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과 동시에 분열로③
갈라설 명분만 노리고 있던 이슬람 측에 구실을 준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전쟁이 터지자 다시 영국은 인도의 협조가 필요해졌다. 그런데 지난번에 골치 아픈 일을 겪은 탓인지 이번에는 협조를 요청하기는커녕 아예 처음부터 인도를 연합국 측으로 등록시키고 인도의 이름으로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의 약속 위반을 괘씸하게 여긴 인도인들은 격분했다. 국민회의는 즉각 협조를 거부하고 모든 각료가 사퇴해버렸다. 그런데 이 정치 공백이 엉뚱하게도 이슬람 연맹 측에 좋은 기회가 되었다.
힐라파트 운동에서 힌두 세력이 배신했다면 이번에는 이슬람 세력이 배신할 차례다. 이슬람 연맹의 지도자인 진나(Mohammed Ali Jinnah, 1876~1948)는 재빨리 파키스탄이라는 새 국가를 수립하고 영국에 파키스탄을 승인해준다면 협조하겠다고 제안했다【파키스탄(Pakistan)은 만들어진 과정도 그렇지만, 나라 이름도 전통적인 지역의 이름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다분히 인위적이다. 즉 펀자브(p), 아프간(a), 카슈미르(k), 신드(S) -모두 지명이다-의 나라(stan)라는 뜻이다. 원래는 1933년 영국에 유학 중이던 인도의 이슬람교 학생들이 처음 만든 용어였다】. 때마침 미얀마를 점령한 일본이 인도를 위협하자, 간디는 영국이 인도에서 물러난다면 자신들이 직접 조국을 지키기 위해 일본과 싸우겠다고 주장했다. 당연히 영국은 둘 중 협조하겠다고 나선 이슬람 연맹 측에 접근했다.
이제 두 가지 대세는 막을 수 없게 되었다. 영국으로서는 인도의 독립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고, 인도로서는 파키스탄의 분리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승패가 가시화될 무렵인 1944년 간디는 진나와 회담을 갖고 독립이 먼저라고 주장했으나 진나는 분리가 먼저라고 맞섰다(이것도 중국의 국공합작이 깨진 과정과 비슷하다), 협상이 결렬되면서 국민회의에서 간디의 영향력은 현저하게 줄었고, 새 지도자 네루(Jawaharlal Nehru, 1889~1964)는 분리에 찬성하는 입장을 취했다.
1947년 8월 15일, 인도는 마침내 200년간의 식민지 시대를 종식시키고 독립을 쟁취했다. 그러나 그것은 반쪽의 승리였다. 독립과 동시에 수천 년의 역사를 통해 한 몸이었던 파키스탄이 분리되어 나간 것이다. 인도에서는 네루가 초대 총리에 올랐고, 파키스탄에서는 진나가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1948년 인도 통일의 마지막 보루였던 간디가 암살됨으로써 인도와 파키스탄은 영영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말았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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