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동양사, 자람 - 5장 분열이 자연스러운 인도, 짧은 통일과 긴 분열: 법에 의한 정복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자람 - 5장 분열이 자연스러운 인도, 짧은 통일과 긴 분열: 법에 의한 정복

건방진방랑자 2021. 6. 6. 15:55
728x90
반응형

 5장 분열이 자연스러운 인도

 

 

1. 짧은 통일과 긴 분열

 

 

법에 의한 정복

 

인도 최초의 통일 제국인 마우리아 왕조는 기원전 322년부터 기원전 187년까지 불과 150년밖에 존속하지 못했다. 비슷한 시기 지중해의 로마 제국과 중국의 한 제국이 400년 이상이나 수를 누린 것에 비하면 마우리아는 미니 제국인 셈이다(인도 역사에서는 무굴제국을 제외하면 나중에도 수명이 200년 이상 지속된 왕조가 거의 없었다).

 

그런 만큼 제국의 성격도 크게 다르다. 마우리아를 비롯해 인도의 역대 통일 왕조들은 중국이나 유럽의 제국에 비해 그다지 강력한 힘을 지니지 못했다. 남인도(인도 반도)까지 포함한 인도 아대륙 전체를 강역으로 하는 국가가 출현한 것도 근대에 와서의 일이다. 사실 인도 역사에서는 중국의 역대 왕조들처럼 강력한 중앙집권을 꾀한다거나 인도 전역을 통일하려 애쓴 제국이 없었다.

 

여기에는 지리적인 요인도 크다. 중국 대륙에는 중원이라는 지리적 중심이 있으나 인도 아대륙의 한복판에는 중원 같은 벌판은커녕 거대한 덩치의 데칸 고원이 사방의 교통을 가로막고 있다. 그래서 인도에는 고대부터 해안을 중심으로 많은 소국가가 발달했다. 어느 정도 규모의 제국이라 해도 남인도까지 강역으로 포함하지는 못했다인도 역사를 지역으로 구분하면 북인도와 남인도, 그리고 데칸 고원에 자리 잡은 소국가들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중세에 이르기까지 인도에서 역대 통일 제국이나 큰 세력을 떨친 왕조들은 주로 북인도를 지배했고, 그에 비해 남인도는 비교적 독립적인 역사를 꾸렸다. 데칸 고원을 활동 무대로 하는 소국가들은 북인도와 남인도의 완충지대와 같은 역할을 했다. 그런 탓에 남북 방향의 교류는 어느 정도 이루어졌으나 정치적인 통합은 없었다.

 

그래도 마우리아 제국은 인도 역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넓은 영토를 지닌 국가였다. 인도 반도 남단까지 이르지는 못했으나 파키스탄이 분리된 오늘날의 인도보다도 컸다. 이것은 마우리아가 그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마가다 왕국 시절에 축적한 부와 문물, 제도를 바탕으로 삼아 활발한 정복 활동을 펼쳤기 때문에 가능했다.

 

건국자인 찬드라굽타에 이어 그 손자인 아소카(Asoka, ?~기원전 238) 왕의 치세에 마우리아는 최전성기를 맞았다. 인도 역사에서 가장 걸출한 군주로 꼽히는 아소카는 젊은 시절 군사력을 앞세운 정복 전쟁을 많이 벌였다. 그러나 기원전 261년의 칼링가 전투에서 무수한 인명이 살상당하는 비극을 겪고는 불교에 깊이 귀의하게 되었다. 진정한 정복은 무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법(dharma, 불법)에 의해 가능하다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이후 그는 군대 지휘관들을 종교 사절단으로 만들었으며, 비폭력과 자비에 의한 정치를 펼쳤다. 또한 그 자신부터 불경을 열심히 공부하고 수많은 불탑과 성지 순례자를 위한 숙박 시설 등을 건축했다.

