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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1부 “나는 너고, 너는 나다” - 2장 탈주ㆍ우정ㆍ도주, 연암이 ‘연암(燕巖)’으로 달아난 까닭은?②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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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1부 “나는 너고, 너는 나다” - 2장 탈주ㆍ우정ㆍ도주, 연암이 ‘연암(燕巖)’으로 달아난 까닭은?②

건방진방랑자 2021. 7. 8.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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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이 연암(燕巖)’으로 달아난 까닭은?

 

 

1778년 연암은 전의감동에서의 빛나는 밴드생활을 청산하고 황해도 연암동으로 떠난다. 그러나 이것은 젊은 날의 유쾌한 유람이 아니라 일종의 도주였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정조의 왕위계승을 꺼려하던 인물들이 대거 숙청되면서 정조의 즉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홍국영이 정계의 실력자로 부상한다. 홍국영(洪國榮)의 세도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삼종형 박재원(朴在源)이 홍국영의 비위를 거슬러 파직되면서, 평소 홍국영에 대해 비판적인 언사를 삼가지 않았던 연암 주변에까지 점차 권력의 그물망이 조여들고 있었다. 위기를 감지한 친구들이 그에게 피신할 계책을 세우도록 재촉하는데, 이 장면도 한편의 드라마. 과정록(過庭錄)1에 나오는 이야기다.

 

홍국영 밑에 있는 협객들과 각별한 인맥을 가지고 있던 백동수가 먼저 정보를 입수하고선 급히 달려왔다. “서둘러 서울을 떠나야 하네. 한동안 연암골에 들어가 몸을 숨기고 죽은 듯이 지내는 것이 상책일 듯하이.” 마침 친구 유언호도 조정에서 돌아와 밤에 연암을 찾아왔다.

 

 

자네는 어쩌자고 홍국영의 비위를 그토록 거슬렀는가? 자네에게 몹시 독을 품고 있으니 어떤 화가 미칠지 알 수 없네. 그가 자네를 해치려고 틈을 엿본 지 오래라네. 다만 자네가 조정 벼슬아치가 아니기 때문에 짐짓 늦추어 온 것뿐이지. 이제 복수의 대상이 거의 다 제거됐으니 다음 차례는 자넬 걸세. 자네 이야기만 나오면 그 눈초리가 몹시 험악해지니 필시 화를 면치 못할 것 같네. 이 일을 어쩌면 좋겠나? 될 수 있는 한 빨리 서울을 떠나게나.

君何大忤洪國榮也? 啣之深毒, 禍不可測. 彼之欲修隙, 久矣, 特以非朝端人, 故姑緩之. 今睚眦幾盡, 次及君矣. 每語到君邊, 眉睫甚惡, 必不免矣. 爲之柰何? 可急離城闉

 

 

사실 이것도 미스터리 가운데 하나다. 관직에 뜻이 없고, 당파와 어울리지도 않았고, 그저 의기투합한 친구들과 놀기에 바쁜 일개 문인이 최고 세도가의 표적이 될 수 있다니. 지인들의 말대로, 평소 의론이 곧고 바른 데다 명성이 너무 높았던 게 화를 부른 원인이었을까? 남아 있는 연암의 글에는 당대의 중앙정계를 직접 겨냥한 언술은 거의 없다. 앞에서도 말했듯, 그는 태생적으로 비정치적인물이었을 뿐 아니라, 남을 비판하는 것을 즐겨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대체 권세가들이 그를 꺼려한, 아니 두려워한 이유가 무얼까? 그 상세한 내막이야 알 길이 없지만, 다만 분명한 건 연암의 움직임 자체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정치적 파급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어쨌든 정국은 연암에게 불리하게 돌아갔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정형편 역시 좋지 않았다. 1777년 그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했던 장인 이보천이 별세하고, 그 다음해(1778) 가족의 생계를 담당하던 형수마저 병사하자 연암은 스스로 생계를 마련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말하자면 먹고 살기위해서도 연암은 연암골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실제로 연암동에서 초가삼간을 짓고, 손수 뽕나무를 심었다. 열하일기』 「동란섭필(銅蘭涉筆)에는 이 즈음으로 추정되는 일을 회상하는 장면이 하나 나온다.

 

 

나 역시 성질이 재물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이렇게 가난하게 되었으나, 평생에 베낀 책을 점검해보니 불과 열 권이 차지 못하고, 연암 골짜기에 손수 심은 뽕나무가 겨우 열 두 포기이다. 그나마 긴 가지라는 것이 겨우 어깨에 닿을지 말지 하매 일찍이 슬픈 한탄을 금할 수 없었던 바, 이번에 요동벌을 지나오면서 밭가에 둘린 뽕나무 숲을 바라보다가, 끝없이 넓은 것을 보고는 망연자실할 따름이었다.

余亦性不好貨, 故以至貧乏, 然點檢平生所寫書, 不滿十卷, 燕巖手所種桑纔十二株. 其長條纔得及肩, 甞不禁惋歎, 今經遼野護田桑林, 一望無際, 則又茫然自失矣.

 

 

물론 그렇다고 그가 완전히 변방에서 잠수한 건 아니다. 연암골로 도주하자, 친구 유언호가 개성유수를 자임한다. 그의 주선으로 연암은 개성 부근 금학동 별장으로 거처를 옮기고, 인근 지방의 젊은이들 가르치는 일을 담당한다. 유언호는 뒤탈을 막기 위해 조정에 들어가 짐짓 연임에 대해 가족을 이끌고 떠돌다가 그만 부잣집에 눌러앉아 늙은 훈장 노릇을 하고 있다는군요[其挈家流離, 來作松京富人家老學究也]”했더니, 홍국영(洪國榮)참으로 형편없이 됐으니 논할 것도 없구려[眞腐矣! 無足論也]”라고 했다나. 위기 탈출!

 

19세기 방랑시인 김삿갓이 말해주듯, 조선 후기 지식인의 광범위한 분화 속에서 촌학구(村學究, 시골 글방 스승)란 지식인이 다다를 수 있는 일종의 막장같은 것이었다. 그러니 홍국영(洪國榮)으로서도 마음을 놓을밖에. 그러나 연암은 이 기회를 제도권 밖에서 지식의 전수를 실험하는 일종의 열린 교육터로 활용한다. 즉 그는 오로지 과거시험밖에 몰랐던 변방의 젊은이들에게 학문하는 즐거움을 가르친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듣고서야 비로소 과거 공부 이외에 문장 공부가 있고, 문장 공부 위에 학문이 있으며, 학문이란 글을 끊어 읽거나 글에다 훈고(訓詁)를 붙이는 것만으로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及聞先生敎誨, 始知功合之外, 有文章, 文章之上, 有學術, 學術不可但以句讀訓詁爲也].” 말하자면 연암은 입시 공부에 시달리는 학인들에게 사색하는 법, 토론, 분변(分辨)하는 법을 가르쳤던 것이다. 과정록(過庭錄)1에 나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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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열하일기

문체반정

박지원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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