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개가(改嫁)를 권하는 현실에 맞선 여성의 주체적 자각
향랑의 사적은 『선산읍지(善山邑誌)』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향랑은 상형곡(上荊谷) 양민의 딸로 임칠봉(林七峰)의 처가 되었다. 계모에게 용납이 되지 못하고 남편에게 버림받은 바 되자 그의 외숙과 시아버지는 개가할 것을 권하였다. 향랑은 듣지 않고 지주비(砥柱碑) 아래 이르러 다래[髢]와 치마를 풀어 나무하는 소녀에게 맡기며 ‘이것을 우리 부모님께 갖다드려 나의 죽음을 증언하고 시체를 물속에서 찾게 해다오.’라고 말하고 나서 산유화 노래를 불러 그 소녀에게 가르쳐준 다음 드디어 물에 빠져죽었다.”
이 사건이 일어난 해는 숙종 28년(1702)이다. 그런데 향랑 이야기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고 내내 전승되었으며 향랑이 불렀던 산유화는 민요로 유포된 것이다. 또한 향랑 고사는 시인ㆍ작가들의 좋은 소재로 도입되어 시와 전(傳), 심지어 장편소설 등 여러 장르의 작품을 산출하였다. 「향랑요(薌娘謠)」는 시양식으로 작품화된 대표적인 사례다.
이 시의 작품화의 특징을 들어보면 첫째는 실재 사실에 충실한 점이다. 사건이 발생한 당시 선산부사 조귀상(趙龜祥)이 최초로 향랑을 위해 전을 지었다. 그것은 현지 약정(約正)의 보고문서를 옮기고 있는바, 이 시는 보고문서의 사실과 거의 그대로 일치한다. 그럼에도 향랑의 자결로 종착되는 기구한 인생 역정이 필연적 귀결로 그려지고 있다. 특히 향랑이 재차 시집을 찾아가서 시아버지에게 호소하는 장면, 그리고 향랑이 나무하는 소녀를 만나 말하는 사연은 절실하고도 애련의 감동을 일으킨다. 사실적인 필치다.
둘째는 향랑의 성격에서 정절이 강조된 점이다. 향랑은 이미 어릴 적부터 정숙한 성품으로 설정하였거니와 특히 후반에서 죽림사를 끌어들여 충절의 의미를 부가하고 있다. 이 점은 시인의 유학자적 체질과 관련되며 봉건적 윤리규범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예불하서인(禮不下庶人)’의 원칙에 비추어 향랑은 신분적으로 개가를 해도 무방하다. “너는 농가에서 태어난 몸이니 소박을 당했으면 다시 시집을 가야지”라는 그 외숙의 말이 항량의 처지인 것이다. 그럼에도 죽음으로 개가를 거부한 행동은 그 자신 나도 하나의 ‘떳떳한 인간’이 되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요컨대 「향랑요(薌娘謠)」는 봉건사회에서 여성에게 가해진 숙명적 질곡을 사실적으로 표출한 작품이다. 자신에게 가해진 질곡은 도리어 당연한 도리로 지키려는 그 의지에 인간적 각성이 담겨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시인은 평민 여성의 주체적 자각을 포착한 셈이다. 작자 이광정은 따로 「임열부향랑전(林烈婦薌娘傳)」을 남겼다.
-임형택, 『이조시대 서사시』 2권, 창비, 2020년, 209~210쪽
1 | 착한 향랑, 미친 남편을 만나다 |
2 | 친부모와 외숙부조차 받아들여주질 않네 |
3 | 다시 찾은 시댁, 매몰찬 시아버지 |
4 | 향랑, 죽기로 결심하다 |
5 | 소녀에게 자신의 기구한 사연을 남기다 |
6 | 향랑 시신을 찾아서 |
7 | 선산의 유풍이 향랑에게 스미다 |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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