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개념어의 이미지를 내 멋대로 그리다
한 개인이 ‘사전(辭典)’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펴냈다면 둘 중 하나다. 알래스카에 냉장고를 팔려 할 만큼 무모하거나, 아니면 알래스카에 냉장고를 팔 수 있을 만큼 뻥이 세거나. 하지만 이 책의 제목 앞에 생략된 문구를 밝히면 면죄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내 멋대로 순전히 개인적인 관점에서 쓴 개념어 사전’
이것이 이 책의 원제목이다.
사전을 쓰는 일은 저술이 아니라 편찬이다. 한마디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수십 명의 전문가가 달라붙거나, 적어도 위원회가 구성되어야 가능한 작업이다. 18세기에 프랑스의 계몽주의자들이 만든 『백과전서 (L'Encyclopédie)』는 160명의 학자와 21년의 세월이 필요했고, 비슷한 시기에 중국에서 황제의 명으로 편찬된 『사고전서(四庫全書)』는 연인원 4천 명이 동원되었지만 10여 년의 시간이 걸렸다.
이 책을 그런 방대하고 엄정한 사전에 비할 생각일랑 애초에 없다. 실은 지금 그런 고전 급의 사전을 펴내는 게 과연 의미가 있는지도 의문이다. 전통적인 형식의 백과사전은 현재 인터넷 포털 사이트마다 무료로 제공되어 있으니까 언제나 누구든 열람할 수 있다. 여기서 다루는 개념들의 ‘공식적’ 정의를 알려면 그 백과사전들을 참고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거꾸로 말하면 이 『개념어 사전』은 기존의 백과사전과 거의 상관이 없다는 이야기다.
이 책에는 상식도 없고 정보도 없다. 게다가 객관적이지도 않으며, 힘써 외워뒀다 써먹을 만한 미려한 문장도 없다. 한마디로 사전이 갖춰야 할 어떠한 미덕도 없다. 대신 이 책은 고삐 풀린 망아지가 종횡무진 초원을 누비듯이 한 개인이 지적 세계 속에서 좌충우돌하면서 겪고 부딪힌 개념들을 자신의 목소리로 들려준다.
여기에 수록된 개념어들은 대부분 철학과 역사를 비롯한 인문학 용어다. 과학이나 시사로 분류될 만한 개념어들도 일부 있으나 그것들도 주로 인문학적 관점에서 다루었다. 언뜻 봐서는 중요도가 떨어지는 듯한 개념어들도 있는데, 이 사전이 편향적이고 주관적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것들을 수록한 이유도 납득할 수 있을 터다.
인문학의 개념들은 자연과학의 개념들처럼 뜻이 구체적이지 않으며, 단일한 의미보다는 복합적인 뜻의 그물을 가진다. 하나의 개념은 인접한 개념들과 연관되고 중첩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 책은 비록 ‘사전’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으나 각 개념의 의미를 사전적으로 정의하는 대신 그 이미지를 드러내고자 애썼다.
하나의 개념은 그 개념에 딸린 여러 가지 속성들의 요약이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라는 개념에는 자본주의가 형성되고 발전하고 변형 되어온 과정, 경제 제도로서 가지는 여러 가지 특성 등이 요약되어 있다(그런 점에서, 이론을 한 권의 책에 비유한다면 개념은 본문이 아니라 차례다). 그러므로 개념을 이해할 때는 사전적 정의보다 그 개념에 관한 전반적 이미지를 얻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똑같은 개념이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개념의 연쇄는 이론을 구성한다. 이론가는 여러 가지 개념들을 규정함으로써 이론을 생산한다. 그러나 때로는 그렇게 생산된 이론이 거꾸로 그 이론에 사용된 개념들을 재규정할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이렇게 개념과 이론은 유기적이고 교호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에 개념의 의미를 고정시키는 것은 자칫 위험할 수 있다. 개념을 정의가 아니라 이미지로서 포착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다.
사전의 형식을 취한 만큼 이 책은 어느 부분을 먼저 읽어도, 또 어느 부분은 읽지 않아도 상관없다. 가나다순에 따라 배열되어 있으므로 각각의 개념어들은 서로 완전히 독립적이다. 한 권의 책으로서의 유기적인 성격은 없으나 다양한 분야의 다양한 의미를 가진 개념어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데는 이런 방식이 더 유효할 듯하다.
특정 개념에 관한 선입견을 배제하고자 한다면 이 책을 사전이라고 여기지 말고 여느 책들처럼 앞부분부터 순서대로 읽는 것도 어떨까 싶다. 전혀 무관한 개념들이 이어지므로 오히려 신선한 느낌이 들지 않을까? 물론 개념들이 처음부터 가나다순으로 다뤄진 게 아니기 때문에 그런 독해는 지은이의 의도와도 무관하다.
이 책에 제시된 개념 설명은 모두 하나의 ‘시안(試案)’으로 받아들여도 좋다. 그런 의미에서 설명이라기보다는 주장에 가깝다. 정설이 지배하지 않는 지금 시대에 정설을 고집한다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다. 특정한 개념어에 관해 지은이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독자는 스스로 그 개념어에 관한 또 다른 시안을 구성해보는 것도 무척 흥미로울 것이다.
2006년 늦가을
남경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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