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시와 예와 악으로 보는 배움의 과정
8-8.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사람은 시(詩)에서 배움을 일으키고, 예(禮)에서 원칙을 세우며, 악(樂)에서 삶을 완성시킨다.” 8-8. 子曰: “興於詩, 立於禮. 成於樂.” |
제가(諸家)의 설이 분분하지만 공자의 시대의 실제 정황에 즉하여 왜 이런 말이 나왔는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선 증자의 말이 끝나고 공자의 말이 시작되면서 편의 분위기가 격상되는 것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들은 앞서 말했듯이 증자학단 내에 전승되어 오던 공자의 말들이었을 것이다. ‘시(詩)’는 요즈음의 시(poems)가 아니라 일차적으로 노래다. 물론 노래가사가 시로 남았지만, 그것은 반드시 멜로디와 악기를 동반했던 노래였다.
인생은 시에서 흥한다[興於詩]. 여기서 흥이란 단순히 감정의 흥기만을 말한 것이 아니라, 자연인에서 문화인으로 전환되는 본질적 배움의 계기에 대한 흥취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관심의 촉발이며 감정의 승화이다. 그런데 공자시대에는 학문의 시작이 노래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유치원생들이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부터 문화생활, 사회생활, 교육받는 생활을 시작하는 것과 도 같다. 공자의 시대에는 노래를 통하여 학문의 길에 들어섰던 것이다.
‘예에서 선다[立於禮]’는 뜻은 사회적 관계의 모든 질서감각이 정립되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에는 제식의 문제가 삶의 큰 과제상황이었다. 이 모든 예식을 배움으로써 한 사회적 개체로서 자립(自立)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악에서 이룬다[成於樂]’는 뜻을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 여기서 악(樂)이라는 것은 앞에서 말한 노래 즉 시(詩)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노래는 간단하게는 나의 홍만 있으면 내 목청만 가지고도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기존의 멜로디를 익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 악(樂)이란 여러 악기의 구성을 갖춘 오케스트라의 기악곡 형태이며, 공자에게 있어서는 창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성어악(成於樂)’이란 기존의 답습이 아닌 새로운 창조이며, 단순한 술(述)이 아닌 작(作)의 단계였다. 창조가 없는 인생은 무의미한 것이다. 최소한 도전해볼 만한 규범을 후세에 전하지 않는다.
시에서 흥(興)하고, 예에서 입(立)하고 악에서 성(成)하는 이삼 단계의 과정이야말로 공자가 체현한 호학(好學)의 삶의 전과정을 말해주는 것이다.
삶은 과정이다(Life is a Process) | |||||
Ⅰ | 흥어시 興於詩 |
각성 (Awakening) |
배움의 단계 | 學者之初 | 興起其好善惡惡之心. |
Ⅱ | 입어례 立於禮 |
사회학 (Socialization) |
예법적 단계 | 學者之中 | 卓然自立, 而不爲事物之所搖奪 |
Ⅲ | 성어악 成於樂 |
창작 (Composition) |
창조적 단계 | 學者之終 | 義精仁熟, 而自和順於道德. |
‘흥(興)’이란 홍기(興起)하는 것이다. ‘시(詩)’는 본래 인간의 성정에 근본하는 것이지만 사악한 노래도 있고 바른 노래도 있다. 노래는 우선 가사가 쉽게 이해되고, 그것을 노래부르는 사이에 멜로디(억양)를 통해 계속 반복하게 되면 사람을 감흥시켜 쉽게 사람 속으로 파고든다. 그러기 때문에 배움의 처음 단계에 있는 사람은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을 흥기시켜 스스로 그칠 수 없게 되는 소이(所以)를 반드시 노래로부터 얻어 배우게 되는 것이다.
興, 起也. 詩本性情, 有邪有正, 其爲言旣易知, 而吟詠之間, 抑揚反覆, 其感人又易入. 故學者之初, 所以興起其好善惡惡之心, 而不能自已者, 必於此而得之.
‘예(禮)’는 공경하고 사양하는 것으로써 그 근본을 삼으며, 절문(節文: 절도있는 질서)과 도수(度數: 사회제도의 도수에 맞는 법칙)의 자세함을 구비하고 있다. 예는 사람의 피부의 땀구멍을 고밀하게 만들고 근육과 뼈의 다발을 견고하게 만들어 용모의 위의(威儀)를 빛나게 만든다【沃案. 예를 신체적으로 생각하는 동방인 사유의 한 전형을 여기서 엿볼 수 있다. 『예기』 「예운(禮運)」에 출전이 있다】. 그러므로 배움의 중간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능히 탁연(卓然)하게 자립(自立)하여 사물에 의하여 흔들리거나 빼앗김을 당하지 않게 되는 소이(所以)를 반드시 예(禮)로부터 얻어 배우게 되는 것이다.
禮以恭敬辭遜爲本, 而有節文度數之詳, 可以固人肌膚之會, 筋骸之束. 故學者之中, 所以能卓然自立, 而不爲事物之所搖奪者, 必於此而得之.
