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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자람 - 4장 세상의 중심이었던 중국, 중원과 북방의 대결: 꽃피운 문화의 시대(송태조, 근체시, 백록동 서원)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자람 - 4장 세상의 중심이었던 중국, 중원과 북방의 대결: 꽃피운 문화의 시대(송태조, 근체시, 백록동 서원)

건방진방랑자 2021. 6. 6.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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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피운 문화의 시대

 

문벌 귀족이 사라졌다는 것을 확인 사격이라도 하듯이, 송 태조는 당의 최고 행정기관인 36부에서 귀족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던 문하성과 상서성을 중서성에 통합해버렸다. 이에 따라 문하성이 지니고 있던 황제 명령에 대한 거부권도 없어져 황제의 전제권이 크게 강화되었다. 이렇게 보강된 중서성과 더불어 군사권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추밀원(樞密院)을 두어 중서성과 추밀원의 2(二府)가 최고 정책 결정 기관이 되었다. 또한 지방 행정 기구로는 전국에 15개의 로()를 설치했는데, 절도사가 전횡하던 시대처럼 지방 권력이 권력자에게 집중되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로()를 관장하는 책임자는 따로 임명하지 않았다. 그 대신 로에도 중앙 관제를 도입해 각 로를 부서별로 나누고 행정을 전문화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렇게 관료 제도를 새로 정비하자 실무자급의 전문 관료들이 대량으로 필요해졌다. 옛날처럼 문벌 귀족이 공급하는 인력은 필요하지도 않거니와 이제는 그런 집단이 제거되어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럼 어떻게 필요한 인력을 수급할까? 답은 과거제(科擧制)였다.

 

물론 과거제는 당 제국 시대에 효율적으로 기능한 제도다. 하지만 당과 송, 두 나라는 과거제에서도 상당히 달랐다. 당 시대에는 과거에 합격했다 하더라도 문벌 귀족 출신의 정부 부서장들이 관장하는 별도의 구술시험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송의 과거제는 각 지방의 예선을 거친 합격자들을 대상으로 황제가 직접 관장하는 전시(展試)를 치러 여기서 최종 합격자를 선발하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전시 합격자들은 천자의 문생이라 부를 정도였다. 당 말기에 환관들이 옹립한 황제, 즉 문생천자에 비해 글자의 순서만 뒤바뀐 것 치고는 엄청난 차이. 과거제를 통해 선발된 인력이 바로 사대부 세력의 주축이 되었다. 이들은 역사상 최초로 문민정부를 표방한 송의 정치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문치주의를 실시한 덕분에 송은 화려하고 찬란한 문화의 제국이 되었다. 문화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예술은 그 이후까지 포함해 중국 역사상 송 시대에 가장 번성했다. 특히 회화는 송대부터 독립적인 예술 장르로 자리 잡았다. 당 시대까지 회화는 의뢰인의 요구에 따라 초상화를 그리거나 건축물을 장식하거나 종교적인 목적에서 제작되는 등 기능적이고 장식적인 역할이 위주였다. 그러나 송대에 와서는 회화 자체가 독자적인 예술 활동으로 인정되었다.

 

또한 직업적 화공이 아닌 사대부 출신 문인들의 문인화가 발달했으므로 주제나 기법도 매우 다양해졌다. 과거에 회화 과목까지 포함시킬 정도였다고 보면 시절이 한참 달라졌다. 는 것을 알기 어렵지 않다. 12세기 초반의 황제 휘종(徽宗)권력자이기 전에 뛰어난 화조화가(花鳥畵家)이기도 했다. 회화와 더불어 송대에는 음다(飮茶) 풍습이 성행해 다기를 비롯한 도자기 관련 산업과 예술도 크게 발달했다. 오늘날까지도 도자기의 최고로 치는 송자(宋瓷)는 특히 고려청자에 큰 영향을 주었다.

 

문학에서도 송은 독보적인 경지에 이르렀다. 시 문학은 당에 비해 처지지만중국 문학에서는 지금까지도 당시(唐詩)를 능가하는 시는 없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송대에는 그 대신 사(, 일종의 노랫말)와 산문 문학이 크게 발달했으며, 서민 문화의 성장에 힘입어 소설도 인기를 끌었다(시 문학과 소설 문학의 관계는 귀족 문화와 서민 문화의 관계와 유사하다). 후대에 이른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로 알려진 위대한 문장가들 중에는 송의 문인들이 여섯 명이나 된다.

 

 

황제의 작품 문치주의에 걸맞게 송대의 황제는 직접 붓을 들고 그림을 그렸다. 오언시까지 첨부된 이 멋들어진 화조도는 화가로서도 유명했던 휘종의 작품이다(오른쪽 아래 글자 중 宣和는 휘종의 연호다). 그러나 예술가 황제 휘종은 재위 시절 대외적으로는 여진족 금나라의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했으며, 대내적으로는 이후 소설 수호지(水許誌)의 무대가 되는 혼란기를 겪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송의 문치주의에 가장 어울리는 문화적 현상은 학문의 발달이다. 송대에는 특히 유학(儒學)이 크게 발달했다. 오늘날까지도 그 시대의 유학을 송학(宋學)이라는 별도의 용어로 부르면서 유학 사상의 핵심으로 간주한다.

