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의 실패는 당쟁을 부른다
화려한 문화의 선진국인 송이 물리력이 약하다는 한 가지 원인 때문에 일찌감치 쇠미의 징후를 보인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아직 건국한 지 100년밖에 안 되는 젊은 나라이므로 반전의 실마리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이제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 되었다. 그래서 등장한 게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의 신법(新法)이다.
스무 살의 청년 황제 신종(神宗, 재위 1067~1085)의 적극 지원으로 발탁된 왕안석은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공격적인 부국강병책을 전개했다. 조공이 야기한 재정난은 부국책으로 막고, 부족한 군사력은 강병책으로 키운다. 왕안석은 부국책의 목적을 농민 생활의 안정, 생산력의 증가, 국가 재정난 타개로 삼고, 이를 위해 청묘법(靑苗法), 시역법(市易法), 균수법(均輸法), 모역법(募役法), 방전균세법(方田均稅法)을 시행했다. 청묘법은 봄에 농민에게 자금을 빌려주고 가을 수확기에 받는 것으로, 고리대금업자가 농민을 수탈하는 것을 방지하려는 것이었다. 시역법과 균수법은 정부가 물가 조절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제도였으며, 모역법은 농민에게 요역을 부담시키는 대신 돈으로 내도록 하는 제도였다. 그게 그거 아니냐 싶겠지만 그 돈으로 정부가 일손을 구해 요역을 충당하면 실업자를 구제할 수 있고 지방 정부의 재정을 강화할 수 있었다. 또 방전균세법은 토지조사를 상시화함으로써 부호들이 은닉한 토지를 찾아내 과세하려는 방책이었다.
이러한 부국책과 아울러 왕안석은 강병책으로 보갑법(保甲法)과 보마법(保馬法)을 실시했다. 보갑법은 농민들을 직접 군사력으로 키우는 방책인데, 당말오대에 직업군인 제도를 택하면서 무너진 병농일치제를 부활시키려는 의도에서 시행되었다. 또한 보마법은 농가에 말을 사육하도록 해서 유사시에 군마로 활용하려는 제도였다.
이와 같은 개혁 조치는 누가 보아도 당연하고도 분명한 것이었으나 당시 상황에 비추어 보면 가히 혁명이라 할 만큼 급진적이었다. 재원은 어차피 한정되어 있는데 그 운용을 달리하자는 것이었으니, 누군가(예컨대 국가) 이득을 보면 누군가는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청묘법과 시역법은 송대에 크게 성 장한 대상인 세력의 이해관계를 위협하는 것이었으며, 방전균세법은 대지주의 이익을 노골적으로 침해하는 것이었다. 자연히 왕안석의 신법에 대해 전통 기득권층은 반발했다. 그래도 개혁의 취지 자체를 모조리 부인할 수 없었으므로 반발 세력은 개혁파(신법당)와 보수파(구법당)로 나뉘었다. 신법당은 대체로 신법을 지지하면서 기층 민중의 성장을 부국강병의 요체라고 주장한 반면, 구법당은 “정치란 사대부들을 위한 것이지 서민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주장으로 팽팽히 맞섰다. 지금처럼 공화제와 국민주권의 관념이 확고하다면 당연히 신법당의 논리가 우세하겠지만, 유럽에서도 시민사회가 탄생하기 500년 전인 당시에는 구법당의 논리도 터무니없는 게 아니었다.
상업 정책 |
균수법 (均輸法) |
나라가 싼 곳에서 물건을 사서 비싼 곳에 팔음 |
시역법 (市易法) |
소상인들에게 대출 | |
모역법 (募役法) |
실업자를 채용하여 국가 공사 시킴 | |
농업 정책 |
농전수리법 (農田水利法) |
농업용수를 위한 시설의 마련 |
청묘법 (靑苗法) |
봄에 자금 대출하여 수확기에 받음 | |
방전균세법 (方田均稅法) |
토지 세금을 균등하게 걷음 | |
군사 정책 |
보갑법 (保甲法) |
백성을 민방위 군대로 만듦 |
보마법 (保馬法) |
백성들에게 말 기르도록 장려 후 전쟁 사용 |
왕안석(王安石)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신종이 죽자 갈등은 어느덧 부국강병과 거리가 먼 정쟁으로 발전했다. 이리하여 송 제국의 정치를 좀먹게 되는 당쟁(黨爭)이 등장했다. 사실 당쟁은 당 시대에도 크게 일어난 적이 있었을 뿐 아니라(그때는 환관들의 당쟁이었다) 그 생리 상 어느 시대든 있을 수 있는 것이었지만, 송대에 당쟁이 특히 치열한 데는 원인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과거제(科擧制)였다.
