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작의 성과와 한계④
전선의 교착이 길어지면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불화의 골은 깊어져만 갔다. 급기야 양측은 무력 다짐까지 벌이기에 이르렀다. 먼저 배신한 것은 장제스였다. 1941년 10월에 그는 황하 이남에 있던 홍군에게 황허 이북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홍군은 마지못해 따랐는데, 그것은 장제스의 교활한 계략이었다. 그는 8만 명의 군대를 동원해 홍군을 습격했다. 7일간의 전투 끝에 7000명의 신사군이 궤멸을 당했다. 이 완난(皖南)사변으로 2차 국공 합작은 사실상 결렬되었다.
이렇게 적정이 내분되어 있을 때 만약 일본군이 총공세에 나섰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나 당시 일본도 그럴 처지가 못 되었다. 중국을 점령하는 게 여의치 않자 일본은 1940년 9월에 유럽의 독일, 이탈리아와 3국 군사동맹을 맺었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파시즘 국가들이 한데 뭉친 것은 서로에게 의지가 되었겠지만, 그간 일본이 에너지를 의존했던 미국이 석유 수출을 중단해버렸다. 일본은 노선을 전면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일본은 중국에서 기수를 돌려 동남아시아를 먼저 정복하기로 했다. 여기서 등장한 게 이른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이라는 구호다. 아시아가 함께 번영하자는 뜻이니 구호 자체로만 보면 지지할 수도 있겠지만, 실은 모든 아시아 국가를 일본이 지배하겠다는 의도를 ‘공영’이라는 문구로 미화한 것뿐이었다. 나아가 일본은 그 노선에 걸림돌이 되는 미국에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결심했다. 1941년 12월, 일본 공군이 진주만을 기습하면서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바야흐로 아시아에서도 세계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 장제스식 외교 종전이 가까워지자 장제스는 ‘전쟁 이후’를 위해 서방과의 눈치 외교에 주력했다. 1945년 2월 처칠과 루스벨트, 스탈린(왼쪽부터)이 참가한 얄타 회담에서 스탈린은 독일이 항복하면 소련이 극동 전선에 참전하겠다고 약속했다. 연합국 측은 이 정보를 장제스에게 알리지 않으려 했으나 장제스는 이를 눈치 채고 처남을 모스크바에 보내 스탈린으로부터 장차 자신을 중국의 지도자로 승인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극단적인 반공주의자인 그에게 스탈린과의 접촉은 지금 보아도 파격이다. 항일보다 반공이 먼저인 장제스였으나 반공과 권력 중에서는 권력을 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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