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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태백 제팔 - 9. 유교의 우민화정책인가 합리적 방법인가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태백 제팔 - 9. 유교의 우민화정책인가 합리적 방법인가

건방진방랑자 2021. 6. 26.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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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유교의 우민화정책인가 합리적 방법인가

 

 

8-9.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백성은 말미암게 할 수는 있으나, 알게 할 필요까지는 없다.”
8-9. 子曰: “民可使由之, 不可使知之.”

 

이 장은 논어중에서 실로 많은 해석이 가능하고 또 그만큼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장이다. 간단히 나의 생각만을 논술하겠다.

 

가장 전통적인 해석은 물론 고주의 입장이며, 반드시 그렇게 해석되어야 할 필요까지는 없을 수도 있겠지만, 유가의 우민(愚民)정책의 대표적인 사례로서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백성들이 정부의 시책을 따르게 할 뿐이며[可使由之] 그 시책이 왜 그러한 것인지 그 이유나 내막을 알게 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것[不可使知之]이다. 요즈음 같은 민주세상의 감각으로 볼 때, 더구나 정보가 유통되어 야만 모든 것이 합리적으로 돌아갈 수 있는 세상에서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을 갖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실제로 정현 주에 국한된 것이다. 최근에 발견된 당사본 정현 주가 그렇게 되어있다.

 

 

()’는 따르게 한다는 것이다. 백성은 본시 어두운 것이다(우매하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정도(正道)로써 교화하기만 하면 백성들은 반드시 따르게 되어있다. 만약 그 시책의 본말을 다 자세히 알려주면 백성의 난폭한 자들은 정부를 가볍게 여기고 따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 從也. 民者, 冥也. 以正道敎之, 必從. 如知其本末, 則暴者或輕而不行.

 

 

그러나 가장 전통적 주석의 표준이 되는 고주인 하안(何晏)의 집해는 실상 다음과 같이 되어있다.

 

 

()’는 쓴다는 것이다. 백성들로 하여금 쓰게 할지언정 알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은 백성들이 능히 날로 쓰면서도 능히 알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 用也. 可使用而不可使知之者, 百姓能日用而不能知也.

 

 

하안의 이 말만 가지고는 실상 하안의 언어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과연 이것이 곧바로 정현이 말하는 바 우민정책을 의미하는 것인지 단정할 수가 없다. 노자17에는 이런 말이 있다.

 

 

가장 좋은 정치는 밑에 있는 사람들이 다스리는 자가 있다는 것만 알 뿐이다. 그 다음의 정치는 백성들을 친하게 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그 다음의 정치는 백성들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이다. 다스리는 자의 공이 이루어지고 일이 다 잘되어도 백성들은 모두 한결같이 일컬어 나 스스로 그러할 뿐이다라고 한다.

太上下知有之, 其次親而譽之, 其次畏之. 功成事遂, 百姓皆謂我自然.

 

 

하안이 백성들이 일용(日用)하면서도 알지는 못한다고 주석한 뜻을 이러한 도가적 맥락에서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과거 전통사회에서는 주지주의적 치세방법에 관해 그렇게 절실한 요구가 있지는 않았다. 백성 스스로 잘 살고 있다고 느끼면 최상일 뿐, 거기에 대하여 구구한 설명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백성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오히려 불필요한 간섭이었다. 부모ㆍ자식간에도 자식이 아무 탈 없이 잘 살고 있으면 소식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다. 그런데 갑자기 의논할 일이 있다든가 알려드릴 일이 있다고 하면 겁이 덜컥 날 수도 있다. 그래서 진사이는 아예, 정부는 백성들에게 문화혜택을 주어 모든 시설을 활용케 해주면 그뿐이지, 그것을 자기들이 그렇게 해주었다고 생색을 내면서 백성들에게 알려줄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해석했다. 오히려 알려주지 않는 것이 왕도(王道)이며 알리면서 생색내는 것이 패도(覇道)의 전형이라고 주석했다. 백성들이 날로 좋은 방향으로 나가도록 해주면서도 그들이 스스로 그러하다고 생각토록 해준다는 것이다.

