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쿠후의 몰락②
그러나 바쿠후는 이권을 제공하는 대가로 프랑스로부터 모든 측면의 지원을 받았으나, 반바쿠후파는 영국으로부터 군사와 재정 원조는 의도적으로 거부했다. 이는 무사 집단 특유의 강렬한 반외세 의식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반바쿠후파가 바쿠후보다는 민족의식이 강했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
일반 민중에게도 바쿠후에 대한 반감이 절정에 달할 즈음인 1866년 겨울, 드디어 고메이 천황이 죽고 열네살의 메이지(明治, 1852~1912)가 즉위했다【원래 고메이는 10대 시절 일본이 강제 개항되는 것을 목격한 이후 외세와 바쿠후를 다 혐오했다. 그런 그가 바쿠후와 손잡은 것은 조슈파를 더 혐오했기 때문이다. 천황의 비중이 커지던 무렵 고메이는 서른여섯 살의 한창 나이에 천연두에 걸려 죽었는데, 반바쿠후파의 손에 독살되었다는 추측이 한층 설득력이 크다. 정확한 사인은 지금도 조사와 연구의 대상이다】.
고메이가 죽었으니 반바쿠후파의 천황을 대하는 전략도 바뀔 필요가 있다. 그들은 다시금 존왕 이데올로기를 내세웠다.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빠른 탓에 메이지는 소년이 아니라 해도 사태를 파악할 여유가 없었다. 바쿠후는 급속히 여론과 민심을 잃었고, 심지어 본거지인 에도 내의 치안조차 제대로 유지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제 메이지는 소년이라 해도 어디에 줄을 서야 할지 명확히 깨달았다.
드디어 1868년 1월, 존왕파는 쿠데타를 일으켜 바쿠후를 타도하는 데 성공했다. 왕정복고가 선언되고, 쇼군제와 간바쿠제가 폐지되었다. 그때까지 바쿠후와 쇼군은 700년 가까이 일본을 통치했고, 간바쿠는 무려 1000년이나 된 직책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일본 정치의 골간이 완전히 바뀐 것이다. 이제 남은 과제는 단 하나, 바쿠후의 대항 쿠데타를 진압하는 일이다.
쇼군제가 폐지됨으로써 본의 아니게 마지막 쇼군이 되어버린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 1837~1913)는 아직도 에도를 장악하고 있었다. 새 천황 정부는 요시노부를 타도하자는 구호로 대군을 편성해 에도로 진격했다. 요시노부는 휘하 군대를 총동원해 새 정부군과 대대적인 결전을 준비했다. 자칫 대규모 내전이 될 뻔한 양측의 충돌은 다행히 현실화되지 않았다. 세 불리를 느낀 에도 측이 꼬리를 내려 극적으로 협상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렇게 해서 개국 이후 10여 년간 격렬하게 전개되었던 권력투쟁은 신흥 세력의 승리로 끝났다. 일본의 역사는 수백 년 만에 전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수백 년 동안 바쿠후의 중심지였던 에도는 이때부터 도쿄(東京)로 이름이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그보다 더 큰 변화는 9세기 이래 셋칸 시대와 바쿠후 시대를 거치면서 내내 상징적 존재로만 군림해왔던 천황이 무려 1000년 만에 다시 현실 정치의 무대에 우뚝 서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 성공한 쿠데타 1868년 1월의 쿠데타 장면, 왼쪽의 바쿠후군은 병력 수에서 두 배 이상 많았으나 서양식으로 무장한 쿠데타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큰 전투는 아니었으나 이 사건은 시대를 역행하려 한 바쿠후의 몰락이자 20여 년간 권토중래한 존왕파의 최종적 승리였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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