‘악(樂)’에는 5성과 12율이 있으니 번갈아 선창하고 화답해가면 가무(歌舞)와 8음(8가지 음색의 악기 심포니)의 절도(음정)를 익힌다. 사람은 악(樂)으로써 성정(性情: 도덕적 본성과 감정의 양면)을 기를 수 있고 그 비뚤어지고 더러운 것을 깨끗이 씻어내며 그 찌꺼기를 말끔히 해소시키고 융화시킨다. 그러므로 배움의 마지막 단계에 있는 사람은 의(義)가 정밀해지고 인(仁)이 푹 익어서 스스로 도덕(道德)에 화순(和順)하게 되는 소이(所以)를 반드시 악(樂)에서 얻어 배우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배움의 완성이다.
樂有五聲十二律, 更唱迭和, 以爲歌舞ㆍ八音之節. 可以養人之性情, 而蕩滌其邪穢, 消融其査滓. 故學者之終, 所以至於義精仁熟, 而自和順於道德者, 必於此而得之, 是學之成也.
주희의 주석은 그 나름대로 명료한 논리를 가지고 있다.
시(詩) | 학자지초 學者之初 |
흥기기호선오오지심 興起其好善惡惡之心 |
예(禮) | 학자지중 學者之中 |
탁연자립卓然自立 불위사물지소요탈不爲事物之所搖奪 |
악(樂) | 학자지종 學者之終 |
의정인숙義精仁熟 자화순어도덕自和順於道德 |
○ 『예기』 「내칙(內則)」에, ‘10세에 어린아이가 익혀야 할 예의를 배우고, 13세에 악(樂)을 배우고 시(詩)를 외우고, 20 이후에나 관례를 행한 후 예를 배운다’고 하였다. 그런즉 여기서 말하는 3단계의 배움은 소학(小學)적인 전수(傳授)의 차서(次序)가 아니요, 대학(大學)적인 차원에서 평생 익혀야 할 것의 난이(難易)ㆍ 선후(先後)ㆍ천심(淺深)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 按「內則」, 十年學幼儀, 十三學樂誦詩, 二十而後學禮. 則此三者, 非小學傳授之次, 乃大學終身所得之難易, 先後, 淺深也.
정이천이 말하였다: “천하의 영재는 적지 않으나, 특별히 도학(道學)이 분명하게 밝혀져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인재들이 성취하는 바가 빈곤한 것이다. 옛 사람들은 시(詩)를 요즘의 가곡처럼 잘 알고 있어서, 비록 동네 골목길의 어린 학동들까지도 익히 듣고 배워서 그 기쁨을 향유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능히 배움의 세계로 흥기(興起)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늙은 서당선생이나 숙유(노숙한 유자)라고 하는 사람들조차 그 시(詩)의 의미조차 알고 있지를 못하다. 하물며 새로 배우는 사람들은 오죽하겠는가? 이것이 바로 시에서 흥하지 못하는 이유다. 옛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스스로 물 뿌리고 청소하고 사람을 응대하고, 관혼상제의 사소한 일에 이르기까지 모두 예(禮)가 아닌 것이 없었다. 예는 그들의 삶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그러한 삶의 예가 없어지거나 망가져버렸으니 인륜(人倫)이 불투명해지고 집안을 다스리는 일조차 무법(無法)천지가 되고만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禮)에 입(立)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옛 사람들에게 있어서 악(樂)이라는 것은 그 성음(音)으로써 귀를 기르고, 그 채색(采色)으로써 눈을 기르고, 그 가영(歌詠)으로서 성정(性情)을 기르고, 그 무도(舞蹈)로서 혈맥(血脈)을 기르는 것이었다. 지금은 이렇게 종합적이고 아름다운 악(樂)이 다 없어지고 말았으니, 이것이 바로 악(樂)에서 성(成)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옛날에는 인재를 길러 완성시킨다는 것이 쉬웠다. 그러나 지금 은 인재를 길러 완성시킨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程子曰: “天下之英才不爲少矣, 特以道學不明, 故不得有所成就. 夫古人之詩, 如今之歌曲, 雖閭里童稚, 皆習聞之而知其說, 故能興起. 今雖老師ㆍ宿儒, 尙不能曉其義, 況學者乎? 是不得興於詩也. 古人自洒埽應對, 以至冠ㆍ昏ㆍ喪ㆍ祭, 莫不有禮. 今皆廢壞, 是以人倫不明, 治家無法, 是不得立於禮也. 古人之樂: 聲音所以養其耳, 采色所以養其目, 歌詠所以養其性情, 舞蹈所以養其血脈. 今皆無之, 是不得成於樂也. 是以古之成材也易, 今之成材也難.”
정이천의 탄식을 새겨들을 만하다. 전인교육(全人敎育), 통재교육(通才敎育)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송유들도 고(古)만 찬양하고 금(今)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고의 찬양을 빌어 금을 격려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정신을 차리기만 하면 공자시대보다 몇천 배 찬란한 교육을 21세기에 실현시킬 수가 있 다. 이 땅의 교육자들은 폭넓고 깊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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