과거제는 전통적인 귀족 집단의 혈연 대신 ‘학연(學緣)’이라는 새로운 ‘연줄’을 만들어냈다. 과거를 통해 관료로 임용된 자는 자신을 길러준 스승보다 뽑아준 과거 시험의 감독관을 존경했고, 함께 시험에 합격한 동기와 선후배 등과 부지런히 연고를 맺었다. 관료의 임용이나 승진에는 고관의 보증이 필요했는데 이 과정도 연줄이 자라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 하나의 세력이 생기면 대항 세력이 나타나는 법이다. 점차 이들은 끼리끼리 뭉치면서 여러 당파를 형성했다.
이런 상황에서 왕안석(王安石)의 신법이 도입된 것이다. 이 혁명적인 조치가 시행되자 이제 예전처럼 당파들이 연고만 맺고 세력을 늘리는 데 머물 수만은 없게 되었다. 신법과 구법 중 한 가지를 선택하는 적극적인 정치 행동으로 나서야 했다. 신법으로 인해 더욱 격렬해진 송대의 당쟁은 마침내 송 제국을 멸망으로 이끌게 된다. 왕안석의 부국강병책은 전혀 의외의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중국의 송과 한반도의 조선이 닮은 꼴이라는 것은 당쟁에서도 드러난다. 사대부가 정치 세력으로 등장했다는 점에서 비슷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당쟁의 주제마저 비슷했다. 11세기 송에서는 인종(仁宗)이 후사가 없던 탓으로 조카인 영종(英宗)이 즉위하는데, 영종의 아버지를 어떻게 예우할 것인가를 두고 당쟁이 벌어졌다. 17세기 조선에서는 효종(孝宗)의 어머니 자의대비의 복상(服喪) 기간을 두고 서인과 남인이 격돌한 ‘예송(禮訟)논쟁’이 치열했다. 송과 조선은 대외 관계도 비슷했다. 송은 요와 서하에 세폐를 바친 대가로 상국의 명분을 가까스로 유지했는데, 이것은 조선이 여진과 왜를 대하는 이른바 교린(交隣) 정책과 비슷하다. 조선은 왜구의 위협에 못 이겨 3포를 개항하고 그들을 먹이느라 매년 쌀 1만 석씩 들였는가 하면 수시로 북변을 침입하는 여진을 무마하느라 토지와 가옥, 노비까지 내주기도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송에 왕안석(王安石)의 신법이 있었다면, 조선에는 조광조(趙光祖)의 개혁이 있었다. 또한 송이 요와 금의 공격을 받았을 때 내부에서 주전론과 주화론이 팽팽하게 대립했듯이, 조선도 청의 침략(병자호란)을 당했을 때 주전론과 주화론으로 대신들의 의견이 갈렸다(둘 다 결과적으로 주화론을 택했다). 게다가 금에 억눌린 남송과 청에 항복한 조선은 모두 실현 가능성이 없는 북벌 계획을 수립했다가 결국 포기하고 만다(공교롭게도 북벌을 계획한 남송의 황제와 조선의 왕은 모두 효종孝宗이었다). 이 정도면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없는 사실이다】.
▲ 왕안석의 글씨 청년 황제 신종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과감한 개혁을 실시한 왕안석은 후대에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힐 만큼 글씨와 문장도 빼어났다. 그러나 그의 개혁 정책은 당쟁의 회오리에 휘말렸고, 결국 당쟁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우리 역사에서 왕안석(王安石)과 꼭 닮은 행적을 보인 인물은 조선의 조광조(趙光祖)다. 여러 가지 면에서 송은 한반도의 조선과 닮았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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