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극상의 절정②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태도다. 20년 동안 노부나가를 보좌하면서 빛나는 전공을 세운 이에야스는 사실 어느 면으로 보나 히데요시에게 꿀릴 게 없는 처지였다. 그런데 그는 1584년 히데요시와 벌인 전투에서 형세를 유리하게 이끌고서도 갑자기 강화를 맺었다. 그에게는 천하를 경략하겠다는 웅대한 꿈이 없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그는 아직 자신이 그럴 만한 세력을 지니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이후 히데요시의 휘하에 들어가 히데요시가 전국 통일 전쟁을 벌이고 있는 동안 후방에서 지원했다. 나중에 그는 히데요시가 죽은 뒤 천하의 새 주인으로 떠올라 ‘영원한 2인자’의 이미지를 불식하게 되지만 아직은 속에 품은 칼날을 아무에게도 내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의 하극상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히데요시의 각오는 여러 측면에서 나타난다. 우선 그는 전국의 백성들에게서 무기를 압수하고 무장을 금지했다. 농민은 농기구만을 가지고 농업에만 전념하라는 것이다. 사실 센고쿠 시대를 거치면서 직업군인 제도가 정착되었으므로 설령 백성들에게 무장을 허용한다 해도 예전과 같은 민중 반란은 어려울 터였다(1593년 호조 세력이 무너진 것도 농번기에는 농업에 종사하는 무사들을 무력의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다). 농민들은 토지에 완전히 속박되었으며, 직업의 자유를 빼앗긴 것은 물론 경작을 포기하거나 집을 함부로 옮기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결국 하극상의 시대에 민중이 쟁취한 여러 가지 자유는 히데요시의 일본 통일과 더불어 사라져버린 셈이다(아니면 이후로 미루어졌거나). 하지만 이는 당시 일본의 역사적 추세인 강력한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필연적인 현상이었다. 센고쿠 시대에 민중의 목소리가 컸던 이유는 민중의식이 깨어났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센고쿠 시대라는 ‘비정상적인 시대’였기에 가능했다고 보아야 한다】.
이제 히데요시는 대대적인 토지조사에 착수했다. 앞서 중국의 경우에서도 보았듯이 새로운 통일 제국이 들어서면 세수 확대를 위해 토지조사는 반드시 뒤따르게 마련이다. 일찍이 노부나가도 각지의 다이묘들에게 검지령(檢地令)을 내려 소유한 토지를 신고하라고 명한 바 있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한 단계 더 높여 관리를 각지에 파견해 토지를 실제로 측량하게 했는데, 이것을 다이코 검지(太閣檢地, ‘太閣’란 ‘은퇴한 간바쿠’라는 뜻으로, 히데요시가 조카에게 간바쿠 자리를 넘긴 뒤 스스로를 가리켜 부른 용어다)라고 부른다.
▲ 히데요시와 이에야스 오부나가의 돌연한 죽음을 잘 이용해 일본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히데요시(왼쪽)는 왜소한 신체를 감추기 위해 일부러 커다란 옷을 즐겨 입었다고 한다. 통일을 앞두고 죽은 노부나가가 ‘죽 쒀서 히데요시 준 격’이라면, 히데요시는 ‘죽 쒀서 이에야스 준 격’이었다. 노부나가 시절부터 만년 2인자 노릇을 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오른쪽)는 결국에도 바쿠후를 열어 일본 통일과 하극상 시대의 최종적 수혜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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