보다 더 유익한 것이 하나도 없다. -스피노자 「에티카」- pp 190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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