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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자람 - 4장 세상의 중심이었던 중국, 중원과 북방의 대결: 군사정권이 세운 문민정부(송태조, 과거제)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자람 - 4장 세상의 중심이었던 중국, 중원과 북방의 대결: 군사정권이 세운 문민정부(송태조, 과거제)

건방진방랑자 2021. 6. 6.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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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중원과 북방의 대결

 

 

군사정권이 세운 문민정부

 

거대 제국 당이 쓰러지면서 중국은 남북조시대가 끝난 이래 400년 만에 다시 분열기를 맞았다. 당이 멸망한 907년부터 960년까지의 분열기를 510국 시대라고 부르는데, 남북조시대의 도입부에 해당하는 516 시대와 이름도 비슷하고, 짧은 기간 동안 여러 나라가 떴다 지는 양상도 닮은 데가 있다. 사실 이 시기는 남북조시대를 압축해놓은 것 같은 정치적 격변기였다. 제국의 심장을 쏜 주전충(朱全忠)은 후량(後梁)을 세워 5대의 첫 단추를 꿰었다. 5대는 후량(後梁) - 후당(後唐) - 후진(後晉) - 후한(後漢) - 후주(後周)로 이어지는 북방 이민족들의 다섯 개 중원 왕조이며, 10국은 전촉(前蜀)ㆍ후촉(後蜀)ㆍ형남(荊南)ㆍ초()ㆍ오()ㆍ남당(南唐)ㆍ오월(吳越)ㆍ민()ㆍ남한(南漢)ㆍ북한(北漢) 등 주로 당 말기의 절도사들이 세운 10개 지방 왕조를 가리킨다. 5대는 맞교대 형식으로 바뀌었고, 10국은 서로 공존하면서 각축을 벌였다.

 

재미있는 것은 그 무렵 한반도도 중국처럼 ()’ 자를 붙여 옛 왕조의 계승을 자처한 시대였다는 점이다. 신라 말기에 궁예는 후고구려, 견훤(甄萱)은 후백제를 세워 신라와 함께 후삼국시대를 열었다. 결국 궁예를 대신한 왕건이 936년 신라와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한반도를 재통일했다. 당시 한반도의 상황은 나라의 명칭만 비슷한 게 아니라 중국의 사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신라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당이 멸망하고 중국이 분열기에 접어들면서 일어난 변화의 여파였던 것이다(신라 역시 당처럼 9세기부터 극심한 정치적 불안정을 보였다). 이렇게 한반도 역사와 중국의 역사가 함께 맞물리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한반도 역사에서 왕조 교체는 중국의 상황, 특히 한족 왕조의 변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중국이 삼국 정립기와 남북조시대를 거칠 무렵(2~6세기)에는 한반도도 삼국시대였고, 당ㆍ송 교체기(10세기)에는 후삼국시대였다. 또 이후 중국이 남송으로 약화된 시기(12세기)에 고려에는 무신 정권이 들어섰고, 원에서 명으로 교체될 때(14세기)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뀌었다. 명ㆍ청 교체기(17세기)에 조선왕조가 그대로 유지된 이유는 청이 만주족(여진족)의 왕조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불과 50여 년 동안 수많은 나라가 난립한 데서 알 수 있듯이, 510국 시대의 나라들은 거의 다 정식 국가라기보다는 당 말기의 번진(蕃鎭)에 가깝고 군벌이 지배하는 체제였다. 또다시 힘센 자가 천하를 제패하는 형국이 되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번 분열기는 수백 년 전의 남북조시대에 비해 훨씬 짧았다. 점차 강한 군벌의 휘하로 작은 군벌이 모여들더니 이윽고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었다. 이런 대세에 편승해 최대 우두머리인 후주의 절도사 조광윤(趙匡胤, 927~976)이 부하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어 송() 제국을 세웠다.

