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민정부의 아킬레스건
송대에는 학문과 예술만 발달한 게 아니었다. 도시와 상업의 성장으로 서민들의 생활수준도 높아지고 서민 문화가 화려하게 꽃을 피웠으며, 해외 무역도 활발해 광저우(廣州)와 항저우 등 항구 도시들이 크게 번영했다. 또한 조선업과 제철업, 군수 산업 등 국가 기간산업도 가히 세계적인 수준이었다. 게다가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눈부신 성과가 있었다. 송대의 발명품은 거의 다 세계 최초의 것들이다. 동양 세계의 4대 발명품 가운데 종이는 후한대인 2세기에 발명되었으나 화약과 나침반, 활판인쇄술은 모두 송대에 발명되었다. 지폐를 사용한 것도 세계 최초다.
문민정부를 토대로 했고 학문과 예술, 산업과 과학기술까지 두루 발달했으니 송은 명실상부한 최고의 강국이 되었어야 한다. 하지만 실은 정반대였다. 송은 이전과 이후를 통틀어 역대 중국의 통일 제국 가운데 가장 허약한 나라였다. 왜 그랬을까? 송의 아킬레스건은 바로 물리력에 있었다.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중앙 권력과 이를 보필하는 관료제는 완벽했지만, 송은 문치주의를 표방한만큼 아무래도 군사 부문에서는 미진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환경도 예전과는 달라졌다. 문명이 발달한 것은 송만이 아니었다. 당말오대를 거치면서 중화 세계를 둘러싼 비중화 세계가 강성해졌다. 오히려 송 제국이 성장하는 것보다 한족의 전통적 맞수인 북방 민족들의 힘이 더 먼저, 더 빠르게 성장했다.
송이 건국될 당시 북방 민족의 판도는 거란족이 세운 중원 북쪽의 요(遼)와 티베트 계통의 탕구트족이 세운 서북쪽의 서하(西夏)로 양분된 상태였다. 거란은 원래 당 초기에는 돌궐과 위구르에 복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의 집요한 공세에 그들이 서쪽으로 멀리 물러나자 거란은 그 공백을 틈타 세력을 키웠다. 그러던 중 당이 멸망하고 중원이 정치적 혼란에 빠져 있던 916년에 거란은 대거란국(大契丹國, 936년에 중국식 국호인 요로 바꾼다)을 세웠다. 신생국은 10년 뒤 만주의 터줏대감인 발해를 병합했으며, 5대 군벌 국가의 하나인 후진의 건국을 도운 대가로 중원 북동부의 비옥한 지대인 연운(燕雲) 16주(지금의 베이징이 있는 지역)를 획득했다【북방 민족들에 관해서는 중국 측 기록 이외에 별로 전하는 게 없기 때문에 막연히 그들이 문화적으로 크게 뒤처진 것으로 여기기 쉽다. 특히 우리 역사는 일찌감치 한족 문화권에 합류한 탓에 스스로를 한족과 동일시하고 예로부터 북방 민족을 경시하는 경향이 짙었다. 우리 역사를 통해 중국과 대등한 관계에 있었던 시기는 고대 삼국시대가 마지막이었다. 이후 한반도 왕조들은 외교권과 군사권을 중국 한족 왕조에 내주었기 때문에 ‘대외 관계‘가 사라지고 한반도 내의 역사만 전개했다(중국에 이민족 왕조가 들어설 때는 중화 세계의 일원으로서 한족 왕조의 편에서 항쟁했다). 거란의 요는 문화적으로도 결코 후진국이 아니었다. 그들은 거란 문자를 만들어 사용했으며, 불교를 발전시켜 대장경도 조판했다. 이 대장경의 영향으로 고려대장경이 조판될 수 있었다. 당시 거란의 이름은 유럽에까지 널리 알려졌는데, 오늘날에도 그 영향이 남아 있다. 현재 홍콩에 있는 영국계 항공사의 명칭이 캐세이퍼시픽(Cathay Pacific)인데, 마르코 폴로가 거란을 캐세이로 부른 데서 연유한다】.
