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식 시민사회?②
서양의 역사에서는 봉건제가 무너지면서 생겨난 신흥 시민계급(부르주아지)이 사회의 핵심 세력으로 성장하면서 자본주의의 발생과 발전에 큰 몫을 담당했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에는 바쿠후라는 강력한 권력의 중심체가 지배하는 가운데 도시가 발달했기 때문에 사정이 크게 달랐다. 바쿠후 자체가 봉건제의 주체였으므로 반란 같은 사건을 통하지 않고서는 서양에서처럼 봉건제가 자연스럽게 붕괴하기 어려웠고, 시민들이 곧 무사들이었으므로 사회 발전의 동력이 되기도 어려웠다【무사들을 제외한 도시의 일반 시민들은 조닌(町人)이라고 불렸다. 이들은 도시의 수공업자와 자영 상인이었는데, 전통적인 다이묘들에게서 배척을 당했지만 개인적 노력으로 상당한 부를 쌓은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돈은 있어도 서양의 시민계급처럼 참 정권과 자치권을 누리지 못한 그들은 문화적으로 그 공백을 메웠다. 그런 점에서 보면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에는 기여하지 못했어도 자본주의 ‘문화’에는 기여한 셈이다】. 서양의 봉건제가 무의식적이고 자연발생적인 것이었다면, 일본의 봉건제는 의식적이고 정치적인 목적에서 인위적으로 성립된 체제였던 것이다(이 점은 중국의 봉건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생산력의 발전은 꾸준히 봉건제의 해체를 요구하고 있었다. 대내적 안정과 대외적 쇄국이 지속되면서 에도 바쿠후도 초기와 같은 강력한 경제적 주체의 노릇을 계속하기는 어려웠다. 그 틈을 비집고, 바쿠후의 일을 대신해주면서 바쿠후와의 거래로 재산을 쌓는 상인들이 생겨났다. 이들에게 인구가 급성장하는 대도시는 곧 거대한 시장이었다. 오늘날 일본의 대재벌들 가운데 미쓰이(三井)나 스미토모(住友)는 바로 이 에도 시대의 신흥 상인들을 직계 조상으로 한다.
상인들의 등장과 반비례해 바쿠후의 재정은 점차 악화되었다. 이에야스가 애써 일군 막대한 바쿠후의 재산은 17세기 후반 4대 쇼군에 이르러 거의 고갈될 처지에 이르렀다. 그러자 바쿠후는 임의로 화폐개혁을 실시하고 거기서 생기는 엄청난 차액으로 근근이 재정을 꾸렸으나 어디까지나 임시변통일 수밖에 없었다. 바쿠후의 재정난은 차츰 번에 대한 압력으로 전가되었고, 번은 또 농민들에게 그 부담을 전가했다. 그러나 농민들도 예전의 고분고분한 존재가 아니었다. 17세기 중반부터 농민들은 전국 각지에서 대대적인 폭동을 일으켰다. 이쯤 되자 바쿠후는 다이묘의 반란보다도 농민들의 투쟁을 더 심각한 위협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 나가사키의 네덜란드인 바쿠후는 쇄국정책을 취하면서도 네덜란드 상인들에게만큼은 나가사키 항구를 개방하고 교류와 통상을 지속했다. 그림은 나가사키의 네덜란드인들을 훔쳐보는 일본인들의 모습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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