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논어한글역주, 태백 제팔 - 5. 증삼이 묘사한 안연의 모습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태백 제팔 - 5. 증삼이 묘사한 안연의 모습

건방진방랑자 2021. 6. 26. 10:05
728x90
반응형

 5. 증삼이 묘사한 안연의 모습

 

 

8-5. 증자가 말하였다: “능하면서도 능하지 못한 이에게 물으며, 학식이 많으면서도 학식이 적은 자에게 물으며, 가지고 있으면서도 없는 것처럼 여기고, 가득 차 있으면서도 빈 것처럼 여기고, 누가 시비를 걸어와도 따지며 다투지 아니 한다. 옛적에 나의 친구들이 이런 경지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다.”
8-5. 曾子曰: “以能問於不能, 以多問於寡; 有若無, 實若虛, 犯而不校, 昔者吾友嘗從事於斯矣.”

 

고주에 마음은 여기 증자가 말하는 ()’가 안연(顔淵)이라고 말한다. 새로 나온 당사본 정현 주는 안연, 중궁, 자공 등의 복수인물들을 거론하고 있다. 그러나 증자는 이들에 비하면 한참 어린 후배일 뿐 아니라, 감히 그들을 친구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의 위치에 있질 않았다. 그리고 공문에 머물렀던 시기도 공자말년의 극히 제한된 시기였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의 개념으로 말할 수는 없다. 자기가 경험했던 공자학단의 일반적 분위기를 추상화해서 낭만적으로 일컬은 것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 추상화된 기억을 몇십 년 후의 제자들에게 들려주는 회고담일 뿐이다. 그 회고담의 내용은 특별히 흠잡을 것은 없다. 아무리 내가 능력이 있고 학식이 많다고 자부할지라도 능력이 없고 학식이 없는 자들로부터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포자기의 인간일 뿐이다. ‘물음의 관계를 모든 인간에게 개방치 아니 하면 그 인간의 학식과 능력은 곧 사멸할 뿐이다. 나에게 재덕이 겸비되어 있어도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모든 것이 가득 차 충만할지라도 항상 비어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단지 겸손의 문제가 아니라, 노자가 말하는 ()’의 문제인 것이다. ‘란 바로 나의 존재의 가능성(potentiality)을 항상 남겨두는 것이다.

 

범이불교(犯而不校)’는 분별심을 가지고 따지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 사유방식은 다분 도가적이고 불가적이다. 대체적으로 도가적 분위기가 배어있는 파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종사(從事)’라는 말은 우리가 지금 무슨 일에 종사한다할 때 그 용법의 어원이 되는 말인데, 직업적인 것만 아니라, 추상적인 가치도 종사의 대상이 된다.

 

 

()’는 비교하고 계산하는 것이다. ‘()’는 마융(馬融)이 안연이라고 했는데 그 설이 맞다. 안자의 마음은 오로지 의리(義理)의 무궁함만을 알고, ()ㆍ아()의 사이에 간격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을 수 있었던 것이다.

, 計校也. , 馬氏以爲顔淵是也. 顔子之心, 惟知義理之無窮, 不見物我之有間, 故能如此.

 

사현도가 말하였다: “유족한 것은 나에게만 있고 부족한 것은 남에게만 있다는 식의 분별심이 근본적으로 없으며, 얻는 것은 자기에게만 있고 잃는 것은 남에게만 있다는 식의 필연성이 전혀 무근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아(無我)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다.”

謝氏曰: “不知有餘在己, 不足在人; 不必得爲在己, 失爲在人, 非幾於無我者不能也.”

 

 

정문사선생 중의 하나인 상채(上蔡, 사량좌, 사현도)무아(無我)’를 운운한 것은 정문 초기만 해도 전혀 불교사상에 대한 안티감정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현도는 불교의 견성(見性)이나, 유교의 궁리(窮理)가 동일한 것이라고 보았다. 궁리를 제대로 하려면, 즉 대자연의 리()를 제대로 궁구(窮究)하려면 우선 나()라는 주관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자아의 집념이 있는 이상 리()는 왜곡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정명도의 학문을 사량좌가 이었고, 사량좌의 학문을 육구연이 대성하여 심학(心學)의 물줄기를 형성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안연의 경지나 노자의 허()나 불교의 무아(無我)가 결국 같은 논리의 다른 포장일 뿐이다. 여기서 사량좌가 말하는 논리가 불교의 무아라는 것을 알고 주희가 인용했는지, 모르고 인용했는지 잘 모르겠으나, 아마도 알고 인용했을 것이다. 단지 그것이 이미 도학의 맥락화된 언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용인하였을 것이다.

 

 

 

 

인용

목차 / 전문

공자 철학 / 제자들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