아직 신생국인 송의 입장에서 북방의 동향은 잠재적 위기 상황이었다. 그저 대외적으로 안정을 중시할 수밖에 없었던 태조는 요와 무역을 계속하면서 평화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아우로 제위를 물려받은 태종(太宗, 939~997)은 같은 정세를 다르게 판단했다. 애초에 의도가 달랐을 수도 있다. 그는 형의 뜻을 거슬러 조카의 제위를 찬탈하다시피 했고 황제가 된 뒤 조카를 사실상 살해했으므로 권력의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다.
어쨌든 태종은 미수복지 연운 16주가 못내 아까웠다. 그래서 979년과 986년에 그는 두 차례에 걸쳐 대군을 이끌고 요에 도전했으나 결과는 일패도지(一敗塗地)였다. 힘으로는 안 되겠다 싶었던 송은 이후 국경을 폐쇄하고 통상을 단절하는 노선으로 바꾸었는데, 이게 또 문제였다. 요는 송의 경제 보복 조치에 군사 보복 조치로 대응했던 것이다. 태종이 말썽만 일으키고 죽은 탓에 그 불똥을 그의 아들 진종(眞宗, 968~1022)이 고스란히 떠안았다. 1004년 요의 군대가 파죽지세로 송의 수도 카이펑(開封) 부근까지 쳐들어오자 송은 실지 회복은커녕 수도
사수에 사력을 다해야 했다.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던 양측은 마침내 화의를 도모하기로 하고 전연(澶淵)의 맹약을 맺었다.
그 조약의 결과로 송은 요의 상국(上國), 즉 ‘형님 나라’라는 명분을 얻었다. 그러나 조약에서 송이 얻은 것은 그게 다였다. 형(송)은 아우(요)에게 매년 은 10만 냥과 비단 20만 필을 주기로 했다. 또 형은 잃어버린 땅 연운 16주를 완전히 포기하고 현 상태의 국경을 유지하며 다시는 국경 부근에 군사 시설을 설치할 마음을 먹지 말아야 했다. 말이 형님이지 송은 요에 매년 막대한 세폐(歲幣)를 바치는 ‘조공 국가’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굴욕도 굴욕이거니와 송은 이후 요가 여진족의 금에 망할 때까지 100년 이상이나 공물을 바쳤으니 그로 인한 재정적 피해도 막심했다.
첫 단추를 잘못 꿴 송의 대외 관계는 서하와의 접촉에서도 되풀이되었다. 송은 요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서북의 탕구트족을 섣불리 복속시키려 했다가 오히려 그들의 잠재된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역효과를 빚었다. 그러자 송은 거란과 상대할 때처럼 또다시 국경을 폐쇄하고 무역을 금지하는 노선으로 돌아섰다. 탕구트의 대응도 거란과 똑같았다. 1038년 그들은 서하를 세우고 송과 싸웠다. 놀랍게도 결말마저 다를 바 없었다. 7년간의 전쟁 끝에 송은 결국 화의 정책으로 돌아섰다. 전연의 맹약에서처럼 송은 상국의 명분을 얻은 대신 매년 은 5만 냥과 비단 13만 필, 차 2만 근을 주고 무역을 재개하기로 했다.
이렇듯 명분을 확보하고 실리를 내주는 비정상적인 대외 관계는 송의 비정상적인 체제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산업과 문화는 대단히 발달했으면서도 군사력은 뒤처지는 이상한 중화 제국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 대가로 얻은 미미한 명분조차도 실은 이민족의 힘에 굴복한 결과였다. 굴욕감과 더불어 막대한 재정적 피해가 내치에도 위협 요소로 작용하자 제국 내에서는 점차 자성의 소리가 드높아졌다.
▲ 화려한 도시로 송의 수도 카이펑은 정치의 중심지일 뿐 아니라 최대의 상업도시로 크게 번영했다. 그림에서 도시의 생동감이 느껴진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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