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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어 사전 - 가상현실(Virtual Reality) 본문

어휘놀이터/개념어사전

개념어 사전 - 가상현실(Virtual Reality)

건방진방랑자 2021. 12. 16.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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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현실

Virtual Reality

 

 

1592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조선의 왕인 선조는 가까운 신하들과 식솔들을 거느리고 북쪽의 의주까지 야반도주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대통령인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은 수도 서울을 사수하겠다던 대국민 약속을 헌신짝처럼 팽개친 채 한강 인도교를 끊고 남쪽으로 도망쳤다. 우리나라의 위정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하지만 앞으로는 설사 전쟁이 터진다 해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굳이 보따리 싸서 피난 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쿠웨이트를 무력으로 점령한 이라크를 응징하기 위해 1991년 미국의 주도 하에 벌어진 걸프전쟁은 현대전의 양상을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것은 가상 전쟁(假想 戰爭)’이다. 불과 42일 만에 15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전쟁이 가상이라면 의아스럽겠지만 전쟁의 성격은 그러하다.

 

현대전에서 미사일을 발사할 때 병사는 실제 미사일의 움직임을 눈으로 직접 보는 게 아니라 컴퓨터 화면상의 가상 이미지만을 다룬다. 물론 그 이미지는 현실의 미사일을 나타내고 있지만 병사가 관심을 두는 것은 이미지일 뿐 그것의 지시 대상(미사일)이 아니다.

 

 

 

 

 

따라서 미사일이 실제로 목표물에 명중했는지는 병사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화면상에서 미사일이 명중하면 그는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한 것이다. 설사 미사일의 작동에 문제가 생겨 화면과 달리 실제로는 빗나갔다 하더라도 그것은 프로그램 탓이므로 병사의 책임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상관에게서 징계를 당하지도 않는다. 이렇듯 전쟁의 성격이 기상이었으므로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인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1929~2007)걸프전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한다(1991년에 그는 같은 제목으로 책을 썼다).

 

이미지는 실재의 반영이지만 실재를 감추고 변질시키며, 실재의 부재를 감춘다. 이미지는 어떠한 실재와도 무관하며, 그 자체의 순수한 시뮐라크르(모방)” -보드리야르, 시뮐라크르와 시뮐라시옹(Simulacres & Simulation)

 

현대 사회의 특징은 가상 이미지가 실제의 현실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을 가진다는 점이다. 때로는 가상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이 현실보다 더 생생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인터넷 게임에서 사용되는 무기나 아이템이 현실의 공간에서 판매되고 거래되는 현상은 현대 사회에서 가상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것들은 실존하는 물건이 아닌데도 현실을 살아가는 게이머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구속을 가한다.

 

과거에는 현실과 가상을 혼동하면 비정상으로 여겼지만, 오늘날에는 두 세계가 서로 밀접히 관련되고 구분이 불가능할 만큼 뒤얽혀 있다. 가상의 공간을 뜻하는 사이버스페이스(cyberspace)는 원래 1980년대에 윌리엄 깁슨(William Ford Gibson, 1948~2002)SF 소설 뉴로맨서(Neuromancer)에서 처음 제기된 개념인데 지금은 독자적인 세계성을 얻었으며, 나아가 물질성마저 부여받았다. 중국의 고대 철학자인 장자(莊子)는 내가 나비가 된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나비가 내 꿈을 꾸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다는 호접몽(胡蝶夢)을 이야기했지만 지금이라면 굳이 구분할 필요조차 없다.

 

그러나 가상이 아무리 현실 못지않게 생생하고 강력한 힘을 가진다고 해도 가상은 어디까지나 가상이다. 가상이 의미를 지니는 것은 현실과 피드백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터넷 서점을 이용하는 목적은 현실의 물건인 책을 구입하기 위해서이며, 인터넷에서 얻는 모든 정보는 현실과 밀접한 연관성을 맺고 있기 때문에 가치를 가진다. 이런 현실과 가상의 관계는 아무리 가상이 발달한다 해도 결코 역전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가상은 현실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 화면상의 미사일이 프로그램대로 완벽하게 작동했다 해도 현실에서의 물리적인 원인으로 불발에 그친다면 인명의 살상은 없다. 폭력적인 컴퓨터 게임이나 영화가 현실에서의 폭력을 낳는 것은아니다. 만약 그런 매체의 영향을 받아 현실에서 범죄가 발생한다면, 그런 일을 예방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가상의 이미지와 공간을 제한하는 법적 조치 따위가 아니라 가상과 현실을 올바로 구분하도록 도와주는 교육 프로그램이다.

 

 

 

 

인용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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