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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동양사, 자람 - 4장 세상의 중심이었던 중국, 중원과 북방의 대결: 새로운 남북조시대?(정강의 변)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자람 - 4장 세상의 중심이었던 중국, 중원과 북방의 대결: 새로운 남북조시대?(정강의 변)

건방진방랑자 2021. 6. 6.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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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남북조시대?

 

송 제국이 당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을 즈음 요에도 강적이 출현했다. 요가 한창 강성할 때 복속되었던 여진족이 힘을 얻기 시작한 것이다. 여진은 몽골계의 거란과 달리 만주에서 반농반목(半農半牧) 생활을 하던 민족이었다(요는 발해를 멸망시킨 뒤 발해 유민들도 여진이라고 불렀고 그들의 근거지인 만주는 옛 고구려의 영토였으니, 여진은 우리 민족과 대단히 가깝다고 할 수 있다). 12세기 초반 요의 국세가 약해지는 틈을 타서 완안부(完顔部)의 족장 아골타(阿骨打)는 여진 부족들을 통합해 1115년에 금()을 세웠다.

 

100년이 넘도록 요에 세폐(歲幣)를 바치고 있던 송은 금의 등장을 반겼다. 어차피 제 힘으로 적을 물리칠 수는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송은 계책을 통해 요의 손아귀를 벗어날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등장한 게 역대 한족 왕조의 전통적인 수법인 이이제이와 고대 진시황(秦始皇)의 통일 전략이었던 원교근공(遠交近攻)을 합친 방책이다. 그러나 원래 이이제이나 원교근공은 주체의 힘이 강력해야 구사할 수 있는 전략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 오히려 부메랑을 맞게 된다.

 

과연 그랬다. 1125년 송은 금과의 협공으로 숙적인 요를 멸할 수 있었지만, 그 결과 더 힘센 강적과 단 둘이 마주치게 되었다. 이미 송의 국세를 충분히 알게 된 금은 1127년 카이펑(開封)을 포위하고, 휘종과 흠종(欽宗)의 두 황제와 황족, 후궁 등 무려 3000여 명의 황실 식구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이것을 정강(靖康)의 변()’이라고 부르는데, 이 사건으로 송 제국은 일단 멸망한다.

 

 

여진족 병사 여진족 병사의 모습이다. 이들은 거란을 대체해 송을 위협하다가 끝내 제국을 강남으로 몰아내고 중원을 차지했다. 그뿐만 아니라 여진은 후일 17세기에 다시 중국 대륙 전체를 통일해 중국 역사상 최후의 제국이 되는 청을 세운다.

 

 

송으로서는 금이 강남까지 정복할 여력이 없었다는 게 큰 행운이었다. 이후 휘종의 아들 한 명과 대신들이 강남으로 도피해 임안(臨安, 지금의 항저우)을 수도로 삼고 무너진 제국을 일으켜 세웠다. 국토는 동강났지만 그래도 송의 사직은 명맥을 유지했다. 역사학자들은 이때부터를 강남의 송, 즉 남송(南宋)이라 부르고, 그 이전까지 있었던 원래의 송을 북송(北宋)이라 부른다.

 

요에 세폐(歲幣)를 바칠 때보다 훨씬 더 큰 비극과 수모를 겪고서 탄생한 남송은 이후 두 차례에 걸쳐 실지를 회복하려는 싸움을 걸었으나 그때마다 대패하고 굴욕적인 화의 조약을 맺었다. 공물도 요에 보내던 것보다 훨씬 많아져 은 25만 냥과 비단 25만 필에 달했다. 남송으로서는 여우를 물리치고 호랑이를 집 안에 불러들인 격이었다. 더욱이 굴욕적인 일은 그나마 유지하던 상국의 명분마저 잃었다는 사실이다. 금은 남송에 신하국의 예의를 취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남송은 이후 북송 시대(168년간)와 얼추 비슷한 153년 동안 존속하면서 북송의 체제와 문화적 전통을 그대로 유지했다. 영토도 크게 줄어들었지만 한족의 민족적 자부심은 더더욱 줄어들었다. 북송과 남송 전체에 걸쳐 한족 왕조는 이민족과의 싸움에서 거의 한 차례도 승리한 적이 없었다. 시대를 앞서간 문치주의의 대가는 혹독했다.

 

남송이 몽골에 정복되는 13세기 후반까지 중국 대륙에는 화이허를 경계로 금과 남송이 공존했다. 600여 년 만에 다시 남북조시대가 재현된 셈이다. 그렇게 보면 남송 시대도 일종의 분열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남송의 수도 무력 이외에 모든 게 발달한 송은 남송으로 축소되고 나서도 특유의 활력을 잃지 않았다. 새로이 남송의 수도가 된 항구도시 임안의 시가지는 앞서 본 카이펑의 모습보다 오히려 더 번영한 듯하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군사정권이 세운 문민정부

꽃피운 문화의 시대

문민정부의 아킬레스건

개혁의 실패는 당쟁을 부른다

새로운 남북조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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