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이 ‘연암(燕巖)’으로 달아난 까닭은?③
이후 연암은 연암협과 서울을 오가면서 지내는데, 이 시절의 모습이 잘 그려진 자료가 있다. 먼저 제자 이서구가 쓴 「하야방연암장인기(夏夜訪燕巖丈人記)」. 5월 그믐밤 이서구가 연암댁을 찾는다. 골목으로 접어들어 집 들창을 살펴보니 등불이 비치고 있었다. 문으로 들어서자, “어른께서는 벌써 사흘째 끼니를 거르고 계셨다. 마침 맨발에 맨상투로 창턱 위에 다리를 걸치고서 문간방의 아랫것과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중이었다[丈人不食已三朝矣, 方跣足解巾, 加股房櫳, 與廊曲賤隸相問答].” 이서구가 온 것을 보고서는 옷을 고쳐 입고 앉은 뒤, “고금의 치란과 당대 문장명론(文章名論)의 파별동이(派別同異)”를 자세히 논했다. 밤은 삼경을 지나고 은하수가 등불에 흔들리는 속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런 내용이 담긴 편지를 받은 뒤, 연암은 답장을 쓴다. 「소완정의 하야방우기에 화답하다[酬素玩亭夏夜訪友記]」가 그것. 그때의 상황이 좀더 상세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식구들은 이때 광릉에 있었”고, 그는 “평소에 살이 쪄서 더위를 괴로워하는 데다 또 푸나무가 울창해서 여름 밤이면 모기와 파리가 걱정되고, 논에서는 개구리가 밤낮 쉴새없이 울어대는 까닭에, 매번 여름만 되면 항상 서울 집으로 피서를” 오곤 했다. 그런데 당시 “홀로 계집종 하나가 집을 지키다가 갑자기 눈병이 나서 미쳐 소리지르며 주인을 버리고 떠나가 버려 밥지어줄 사람이 없었”고, 그래서 “행랑채에 밥을 부쳐 먹다보니 자연히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이서구가 방문할 당시 과연 사흘 아침을 굶고 있었는데, 행랑채의 아랫것이 지붕 얹어주는 일을 하고 품삯을 받아와 밤에야 비로소 밥을 지어 먹게 되었다. 식사를 마치고 곤하여 누웠는데, 행랑채의 어린 것이 밥투정을 하자 그 아비가 화가 나서 밥 주발을 엎어 개에게 던져주며 욕을 해대는 걸 듣고는 이런저런 비유로 타이르는 장면을 연출하게 된 것이다. 이런 정황 설명에 이어 당시 자신의 일상사를 그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고요히 앉아 한 생각도 뜻 속에 두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더욱 성글고 게으른 것이 몸에 배어 경조사도 폐하여 끊었다. 혹 여러 날을 세수도 하지 않고, 열흘이나 두건을 하지 않기도 하였다. 손님이 이르면 말없이 가만히 앉아 있기나 하고, 혹 땔감이나 참외 파는 자가 지나가면 불러다가 더불어 효제충신과 예의염치를 이야기하며 정성스레 수백 마디의 말을 나누곤 하였다.
靜居無一念在意. 時得鄕書, 但閱其平安字. 益習疎懶, 廢絶慶弔. 或數日不洗面, 或一旬不裹巾. 客至或黙然淸坐, 或販薪賣瓜者過, 呼與語孝悌忠信禮義廉恥, 款款語屢數百言.
말하자면 “제 집에 있으면서 객처럼 지내고 아내가 있으면서 중처럼[其在家爲客, 有妻如僧]” 사는 식이었던 것이다. 마치 흥부처럼 다리 부러진 새끼 까치에게 밥알을 던져주기도 하고, “자다가 깨면 책을 보고, 책을 보다간 또 잠을” 자는데, 아무도 깨우는 이가 없고 보니, 어떤 때는 하루 종일 쿨쿨 자기도 했다. 간혹 글을 지어 뜻을 보이기도 하고, 칠현금을 배워 몇 곡조 뜯기도 하고, 혹은 술을 보내주는 이가 있으면 기쁘게 마시기도 했다. 그러나 이 한없는 유유자적함에는 깊은 적막과 쓸쓸함이 배어 있다. “금년에 마흔도 못 되었는데 이미 터럭이 허옇게 세었”고, “이미 병들고 지쳐서 기백이 쇠락하여 담담히 세상에 뜻이 없”다고, 그는 토로한다. 그 허허로운 목소리와 함께 열정어린 젊음의 뒤안길을 헤쳐나온 쓸쓸한 중년 박지원의 모습이 클로즈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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