 

앞서 말했듯이 유학은 원리부터 현실 참여적인 사상이다. 그런데 유학은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기본 골격이 형성되었고, 한대에 국가 공식 이데올로기로 채택되었으나, 당 시대까지도 사회에 완전히 침투하지는 못했다. 사실 충효의 예를 강조하고 존왕양이(尊王攘夷)라는 수직적 상하 질서의 세계관을 기본으로 삼는 유학의 성격은 지배자라면 누구든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한 제국 이래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늘 유학을 정치와 사회의 지도 사상으로 도입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때마다 유학은 지배자의 짝사랑으로만 끝났다. 현실적인 학문이지만 현실에 녹아들지 못했으니 어찌 보면 불우한 학문이었다. 후한 제국 시절에 유학은 환관 정치에 도전했다가 패배의 쓴잔을 마셨고, 당 제국 시절에는 도교와 불교에 밀려 오히려 퇴보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당 말기에 성행한 도교와 불교의 철학적 탐구 방식은 수백 년 동안 훈고학적 학풍에만 젖어 있던 유학을 크게 각성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유학(儒學)이 불운했던 이유는 고비마다 환관이나 외척, 귀족 등 기존의 정치 세력의 반발을 만났기 때문이다. 역대 황제들은 언제나 유학에 후한 점수를 주었지만, 황제 이외의 기득권층은 유학을 썩 환영하지 않았다. 유학적 세계관이 천자를 중심으로 하는 동심원적 구조이므로 기득권층은 기껏해야 천자를 보필하는 관료 세력에 불과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 기득권층이 없어졌다. 당말오대200년에 걸쳐 문벌 귀족이 크게 약화되었고, 부패한 환관 세력은 당이 망하면서 주전충에게 모조리 도륙되었다. 똑같은 출발선에서 달리기를 한다면 유학은 언제든 1등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는데, 이제 균등한 출발선이 마련된 것이다. 더구나 유학을 숭상하는 신흥 사대부 세력은 문벌 귀족들의 장원이 무너지면서 새로이 생겨난 형세호(形勢戶)라는 지주층(송대에 발달한 형세호와 전호佃戶의 관계는 근대적인 지주-소작인 관계의 기원이다) 출신이므로 경제적 배경도 튼실했다.

 

이렇게 주변 조건이나 주체 역량이 충분했기 때문에 송학은 우호적인 토양에서 크게 발달할 수 있었다(나중에 보겠지만, 송대에는 주변 이민족에게서 굴욕을 많이 당한 탓에 민족적 자각의 일환으로 존왕양이를 앞세우는 유학이 자연스럽게 힘을 얻기도 했다). 그전까지의 유학과 달리 송학은 단순한 국가 통치 이념인 것만이 아니라 철학적 체계성도 확보했다.

 

우주의 본체를 태극으로 보고 음양설과 오행설을 세운 주돈이(周敦頤, 1017~1073)를 비롯해 소옹(邵雍, 1011~1077), 장재(張載, 1020~1077), 정호(程顥, 1032~1085), 정이(程頤, 1033~1107) 형제는 후대에 북송 5(北宋五子)로 불린다. 이들이 정초한 유학(儒學)의 이론은 남송의 주희(朱熹, 1130~1200)에게서 완성된다. 주희는 기존의 유학이론을 집대성해 태극을 이(, 불변의 이치, 만물의 존재 근거), 음양과 오행을 기회(가변적인 요소, 만물의 운동 원리)로 보는 이기론(理氣論)과 일종의 수양론인 성리론(性理論)으로 정립했다. 이것이 바로 성리학 또는 주자학이라고 불리는 송학의 완성판이다.

 

여기까지는 철학으로서의 유학이지만, 주희는 나아가 이것을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변형시킨다. 불변의 를 한족으로, 가변의 를 이민족으로 환치하는 것이다. 그 의도는 명백하다. 한족은 모든 것의 중심이며 이민족은 모두 오랑캐라는 뜻이다. 비록 지금은 오랑캐의 힘에 눌려 있지만 결국에는 모든 것이 한족 중심의 중화로 돌아오는 게 이치라는 이야기다. 결국 주희가 정립한 신유학은 중화사상(中華思想)의 요체였다당시 한반도 왕조는 고려였지만 성리학의 측면에서 보면 중국의 송과 짝을 이루는 한반도 왕조는 후대의 조선이다. 조선에서 이기론은 16세기에 퇴계율곡의 논쟁으로 나타났고, 청의 침략을 받은 17세기에는 인물성동론과 인물성이론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둘 다 급변하는 동북아시아의 정세 속에서 비중화 세계(청과 일본)의 거센 도전을 받은 중화 세계(명과 조선)의 이데올로기적 대응책이었다.

 

 

백록동 서원 주희는 황폐한 이 백록동(白鹿洞) 서원을 부흥시켜 자신이 창시한 신흥 학문인 주자학(성리학)의 중심지로 삼았다. 그가 죽은 이후에도 제자들은 이 원을 계속 발달시켜 송학의 성지로 만들었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군사정권이 세운 문민정부

꽃피운 문화의 시대

문민정부의 아킬레스건

개혁의 실패는 당쟁을 부른다

새로운 남북조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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