 

신주는 이상과 현실의 거리를 지적한다. 정부의 시책에 대하여 백성 전부가 그 이유를 알며는 좋겠지만, 한 가호 한 가호 찾아다니면서 다 알려줄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말미암게만 할 뿐이라는 것이다. 우민의 의도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다산도 이러한 신주의 입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물론 소라이(荻生徂徠), 공자가 알릴 필요가 없다라고 말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자연지세(自然之勢)’라고 일갈하면서 일체의 변명을 하지 않는다. 인간의 지혜라는 것은 사태에 정확히 도달하는 것도 있고 도달치 못하는 것도 있다. 성인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을 강요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백성들로 하여금 그 교화를 말미암게 할 뿐이지, 왜 교화를 시키는지 그것을 다 알도록 하게 할 방도는 없다는 것이다. 정치란 오직 보이는 것일 뿐이며 알리는 것이 아니다. 아는 것은 백성 마음대로 라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어차피 지()ㆍ우()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똑똑한 사람들이라면 자기들이 궁금한 것은 알아서 스스로 다 해결한다는 것이다[至其俊秀, 則使學以知之, 亦唯禮樂不言, 以行興事示之而已. 故其知之也, 自知之也]. 하여튼 천차만별의 해석이 가능한 장이라 하겠다.

 

내가 대만대학 철학과에서 공부할 때에 황 똥메이(方東美, 1899~1977) 교수는 강의중에 이 구절에 관하여 매우 독특한 해석을 제시하셨다. 구독점을 달리 찍어 해결하는 것이다.

 

 

민이 가하다고 말하면 그것에 말미암게 만들고, 불가하다고 말하면 그것을 알도록 해주어라.

民可, 使由之; 不可, 使知之.

 

 

매우 기발한 해석이지만 너무 현대적이다. 백성들이 가하다’ ‘불가하다는 의사표시를 할 수 있고 거기에 따라 군주나 정부의 태도가 결정된다는 것은 고대사회의 논리에 잘 맞아떨어지기 힘든 구석이 있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 장의 해석에 관하여 너무 심각한 논의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백성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잘사는 것이지, ‘잘살고 못사는 것에 대한 이유를 아는 것은 아니다. 이 장은 도가적 자연주의(Philosophy of What-is-so-of-itself)의 논조 속에서 해석되는 것이 가장 무난할 것이다. 요즈음 같은 세상에서는 불필요한 정보의 순환이 국민의 삶을 해치는 상황도 비일비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국민을 말미암게만 한다는 태도가 정부의 시책의 일방적 판단을 보장하는 것이 되면 그것은 위험하다. 치자의 판단을 체크할 수 있는 피드백 시스템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체제는 어떠한 경우에도 바람직하지 않다. 이 장은 그러한 원칙에 관계없는 가벼운 이야기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원칙을 위배하는 요소를 포함한다면 당연히 본 장은 파기되어야 마땅하다. 모든 인류의 고경(古經)에 대하여 우리는 항상 취사선택이 가능하다. 고경은 오늘 우리 실존의 레퍼런스일 뿐이다.

 

 

()’이란 도리의 당연한 것에 말미암게는 할 수는 있어도, 그러한 도리가 왜 그렇게 되는 것인지 그 까닭을 다 알게 할 수는 없다.

民可使之由於是理之當然, 而不能使之知其所以然也.

 

정이천이 말하였다: “성인께서 가르침을 베풀 때에는 가가호호 찾아다니면서 사람들에게 깨우쳐주려고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도리를 모두 다 알게는 할 수가 없으므로 다만 능히 말미암게 할 뿐이다. 만일 성인께서 백성들이 알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라고만 말했다면 이것은 후세의 조삼모사(朝三暮四)주희 본문은 조사모삼(朝四暮三). 열자(列子)』 「황제(黃帝)의 속임수를 쓰는 술책이니, 어찌 성인의 마음이라 할 수 있겠는가?”

程子曰: “聖人設敎, 非不欲人家喩而戶曉也, 然不能使之知, 但能使之由之爾. 若曰聖人不使民知, 則是後世朝四暮三之術也, 豈聖人之心乎?”

 

 

대체로 이 장에 수록된 공자의 말씀이 증자학파 내에서 전승되고 편집 된 것이라는 것을 전제로 해서 보면, 그 수준이 역시 증자학파의 수준을 따라가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구구한 변명을 해야 하는 파편, 그 자체의 인식구도가 공자 자신의 문제라기보다는 증자학단 자체의 문제일 수도 있다. 술이(述而)편에 비해 그 질감이 훨씬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독자들 스스로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장의 내용도 참으로 건강치 못한 체제지향적 논리 위에 서있다. 전국시대의 상황이 반영된 것이며 공자 자신의 언급으로 간주하기가 어렵다.

 

 

 

 

인용

목차 / 전문

공자 철학 / 제자들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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