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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랑요(薌娘謠) - 6. 향랑 시신을 찾아서 본문

한시놀이터/서사한시

향랑요(薌娘謠) - 6. 향랑 시신을 찾아서

건방진방랑자 2021. 8. 18. 0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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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향랑 시신을 찾아서

 

是處偏近竹林祠 이곳은 죽림사 근처이니
江上高碑名砥柱 강가의 높은 비석 이름은 지주비[각주:1].
吉子當年餓首陽 길재[각주:2]는 그 당시에 아사한 백이숙제처럼 금오산에 은거하여
淸風萬古只此土 맑은 유풍이 오래도록 이 땅에 이어져
娘生卑微能知義 향랑은 미천하게 태어났음에도 의리를 알아서
捐身得地何其奇 몸을 버림에 마땅한 땅을 얻었으니 얼마나 대단한가.
樵女傳衣送阿爺 나무꾼 계집아이는 전해 받은 옷을 아버지께 전송하니
浹旬號哭循江湄 열흘 동안 부르짖고 곡하며 강가를 맴돌았네.
層波嗚咽江鳥啼 층층의 파도 오열하고 강의 새도 우니
江上招招魂有知 강가에서 부르고 부르자 혼도 알았던지
阿爺旣去尸載浮 아비 떠난 뒤에 주검이 떠올랐는데
單衫被面顔如故 홑적삼으로 가린 얼굴, 예전 그대로였다.

 

 

 

 

인용

전문

해설

 

 
  1. 지주비(砥柱碑): 조선 선조(宣祖) 14년(1586) 인동현감(仁同縣監) 유운룡(柳雲龍)이 감사(監司) 이산포(李山甫)와 선산부사(善山府使) 유덕수(柳德粹)의 도움을 받아 선산(善山)에 세운 고려 충신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유적비(遺蹟碑). 전면(前面)은 중국사람 양청천(楊晴天)이 '지주중류(砥柱中流)'라 쓰고, 음기(陰記)는 유성룡(柳成龍)이 썼다. 『冶隱集』 下卷 「砥柱碑陰記」 / 『西厓集』 「碑碣ㆍ年譜」 [본문으로]
  2. 길재(吉再, 1353 공민왕 2 ~1419 세종 1): 자는 재보(再父), 호는 야은(冶隱)ㆍ금오산인(金烏山人). 이색ㆍ정몽주ㆍ권근 등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이색(李穡)ㆍ정몽주(鄭夢周)와 함께 고려 삼은(三隱)이라 불림. 우왕이 강화도에 유배되어 있다가 강릉으로 옮긴 후 살해되자, 전에 모시던 왕을 위하여 채과(菜果)와 혜장(醯醬) 등을 먹지 않고 3년상을 지냈다. 새로운 왕조에 참여할 뜻이 없었던 그는 고향에 머물면서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고, 후진을 양성했다. 『冶隱集』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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