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과 동시에 분열로②
때마침 국제사회에서는 윌슨(Woodrwo Wilson, 1856~1924) 미국 대통령이 제안한 약소민족의 자결권 보장이라는 구호가 메아리치고 있었다.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 1869~1948)를 비롯한 당시 지도자들은 영국의 약속을 믿고 130만 명의 용병을 유럽, 아프리카, 서아시아 등에 자원군으로 보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17년 인도 장관 몬터규(Edwin Samuel Montagu, 1879~1924)의 성명이 발표되었을 때 인도인들은 이제야 진정한 자치가 실현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본 결과 인도인들은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종전 직후인 1919년에 공포된 인도통치법에는 도저히 자치라고 부를 수 없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영국은 납세자만이 선거권을 가진다는 서구적 원리를 악용해 인도인(그것도 남성)의 10퍼센트에게만 참정권을 허용한 것이다. 더구나 약속한 언론 결사의 자유 등은 마치 없었던 일처럼 무시되었다. 영국은 전보다 더욱 강경한 방침으로 돌아섰다.
오로지 자치 하나만 믿고 막대한 전쟁 지원금까지 부담한 인도인들은 잠시 허탈감에 빠졌다. 그러나 남이 내 나라를 독립시켜줄 수는 없는 일, 그들은 다시 반영운동의 기치를 치켜들었다. 1920년 간디가 이끄는 국민회의는 영국에 대해 대대적인 불복종운동을 선언했다. 흔히 비폭력운동이라 알려져 있어 마치 소극적인 저항처럼 여겨지지만, 실상 이 운동은 영국의 법률을 준수하지 말고 납세마저도 거부하자는 적극적인 운동이다.
당황한 영국은 전통적인 분리책을 추구하면서 이슬람 연맹을 회유하려 했으나, 이것은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 되었다. 이미 인도인의 저항은 종교를 넘어선 거국적인 규모였던 것이다. 오히려 이슬람 세력과 간디는 그 일을 계기로 서로 협력을 취하기로 약속했는데, 이것이 힐라파트(Khilafat) 운동이다.
인도판 ‘국공합작’이라고 할 만한 힐라파트 운동이 끝까지 지속되었다면 오늘날의 파키스탄은 없었을 것이다. 인도의 전 역사를 통틀어 통일을 저해하는 고질병이던 종교상의 차이는 영국이라는 공동의 적을 앞에 두고 최소로 좁혀들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 중국의 국공합작을 가로막은, 불리할 때는 쉽게 단결하지만 유리할 때는 쉽게 분열하는 현상은 인도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중국에서는 국민당이 합작을 깼다면 인도에서는 국민회의가 그 역할을 맡았다. 1937년 지방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국민회의는 혼자 힘만으로도 단독정부를 수립할 수 있다는 판단이 들자 이슬람과의 합작을 거부해버렸다. 이슬람 측에서 보면 명백한 배신 행위였다. 이것을 계기로 힐라파트 운동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힐라파트 운동은 원래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전국들이 패전한 오스만튀르크(터키)를 해체하려 했을 때 위기를 느낀 이슬람 교도들이 칼리프를 지키자는 취지로 시작했다. 인도에서는 간디가 이 운동을 지원하는 대신 이슬람 세력이 간디의 비폭력운동을 지원한다는 약속이 있었다. 그러나 국민 회의가 배신하자 실망한 인도의 이슬람교도 수만 명이 아프가니스탄으로 집단 이주했고, 또 힌두교도들은 그들의 과격한 행동에 분노하는 바람에 양측은 결국 갈라서고 말았다】.
▲ 민족 지도자 간디 간디는 폭력보다도 강한 비폭력 저항운동으로 영국의 지배에 맞섰다. 하지만 그는 조국이 200년간의 식민지 시대를 끝내고 해방되자마자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해방과 동시에 온 분열을 막으려 애쓴 점에서, 그리고 그 와중에 반대파의 총에 암살되었다는 점에서 간디는 우리의 민족 지도자 김구와 비슷하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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