 

 

문치의 무장 조광윤 절도사의 우두머리로 새 제국을 건국한 조광윤의 얼굴은 문관 같기도 하고 무관 같기도 하다. 그는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확립하고 문치주의를 추진해 당의 귀족 관료제보다 업그레이드된 사대부 관료제를 구축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50여 년의 분열기를 거치면서 전통의 귀족 세력이 완전히 몰락했다는 배경이 있다.

 

 

송 태조 조광윤의 앞에 놓인 정치적 과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통일 제국이면 당연한 의무로,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하는 일이다. 다른 하나는 비록 자신은 절도사로서 새 제국을 열었으나 이제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없어야만 한다.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돌팔매질은 하나, 문치(文治)에 입각한 군주 독재 체제를 만드는 것이다. 중앙집권은 태조 자신이 절도사들의 우두머리였으므로 가능했지만, 문치주의는 다른 때 같으면 실현 불가능한 과제였을 것이다. 문치주의를 위해서는 전문 관료 집단이 필요한데, 당시까지 수백 년 동안 전통의 귀족 가문이 득세하면서 관료 집단의 형성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침 송을 건국한 시기의 주변 환경은 그 일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우선 516 시대를 거치면서 문벌 귀족 세력이 완전히 몰락했다. 일찍이 측천무후의 외척 정치 시대에 전통의 문벌 귀족(관롱 집단)이 크게 약화된 적이 있지만, 정치적으로만 그랬을 뿐 사회경제적으로는 말기까지도 전혀 힘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당이 멸망한 뒤 50여 년의 군벌 시대를 주름잡았던 절도사들은 대개 이민족이거나 하층민 출신이었다. 명망가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그들은 손쉽게 문벌 귀족을 제압하고 재산까지 몰수해버렸다.

 

이제 전통적인 지배층은 사라졌다. 그럼 그 공백을 메울 새로운 사회 엘리트는 누굴까? 그것은 바로 사대부 세력이다. 원래 사대부란 봉건제의 주나라 시절 공(, 제후), () 아래의 지위인 대부(大夫)와 사()에서 나온 말이었지만, 후대에 오면서 의미가 달라졌다. 우선 한 제국 이래로 중앙집권적 제국들이 연이어 등장하면서 공과 경 같은 봉건 제후의 냄새를 물씬 풍기는 직위들이 없어졌고, 그 아래의 사와 대부는 6세기에 과거제(科擧制)가 등장하기 전까지 제국의 실무 행정을 맡으면서 자연스럽게 관료 집단으로 자리매김했다. 게다가 송대의 사대부는 후한 제국 이후 수백 년 동안 존속해 온 전통의 문벌 귀족과 달리 중소 지주 계층 출신이었다.

 

이렇게 당과 송은 시간적 거리가 불과 50여 년밖에 안 되지만, 정치와 사회의 성격에서는 판이하게 달랐다. 당은 남북조시대의 귀족 정치와 균전제(均田制), 부병제(府兵制) 등 각종 제도를 거의 그대로 이어받아 완성시킨 나라였지만, 송은 오히려 전통과의 철저한 단절을 통해 나라의 기틀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분열기 50여 년 동안 그렇게 커다란 변화가 있었던 걸까? 그렇지는 않다. 그 변화는 사실 8세기 중반 안사의 난 이후 당 제국의 틀 안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50여 년간의 변화가 아니라 200여 년간의 변화가 된다(그래서 안사의 난 이후 송의 건국까지를 하나의 시대로 묶어 당말오대(唐末五代)’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대부의 생활 당 제국이 귀족 지배 체제였다면, 송 제국은 관료제 사회였다. 과거제(科擧制)를 통해 관료로 임용된 이들 신흥 지배 세력을 사대부라고 불렀다. 그림은 송대 사대부의 생활양식을 보여준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군사정권이 세운 문민정부

꽃피운 문화의 시대

문민정부의 아킬레스건

개혁의 실패는 당쟁을 부른다

새로운 남북조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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