 

피비린내 풍기는 정복왕으로 역사에 남을 뻔한 아소카 왕은 불교를 접한 덕분에 마음의 평화를 얻었을 뿐 아니라 불교를 세계 종교로 확립한 군주로 길이 남게 되었다. 게다가 그는 불교 이외의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관용을 베풀었다. 백성들에게 굳이 불교를 강요하지는 않았으나 포교 활동에는 열심이었다. 그 덕분에 당시까지 북인도에서만 발달했던 불교는 인도의 지배적인 종교로 성장했다. 하지만 그가 믿고 포교한 불교는 개인의 깨달음을 중시하는 소승불교였기 때문에 널리 해외에까지 전파되었어도 본격적인 포교 종교로 발달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아소카 왕의 석주 만년에 들어 불교에 심취한 아소카 왕은 불교 성지에 10여 개의 석주를 남겼다. 이 석주들에는 아소카 왕의 조칙이 새겨져 있는데, 높이가 10미터에 이르는 것도 있다. 사자 네 마리가 조각되어 있는 이 석주는 그중 최고의 걸작으로 알려져 있다.

 

 

비록 영토는 넓었지만 마우리아 제국 전역이 황제의 직접 지배하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마우리아의 통치 방식은 옛 마가다 왕국의 영토만 황제의 직할지로 두고, 나머지 영토는 네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총독에게 통치를 맡기는 것이었다. 각 지방에는 정기적으로 순회 감사관을 파견해 관리했다. 전반적으로 중앙의 황제와 지방 총독들 간의 연락 시스템을 통해 국가 조직이 운영되는 식이었으므로 일종의 종주국 속국과 같은 봉건제라고 할 수 있다. 강력한 상비군과 재판권, 관리 임면권, 조세제도 등을 중앙에서 관리한 점에서는 분명히 제국이지만, 비슷한 시기 중국의 진()ㆍ한() 제국과 같은 중앙집권 체제와는 거리가 멀었다. 또한 중국의 통일 제국과 달리 문자나 화폐의 전국적인 통일도 이루어지지 않았다(지배자는 당연히 통일을 원했으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마우리아의 유적 마우리아 제국에서는 위와 같은 석조 건축이 상당히 발달했다. 마우리아는 서쪽으로 펀자브, 동쪽으로 벵골을 넘어 지금의 미얀마에 이르는 강역을 구축해 오늘날의 인도보다 영토가 넓었다. 그러나 이름만 제국이었을 뿐 중앙집권이 미약한 탓에 속 빈 강정과 같았다.

 

 

이렇게 중앙집권이 미약했으므로 아무래도 황제의 능력에 따라 제국의 운명이 크게 좌우될 수밖에 없었다. 과연 아소카 왕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우리아 제국은 여러 개의 나라로 분열되어 해체되었다. 법에 의한 통치가 지속되면서 마우리아의 군사력은 크게 저하되기도 했지만, 아소카 왕의 후계자들은 더 이상 그런 이상적인 통치를 할 능력도 없었다. 결국 마우리아의 군 사령관이던 푸샤미트라(Puhsyamitra)가 마지막 황제를 살해하고 숭가(Sunga) 왕조를 여는 것으로 인도 최초의 통일제국은 신고식만 치른 채 역사의 문을 닫았다나중에 보겠지만, 인도의 왕조들은 대체로 시작과 끝이 중국에서처럼 분명하지 않다. 중국의 경우에는 이전 왕조가 멸망하고 새 왕조가 들어서는 과정이 마치 문을 닫고 여는 것처럼 명백하지만, 인도의 역대 왕조들은 그렇게 분명한 바통 터치가 없다. 그렇게 보면 인도 역사에서는 어느 왕조가 멸망했다는 것보다 쇠퇴’, ‘분열’, ‘해체같은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인도와 접촉한 로마 황제 이탈리아에 있는 유명한 트라야누스 개선문이다. 쿠샨 왕조는 마우리아 제국과 달리 대외 교섭 활동이 활발했는데, 당시 로마 제국의 트라야누스 황제에게도 사절단을 보냈다. 이렇게 교류가 활성화되어 있었던 것을 보면 쿠샨 왕조에서 대승불교가 발달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법에 의한 정복

인도판 춘추전국시대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